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읽은 책 : 또 못 버린 물건들 - 은희경
우리 가족은 각자의 생일이 되면 그 사람이 하고픈 대로 해주려고 하는 암묵적인 룰이 있다.
누가 됐든 생일자는 그날만큼 모든 게 용서되고 모든 소원이 이루어진다.
내 생일은 아주 한 겨울이고 크리스마스보다 조금 뒤에 있다.
많은 사람들이 기분 좋게 보낸 다음, 다음 날이 내 생일이어서 이미 흥은 가라앉은 뒤다.
올해 내 소원, 평일미사를 드리기로 했다.
겨울방학이 되어 늦잠을 맘껏 자려고 했던 두 녀석을 데리고 이 두 아이에게 유아세례를 주신 신부님이 계신 성당에서 아침 미사를 드리러 출발했다.
둘째까지 첫 영성체를 끝내서 신부님께 성체를 받고 싶기도 했다.
일단 출발했다.
살고 있는 일산에서 출발하면 1시간이 걸리는 연천.
꽤 멀지만 그래도 갈 만한 거리다. 요즘 왕복 4시간은 우습게 왔다 갔다 하고 있으니.
이 성당엔 아이가 하나도 없었다.
어르신들이 자리에 앉았다, 일어났다를 반복하며 정성껏 기도하고 미사 참례를 하는 걸 본 아이들은 무슨 생각을 할까?
내가 처음 이 성당에 와 미사를 드렸을 때 굉장히 부끄러웠다. 게으른 나를 반성했고 더 이상 해도 안되지 않을까 놓아버린 일들이 생각났다.
생각보다 많은 깨달음을 얻어서 종종 오게 되었다.
전에 왔을 땐 신부님이 성경구절을 외워야만 준다고 했던 사탕과 초콜릿을 우리 아이들에게 그냥 주셨다.
신부님, 감사합니다. :)
미사를 끝내고 전에 한 번 가보았던 카페로 향했다.
이 카페는 주차장이 언덕에 있다. 주차라인이 없어서 오히려 초보들에겐 좋은 곳이다.
주차를 하고 내려오면 보이는 문.
크리미에 카페에 도착했다.
어디가 입구일까?
아이들에게 알려주지 않고 가만히 뒀더니 오른쪽 문 손잡이를 돌렸다.
키득거리며 왼쪽 문을 열고 들어갔다.
커다란 트리가 카페 중앙에 있고 더 들어간 곳에 또 하나가 더 있었다.
정말 사진 맛집인 곳.
첫째는 연신 휴대폰으로 사진을 찍어댔다.
나보다 훨씬 사진을 잘 찍는 아이는 그냥 찍어도 온갖 포즈를 취하며 찍은 내 사진보다 훨씬 퀄리티가 좋았다.
비교해 보니 확연히 차이가 난다.
그냥 아이에게 찍고 보내달라고 하는 게 나을 것 같다.
카야토스트, 양송이수프, 초코라테, 카페라테.
둘째는 수프를 먹겠다고 했다. 워낙 음료를 잘 안 마시는 아이라 그러라고 했다.
첫째는 이 추운 날, 아이스 초코라테를 시켰다.
나이가 든 나는 따뜻한 라테를 시켰고.
오늘 읽은 책은 은희경의 [또 못 버린 물건들]이라는 산문집이다.
이번에 새로 나온 신작이라 얼마 전에 주문하고 아직 못 읽은 책이어서 들고 왔다.
조용한 카페에서 가볍게 읽으면 좋을 책이다.
11시가 넘어도 사람이 오질 않았다.
가끔 사장님 내외와 아이의 말소리가 들리긴 하지만 한 겨울의 카페는 고즈넉하다.
예전에 혼자 왔을 때는 노키즈존에서 작업을 했다. 오늘은 아이들과 함께여서 홀에 있었지만 전혀 소란스럽지 않았다.
우리 셋이 독점한 이 카페에는 고양이도 살고 있다.
여러 마리를 보았는데 다들 어디로 간 걸까?
입구 쪽 트리 옆에 얼굴고양이가 있었다.
나를 보더니 화들짝 놀라며 구석으로 갔다가 다시 나왔다.
얘, 나도 놀랐거든?
책을 좀 읽어보자, 했지만 역시나.
둘째의 방해가 시작된다.
가방에 넣어 다닐 작은 다이어리를 샀는데 쓸 공간이 부족하다. 그래서 수첩도 하나 들고 다닌다.
오늘 펼쳤더니 예전에 엄마를 그려준 딸의 그림이 있다. :)
은희경의 소설을 읽으면 찰랑거리고 짓궂다. 이 소설가를 처음 알게 된 작품이 [마이너리그]라는 작품이었다. 주인공에 매료되어 금세 읽었던 기억이 난다.
몽블랑에도 형광펜이 있었구나.
작가가 좋아하는 볼펜이 나온다. 나도 한 번 구입해서 써볼까 싶어 검색을 해봤다.
와, 그냥 나중에 나도 인세를 받는 작가가 된다면 사기로 했다.
내게는 라미펜이 있다.
여전히 내게 힘이 되어주는 대학친구가 작가가 되면 글을 더 많이 써야 하지 않냐며, 좋은 글 많이 쓰라고 정말 갑자기 보내줬던 선물이다.
내 이름을 영문으로 새겨서 보내줬다. 그리고 많이 쓸 테니 리필심도 더 보낸다고 하며.
그땐 만년필을 잘 쓰지 않았는데 요즘은 필사를 하며 꽤 많이 이용하고 있다.
인간은 복잡한 존재이다. 스스로 그것을 의식하는 한 누구나 섬세함이라는 상식을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타인 역시 나와 마찬가지로 복잡한 존재이므로 나의 틀 안에서 함부로 해석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사람들은 자신의 생각대로 상대를 해석하는 경우가 많다. 나도 고치려고 하지만 편견을 가질 때가 있다. 내가 가진 틀이 그 사람에 맞게 유동적으로 움직인다면 얼마든지 수용할 수 있을 것이다. 그 틀을 깨지 않으려 한다면 위험하다.
작가는 1993년쯤 아니 에르노의 [단순한 열정]을 돌려보던 친구들의 안부가 궁금해진다고 했다. 93년 도면 내가 중학생 때다. 이미 이 작가의 책은 알만한 사람들에게 알려진 책이었구나.
반가운 마음에 잠깐 이 책을 펼쳐봤다. [단순한 열정]보다 [부끄러움]을 먼저 읽어서 개인적으로 후자가 더 매력적으로 끌린다.
책을 읽으면 나도 해볼까?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작가가 달리기를 했다는 대목이 나와 나도 뛰어볼까? 발레웜업부츠가 수족냉증에 좋다고 샀다고 하니 나도 하나 사볼까? 앞서 말한 몽블랑 펜을 한 번 사서 써볼까? 하는 생각까지.
바쁜 일상에서 벗어나야만 비로소 쇼핑할 시간과 기회가 있다.
이 책에 실린 글들은 작가의 솔직함을 엿볼 수 있었다. 친구가 많은 척한다고 이니셜을 같은 사람임에도 다르게 썼다는 그녀의 입담에 훗 하고 웃음이 났다.
책을 덮고 보인 앞표지의 책띠에는 12년 만에 선보이는 산문이라고 표기되어 있었다. 굉장히 오랜 시간이 흐른 후 책이 나왔구나.
꽤 재밌게 읽은 에세이다.
소설보다 흥미로운 에세이를 만난다는 건 참으로 기분 좋은 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