엄마는 초등학교도 졸업하지 못했다. 집안이 가난해서 외할머니가 첫째인 엄마를 희생시켰기 때문이다. 한글은 겨우 스스로 공부해서 떼고, 영어는 아예 까막눈인 엄마와 함께 어느날 괌으로 여행을 갔다.
난 대학교 4학년이었고 영어교육학과를 복수 전공하면서 영어교사가 되기 위한 준비 중이었다. 고로 나의 영어 실력은 엄마보다 훨씬 좋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정작 괌에 가서 쓰인 영어 실력은 엄마의 영어(?) 실력뿐이었다.
우린 호텔 방 하나를 나눠 썼다. 미국의 팁 문화에 대해 들어봤던 나는 호텔 방을 나가기 전에는 항상 침대 위에 1-2달러를 올려두고 나가야 한다고 말해주었다. 호텔 방을 청소하는 사람에 대한 예의라고 하면서.
그런데, 어느 날 우리 둘 다 팁을 두고 가야 한다는 것을 잊고 나갔다가 방에 들어온 순간 기억했다. 엄청난 실수를 한 거라며 서로 고민을 하기 시작했다.
그 순간 복도에서 소리가 나서 가 보니 청소하는 직원이 청소 카트를 밀며 가고 있었다. 엄마는 곧바로 그 사람한테 달려가서 2달러를 주면서 아주 유창한 '한국말'로 우리가 모르고 돈을 두고 가지 않았으니 돈을 받으라고 했다. 하지만 직원은 아주 짧은 영어와 자신의 모국어 인듯한 언어를 쓰며 계속 아니라고 했다.
엄마가 청소 직원과 이해 할 수 없는 말로 씨름하고 있을 때, 난 방안에서 숨을 죽이고 돌처럼 굳어졌다. 직원에게 어떻게 이 상황을 영어로 표현해야 할지 앞이 깜깜했다. 도저히 밖에 나갈 용기가 나지 않았다. 내가 영어 울렁증과 싸우고 있을 때 엄마는 방으로 들어왔다.
"내가 계속 돈을 받으라고 했는데 안 받드랑께. 우리 방 청소하는 사람이 아닌 가벼. 다른 사람이 청소한다고 하드라."
엄마는 분명 한국말만 했고 그 직원은 짧은 영어를 쓰는 동남아시아 사람이었다. 이 모든 정보를 어떻게 알았는지 난 너무 놀라울 뿐이었다. 엄마의 영어 실력 플렉스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괌으로 같이 여행 간 일행들과 함께 모여 주변 관광지를 돌기로 약속했다. 호텔 로비에서 엄마와 함께 일행을 기다리고 있었다. 난 잠깐 화장실에 갔고 엄마는 혼자 소파에 앉아 있었다. 화장실에서 돌아온 나는 엄청난 관경을 목격했다.
엄마가 어떤 미국 여자와 대화를 하고 있었다! 엄마는 자기 나이를 얘기하면서 미국인 여자에게 몇 살이냐고 물어뵜다. 여자는 계속 영어를 말하면서도 엄마가 하는 말을 이해하고 있었다. 엄마의 손짓 발짓을 보면서. 그리고 손가락으로 자신의 나이를 알려주었다.
나는 이 광경이 그저 놀라울 수밖에 없었다. 난 중1학년 때부터 대학교 4학년까지 계속 영어공부를 해 왔고 영어교사가 될 사람인데 엄마만큼 외국인과 능수능란하게 의사소통을 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나는 미국 문화에 대하여 엄마에게 일장 연설을 해주었다.
"엄마, 미국 사람들은 자기 나이 물어보는 거 싫어해. 한국사람들이랑 달라."
"오, 그라냐? 난 그것도 모르고. 그라믄 우짜냐?"
그때, 그 미국인 여자는 엄마한테 와서 자기는 이제 가야 한다고 이야기 재미있었다고 하며 인사를 하러 우리 쪽으로 왔다. 그러자 엄마는,
"오메. 오메. 내가 미안하요. 내가 뭘 몰라브러서 나이를 물어봤당께. 미안허요. 그래. 잘 가씨요~~!"
미국인 여자는 엄마가 무슨 말을 하는지 하나도 알아듣지 못했지만, 헤어지는 인사임을 알고 있었다. 활짝 웃으며 돌아서는 여자의 모습이 난 그때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조금 이해가 된다.
영어를 모국어로 쓰는 사람들은 영어를 잘 모르는 사람들에게 그들이 기본적으로 생각하는 예절이나 기본적인 문화적 양식을 따르도록 강요하지 않는 것 같다. 그리고 상대가 그런 실수를 해도 잘 몰라서 그려려니 그냥 쉽게 넘어가 준다. 하지만, 동양인처럼 생긴 사람이 영어를 너무 잘한다면? 그리고 문화적으로 결례가 되는 행동이나 말을 한다면? 그런 경우라면 그런 실수를 그냥 눈감아 주지 않는다. 영어를 못하는 척(?!)하는 것이 영어를 못하는 사람에게는 유리 할 경우도 있다.
엄마처럼 한국말이라도 근질거려야 외국인과의 관계를 맺을 수 있고 결국에는 이 관계와 오고가는 대화속에서 영어도 배울 수 있는 것이다.
몇년 후 학교에서 영어를 가르치면서 엄마의 괌활약상을 이야기해줬다. 아이들에게 외국인 앞에서 주눅들어서 아무 말도 못하지 말고 그냥 한국말이라도 당당하게 하라고 했다. 수업 후 대부분의 아이들은 외국인들에게 한국말을 해도 된다는 것을 처음 알게됐다고 했다.
영어로 입이 근질거려 지지 않으면 한국어라도 해서 외국인과 소통하려는 자세는 영어공부의 기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