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임선을 넘어오는 장거리 여행은 내 생애 두번째다.
20살때 친구들과 유럽여행을 갔었다.
졸업식도 못하고 산골짜기로 들어가 재수하겠다는 나를 위해 졸업장을 대신 챙겨주고, 마지막 교복사진을 찍을 수 있게 사진관을 예약해줬던 친구들과 떠나온 첫 여행이었다. 원래도 이동수단에서 못 자는 나였지만, 그때는 창문을 볼 수 있는 자리도 아니였고 그저 작은 좌석에 몸을 우겨넣고 기내식에 감사하며 쪽잠을 자는 정도여서, 타임선에 대한 개념이 없었다.
그리고 30살. 서른이 된 올해, 첫 미국으로 떠났다.
여전히 이동수단에서 잠을 못 자서, 저녁먹고 쪽잠잔 이후 내내 깨어있었다. 와인과 맥주를 들이 부어도 의미 없었고 라면으로 식곤증을 유도한 것도 의미없었다. 덕분에 못 읽던 책을 읽고, 이렇게 글을 쓰고 있으니 이득이라 할까.
덕분에 시간선을 넘어오는걸 볼 수 있었다.
10년전엔 상상도 못했던 모습이기도 했다.
칼졸업후 줄곧 쉼 없이 일 하면서 모든 혜택을 마일리지 적립에 쏟아 부은 탓에
약간의 돈 만으로도 항공권을 얻을 수있어서 걱정없이 떠나 올 수 있었다.
다리 쭉 뻗고 누워서 와인이니 위스키니 무한으로 먹을 수 있는 것은 내 경력에 대한 반증이었다.
10시간 비행을 내리 깨어 있으면서
한국 시간으로 자정이 다 될 무렵엔 창문 밖에도 어둠이 드리워 지고,
나는 이걸 실시간으로 보고,
성층권까지 올라와서 그런가 구름없이 맑은 하늘이 비행기 위에 펼쳐지고,
내 창문밖으로 본 풍경 안엔 우리 비행기 날개 위에 올라 앉은 북두칠성이 줄곧 우리를 따라왔다.
그러고보니 모두 새 챕터를 열때 멀리 떠나왔다.
앞자리가 바뀔때마다 해외여행이라니.
내 인생에는 도망이라는 단어가 없다고 생각했는데,
정작 생애 간절히 바라오던 것은 도망일수도 있겠다.
언젠가 지난 연인이 나에 대해 묘사한 편지를 써 주면서 여행을 좋아한다고 언급했던 적이 있다.
일상에 너무 모든걸 쏟아붓는 타입이라 그런지
지친 나머지 잠시나마 잊고 떠나오는걸 좋아하는 것 같다고.
사실 내 스스로는 내가 원체 놀러다니는 걸 좋아해서 그렇다고 생각했는데
문득 이제와서 그 친구의 말이 떠오른건 왜일까.
나에게 해뜰때 떠나와 해질때 돌아가는 여행을 알려준 사람,
비행기에서 보는 여명의 묘미를 알게 한 사람.
그렇게 한번 꽉 찬 여행을 다녀오면 또 무엇이든 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으로 일상을 살 수 있었다.
꼭 라이언킹의 사막마냥 붉게 물든 대기를 보면서 그때의 내가 떠올랐다.
새로운 시작을 앞두고 제일 방황하던 과거의 나와 오버랩하다니 나도 참 웃기지,
뭐라도 잘 될 것 같다는 오만한 생각이 가득찬다.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는다는 말이 사실 많은 것을 바꾼다는 걸 알고있다.
지금, 달라진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러나 무언가 다를 것 같다.
이제야 새 챕터가 열리는 기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