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에 읽은 동화는 아이들의 심리가 잘 드러나는 단편동화집 [천천히 안녕]이라는 작품이다.
동화집에 나오는 인물들의 나이가 모두 초등학교 고학년인 4,5, 6학년 아이들의 이야기이다. 중학년과 고학년을 넘나드는 4학년, 중2에 맞먹는 5학년, 곧 졸업을 앞둔 또 다른 학년을 올라가는 6학년 아이들의 이야기를 담은 동화라 내면을 어떻게 그렸을지 궁금했다.
그리고 이 동화는 책 속 삽화가 정말 예쁘다. 단편들이 시작하기 전에 그림이 나오는데 제목을 토대로 그린 것 같다. 책에 실린 그림들이 최근에 많이 나오는 웹툰스럽지 않고 수채물감으로 그린 것 같은 그림이 참 맘에 들었다.
고재현 작가의 작품을 처음 만난 것은 [책방거리 수사대]라는 장편동화로, 아이가 독서토론에 읽을 책으로 선정이 되어 나도 함께 읽었다.
현시대의 댓글과 같은 기능을 옛날에도 존재할 것이라는 설정, 그 댓글을 쓴 사람들을 추적해 나가는 나름 추리물이었다. 꽤 재미있게 읽었던 작품이라 다른 작품들도 궁금해 찾아보게 되었는데 비교적 최근(2021년)에 쓰인 이 동화집을 한 번 읽어보기로 했다.
이 동화집에는 총 6편의 단편동화가 실려 있다.
첫 번째 동화인 <옆 반 아이>는 매일 지각하는 4학년 도진이가 복도에서 벌을 서는 동안 만난 옆 반 아이 계영이와 함께 일어나는 일들을 그렸다. 핼러윈데이 축제 때 도깨비 분장을 한 도진이는 자신만큼 열심히 분장을 한 외계인 친구를 만나는데 이 아이의 얼굴을 분장을 하지 않은 맨 얼굴이었다.
아빠가 양팔을 벌리고 달빛으로 목욕을 했다.
달빛 속에서 몸이 두 배로 커진 아빠는 거대한 장수 같았다.
아빠가 조심스럽게 감투를 받아 쓰자 감쪽같이 모습이 사라졌다. p21
서사가 판타지로 흐른다. 도진이와 계영은 옥상의 난간 위에 올라서 랩을 하기도 하고 그 옆 반에 있는 '사이사이사이'에 있는 아이를 또 찾아낸다.
옆반 아이는 바로 붉은여우이고 4학년 1반 강여은 여자아이로 둔갑한 채 나타난다.
동화 속 그림을 보고 어떤 이야기를 표현할 걸까 궁금했는데 이 아이들이었다.
도깨비, 외계인, 여우.
동화 속에선 누구나 친구가 될 수 있다는 걸 이 동화를 읽다 보면 자연스레 알게 된다.
<자꾸 생각나>는 두 번째 동화로 '커플 되기' 유행을 그렸다. 이 동화의 화자는 6학년이 되기 전, 바로 5학년의 이야기다.
보통 주인공이 5학년이라면 읽는 어린이는 +- 해서 4~6학년의 초등학생이 독자가 된다.
꼰대스러운 발언일지 모르지만 이 동화를 읽으며 초등학생이 연애를?이라는 반응이 나왔다.
송하은과 강민규라는 두 아이의 속마음을 몰래 일기 훔쳐보듯 읽는 재미가 있었다.
내 눈에만 하은이 얼굴이 크게 보인다는 건가. 언젠가부터 많은 아이들 속에서 하은이 얼굴만 보였다. 어디서든 금방 찾아낼 수 있었다. (민규의 시선) p34
사랑에 빠지면 그 사람의 얼굴만 보인다는 것은 연애를 해본 사람들이라면, 썸을 타본 사람들이라면 알 수 있다. 이건 모쏠도 알 수는 있을 것이다. 짝사랑 정도는 해봤을 테니 말이다. (모쏠인 우리 딸의 원성이 들리는 듯하다.)
하은과 민규 사이에서 눈치 빠른 태영이의 이야기가 어우러져 동화는 더 맛깔스럽게 재미있어진다.
동화를 읽다 보면 태영이 역시 하은에게 마음이 있는 것 같다. 하은이의 성격과 인성은 반 아이들의 인기를 한 몸에 받을 수 있을만했다.
하은이는 단순히 외모 때문에 인기가 많은 게 아니었다. 저보다 못난 아이들을 무시하지 않고, 땀 냄새나는 아이들을 벌레 보듯 피하지도 않았다. 힘도 세다. (태영의 시선) p40
다른 여자아이들과 다르게 축구공을 세게 차기도 하는 하은에게 매력을 느끼는 것 같다.
두 남자아이의 사랑고백을 받은 하은이는 누구를 선택하게 될까?
처음에는 하은이는 민규를 좋아했지만 다른 아이들과 다른 행동을 하는 태영이에게 관심이 생긴다.
내 마음에 먼저 민규가 들어와 있었다. 왠지 민규와의 우정은, 사랑은 예정된 것 같았다. 그러니까, 태영이의 고백에 마음이 흔들려서는 안 된다. 그럴수록 직진이다. (하은의 시선) p42
상여자 하은이는 태영에게 거절의 의사를 밝히고 민규와 1일을 선택한다. 그리고 민규 역시 '오늘부터 1일'을 sns 프로필에 넣어둔다.
태영이도 그와 같은 문구를 넣어놓는데 그 이유가 타당해 보였다.
하은에게 거절당한 후의 1일이고, 민규와 의정을 지켜 낸 1일이고, 누군가를 좋아한다는 건 행복과 슬픔이 동시에 올 수도 있다는 걸 깨달은 1일이었다. p51
5학년 세 아이의 내면을 들여다볼 수 있었는데 좀 더 일찍 이 책을 읽었다면 어땠을까 싶기도 하다. 예민한 감성을 지난 여자아이, 한 발자국 멀리서 바라봐줘야 하는 남자아이를 키우는 입장에서 이 동화는 양쪽 입장을 들어볼 수 있었다.
세 번째 동화 < 불 꺼진 사이에>는 오빠가 있는 정반대 성격의 두 여자아이 소혜와 진주의 이야기이다.
오빠의 심부름으로 아이스크림을 사 오다 아파트 정전으로 인해 엘리베이터에 갇힌 진주는 반에서 자신이 '아싸'로 불린다는 걸 알게 된다. 진주는 소혜에게 아이스크림을 건네고 각자의 오빠 흉을 보며 어둡고 갇힌 것에 대한 공포심을 달랜다.
119를 부르지 않고 승강기 회사 직원을 부른 경비아저씨의 말을 듣고 소혜는 울기 시작하고, 진주는 '인싸'였던 아이가 그런 모습을 보이자 한심해한다.
소혜는 혼자 뭐든 할 수 있는 진주가 부럽고, 진주는 아이들에게 둘러싸여 항상 밝게 웃는 모습의 소혜가 부럽다.
내가 혼자 있는 걸 좋아하는 건 맞다. 그래도 아이들 모두 아는 얘기를 나만 모를 때 나도 힘들다. 아이들이 여럿 모여 손가락으로 별 모양을 만들어 사진을 찍을 때, 나도 그런 사진 한 장쯤 갖고 싶다. p66
혼자인 게 좋다고 해도, 친구가 싫은 건 아니다.
이건 내 마음을 들여다본 것 같은 문장이었다.
나도 혼자 다니는 게 편하기도 하고 이것저것 신경을 안 써서 좋긴 하지만 그래도 친구는 좋다. 뭔가 고민이 있을 때 어떤 말이든 들어주는 친구들이 있어 항상 고맙다.
이 동화를 읽으면서 느낀 것은 정말 잔인한 어른들이 많구나 싶었다.
초등학생 아이들이 갇혔는데 내버려 두고 자리를 뜨고 119를 부르지 않았다. 시간이 흐른 후 계단을 올라가는 사람들의 발소리에 아이들이 신고를 해달라고 하자, 그제야 소방차는 달려온다.
구조대원을 맞이하는 아이들은 또다시 갈린다. 소혜는 엘리베이터 안에 있었던 일을 미주알고주알 구조대원에게 말하기 바쁘고 그 모습을 진주는 조용히 바라본다.
아이들은 금방 다시 제자리를 찾는 것 같다.
다음 작품은 표제작 <천천히 안녕>이다.
이 작품의 그림에는 냉장고와 거북이가 나왔다. 등장인물에 대한 설명이겠지? 하고 다음 장을 넘겼다.
기욱이는 반려 거북 '부기'를 키우며 일 년 동안 함께 살았지만 갑자기 죽고 말았고 냉장고 안에 넣어 두었다.
엄마는 계속해서 버리려고 하고 기욱이는 냉장고를 지킨다.
이 마음을 나는 알 것 같다.
지금 같이 살고 있는 반려견 '미남이'의 모견인 '포미'가 미남이를 낳다가 무지개다리를 건넜다. 병원에서의 실수를 인정했지만 포미가 돌아오진 않았고 병원에서 포미를 데려오고 한동안 같이 있었다.
점점 몸이 굳고 뻣뻣해지자, 시골집 뒷마당 나무 밑에 묻어주었다.
묻던 날 비가 많이 내렸는데 아버지가 땅을 파고 묻어주셨다. 그 모습을 그냥 바라만 보다가 아버지에게 우산을 씌워드리자, 이렇게 말씀하셨다.
"좋은 데 갔을 거다."
무뚝뚝한 아버지의 그 한 마디를 듣고 나는 엉엉 울었고 아버진 좀 더 있다가 오라고 하고는 들어가셨다.
아주 비가 많이 내렸고, 내 눈에는 눈물이 펑펑 흘렀다.
보통 반려동물을 잃었을 때 슬픔은 새로운 반려동물로 잊혀 간다. 나 같은 경우 미남이가 그 아픔을 어루만져줬다. 진짜 버릇도 없고, 자기가 사람인 줄 알고 있으며, 개춘기가 와 아주 개판을 만들어놓아도 이 미남이가 없었다면 그 시간을 어찌 보냈을까 싶기도 하다.
기욱이에게 부기 대신할 동물이 나타난다. 어미를 잃은 고양이가 따라 들어왔고 말을 하기 시작한다.
자신을 부기라고 소개하는 고양이.
흐억, 팔에 소름이 돋았다.
헷갈리지? 잠자는 다른 동물의 몸을 잠시 빌리는 건 나도 처음 해 보는 일이라 얼떨떨해. p82
고양이 몸이지만 행동은 부기가 예전에 보여줬던 어눌하고 느릿한 모습과 동일했다.
부기는 아이에게 어떤 동물로 태어났으면 좋겠냐고 묻는다.
자신에게 했던 것처럼 사람 친구에게 정성과 사랑을 쏟아 보는 건 어떠냐고 묻는다.
그리고 자신을 놓아달라고 한다. 냉장고에 계속 있으면 떠날 수가 없다고.
또다시 이별을 해야 할 시간이 왔다.
가족은 부기의 노란 줄무늬를 닮은 은행나무 아래 부기를 묻어주기로 한다. 그리고 기욱이는 천천히 다른 동물을 키우기로 한다. 우선, 고양이 가족을 돌봐주고.
다음 작품은 <영재의 의자>. 여전히 예쁜 그림이 나를 맞이한다.
이 동화에 나오는 아이 송구는 4학년이다.
중고가게에서 사 온 파란색 의자와 함께 온 최영재라는 동학년 친구를 만나게 되면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엄마 눈에는 보이지 않고 오로지 송구 눈에만 보인다.
송구는 자신을 대신해 숙제를 해준 영재 덕분에 선생님한테 칭찬을 받기도 한다. 영재는 송구의 학교 숙제는 물론, 학원숙제도 대신해 주고 송구는 놀다 온다.
시험을 치르는 날, 송구는 영재를 데려가기로 한다. 의자 방석을 떼어내서 말이다.
영재가 불러주는 답을 쓴 송구는 1등을 할 거라는 기대와 달리 평소보다 더 못한 점수를 받고 만다.
그리고 영재는 자신의 죽음에 관련된 이야기를 송구에게 해준다.
울음을 터트리는 영재를 달래주자, 이런 말을 한다.
잘하는 건 칭찬 안 해 줘. 못하는 것만 혼을 내. 못하는 걸 잘할 때까지, 모두 잘해서 1등을 할 때까지. 그러니까 잘하는 것보다 못하는 게 더 중요한 거라고. p107
좀 슬펐다. 그리고 반성도 했다.
잘하는 걸 더 칭찬해주고 해야 할 텐데, 조금만 더 잘하면 될 것 같은데?라는 생각에 못하는 걸 들춰내니 잘하는 게 묻히고 만다.
살아있을 때도 친구가 없었던 영재와 송구는 어떤 방법으로 놀까?
실컷 놀 수 있는 날은 많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날은 오지 않는다.
아, 이 동화는 너무 했다. ㅠㅠ
마지막 작품인 <어디까지 왔니?>는 다른 작품과 다르게 '습니다'체로 이야기가 진행된다. 그래서 저학년 동화일까? 했는데 주인공은 아홉 살이었다. 그래도 읽어보면 고학년이 읽어도 좋을 동화다.
고양이 짝눈을 만난 승연이는 산동네에서 가장 높고 가장 작은 집에 아빠와 단둘이 살고 있다.
승연이는 하교도우미로 온 노란 머리를 한 할머니를 만나지만 달갑지 않다. 화려한 모습이 자신과 아빠를 두고 떠난 엄마와 비슷하게 화려했기 때문이다.
할머니는 높고 많은 계단을 올라가며 고양이 사료를 군데군데 둔다. 승연이는 자신에게 온 짝눈 고양이를 쫓아내고 할머니는 계속 이상한 말만 해서 승연이는 더 토라진다.
예전에 다래끼가 나면 눈썹을 뽑았다. 그리고 그 눈썹을 어디에 올려놓으면 된다고 했다. 이 할머니 역시 승연이 눈에 다래끼가 난 것을 보고 눈썹을 뽑아 돌멩이 위에 올려놓는다. 그리고 작은 돌로 속눈썹을 눌러 놓는다. 누군가 길을 가다 그 돌을 치면 다래끼가 옮아간다는 미신이었다.
그 돌은 사람이 치고 간 게 아니라 짝눈 고양이가 앞발로 쳐 버렸다.
그 후로 승연이의 다래끼는 줄어들지만 한쪽 눈을 가리고 걸어보며 고양이는 눈이 하나만 보이는데 다래끼가 날까 봐 걱정한다. 괜히 할머니 때문이라고 투덜거리기도 한다.
세상에 없는 것에 어떻게 이름이 있겠냐. 이름이 있는 것은 세상에 다 있는 거다. 또, 네가, 이름을 부르면 없던 것도 세상에 생기는 것이고. p130
부르고 싶은 이름이 있으면 불러봐도 좋을 것 같다.
돌아가신 할머니를 부르고 싶기도 하고, 세상이 힘들어 이 세상을 등진 친구의 이름을 불러보고 싶다. 이 세상을 이미 떠났지만 그들과의 추억이 아직 남아있으니 부르고 싶다. 그리고 내게 계속해서 글을 쓰라고 해준 이의 이름을 부르고 싶다.
저는 계속해서 쓰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다시 봅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