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화에서 한 점의 누비옷이 되기까지 공력의 과정은 복잡하고 길기만 하다. ⓒ누비장 김해자 作
18세기 산업혁명이 일어나기 전, 모든 물건은 오직 인간의 손으로 만들었다. 만약 가족의 옷이 필요하면, 엄마는 가을 들판 가득 만발한 목화꽃을 미리 거두어 볕에 말려 두었다가 씨야(목화씨를 바르는 도구)에 넣어 씨를 발라 내었다. 그런 다음 솜을 뭉게뭉게 부풀리는 활타기 작업을 한다. 솜이 실이 되려면 섬유질을 서로 얽히게 하는 고치말기도 해야 한다. 둥글게 만 고치에서 가느다란 무명실을 뽑기까지 과정만 읊어도 이처럼 과정이 복잡하고 해야 할 일이 많다. 그러나 일은 아직 반도 지나지 않았다.
천이 몸에 닿을 때 불편함이 없으려면 결 곱고 짜임이 균일해야 하며 잡스러운 것이 섞이지 않아야 한다. 즉 ‘무명날기와 무명매기’를 잘해야 한다. 일정하게 실의 굵기를 고르고 잡것을 골라내고, 강도를 높이고 엉킴을 방지하기 위해서 풀을 쑤어 결마다 바르고 말린다. 이후에야 베틀에 장력 좋은 실을 걸 수 있다.
손으로 윗판을 힘껏 내려 짠 것을 수직으로 다지고 줄을 발에 묶어 끌어당겼다 펴길 수천 번 한다. 그래야 씨실과 날실이 무수히 교차하는 한 폭의 무명천을 얻는다. 한 여인의 날(日)은 낮은 낮대로 밤은 밤대로 해야 할 고된 노동으로 채워진다. 여인들이 길쌈하고 베를 짜며 노래를 부르는 것은 기분이 좋아서 흥얼거리는 것이 아니라, 아마도 그렇게라도 몸에 흥을 싣고 운율을 실어야 몸의 힘듦과 쏟아지는 졸음을 감당할 수 있기 때문이었으리라.
가끔 민속 박물관에서 가서 본 목화솜을 직접 빼내 실을 얻고 무명천을 베틀로 짜는 풍경을 본다. 인형 과 소품등으로 재현한 것이라도 단순한 생활용품을 만드는 일의 녹녹함과 무에서 유를 만드는 손의 위대함이 충분히 느껴진다. 베 짜는 노동 이후에도 옷 짓는 일은 끝나지 않는다. 홑겹으로 짓는 여름옷과 달리, 겨울옷이라면 엄마는 무명과 무명 사이 솜을 넣고 누빈다. 바늘귀에 실을 끼워 한 땀 한 땀 바늘땀을 늘린다. 그렇게 손으로 일일이 바늘땀을 늘려 짠 누비옷은 솜과 솜 사이에 공기가 들어 있어 가볍고 따뜻하며 세탁에도 강해 오래 입을 수 있다.
기계가 대량으로, 시절 유행과 몸의 치수에 따라 다양하게 만든 옷들을 돈만 있다면 손쉽게 살 수 있는 지금. 현대인은 시절을 기다려 씨를 뿌리고 목화를 거두고 베를 짜 필요한 옷 한 벌을 지어 입는 수고로움을 상상할 수 있을까?
전통 방식으로 실을 짜서 옷감을 만드는 과정. 노진남 장인(중요무형문화재 제28호), ⓒwww.maisonkorea.com
18세기 이후 등장한 산업혁명은 물건의 태생, 무엇보다 물건을 사용하는 사람들의 생각을 삶을 바꿔놓았다. 엄밀히 말하면 물건을 사용하고 소비하고 인식하는 사고체계, 생활습관 등을 바꿔 놓았다. 현대사회에서 더 이상 물건은 귀한 것이 아니다. 물건이 망가지고 없어지면, 누군가 오랜 시간 재료 준비부터 제조까지 여러 날의 밤을 노동으로 지새워야 한다는 생각을 하긴 할까?
나도 아이를 키운다. 나는 늘 아이에게 “물건을 아껴 쓰고, 자기 소유의 물건은 자기가 챙겨야 한다. 물건에도 자기 나름의 생(生)과 역할이 있으니 너는 그 물건이 사는 동안 제 역할을 다할 수 있게 살피고 좋은 인연을 맺어야 한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아이는 여전히 물건을 잃어 버린다. 새로운 물건 쓰기를 좋아하고 호기심을 낸다. 나의 이야기는 아이에게 그저 공허한 잔소리인가 보다. 안타깝지만, 한편으로 이해도 간다. 이게 내 아이 뿐이랴. 현대의 아이들은 물건이 필요하면 부모가 쉬이 내어주는 돈을 쥐고 대형 마트, 상점에 가서 물건을 사는 것을 당연히 여기는 세대다. 핸드폰을 살 때도, 옷을 살 때도, 먹을 것을 살 때도 아이들이 본 것은 똑같은 물건들이 줄 맞춰 도열한 물질 풍요의 풍경이었을 것이다.
나의 부모가 나를 배 곪지 않고, 추위에 떨지 않게 하고, 누군가에게 업신여김 당하지 않기 위해 늘 필요한 것을 미리 준비해두고 자기 것을 아껴 어렵게 마련하는 것을 본 자식은 절대 자기 물건을 하찮게 여기지 않는다. 그리고 마을 이웃이자 솜씨 좋은 장인이 오랜 시간 불, 단단한 재료 앞에서 땀 흘리며 물건 만드는 것을 오고가며 보고 자란 이는 노동의 중함을 머리가 아닌 몸으로 깊이 이해한다.
나아가 좋은 공예품을 어렸을 때부터 사용해 본 사람은 자연으로부터 일부를 취해 인간이 필요한 물건 하나를 만드는 데는 자연이 재료를 내주고 그것이 무엇이 될 수 있을 때까지 순리를 기다려야 함을, 그것이 제품이 되어 나의 손에 들어오려면 재주 있는 누군가 어렵게 재료를 얻고 다듬는 노동을 행해야 한다는 것을 자연스럽게 이해하는 사람으로 성장한다. 보고 느낀대로 자기 생을 살아가는 법이다. 그것이 공예가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삶의 방식이고 응당 사람과 세상을 대하는 태도다.
나를 위해 누군가 세심하게 공들여 만든 것은 단순히 물건이 아니라 누군가의 마음이다. 누비장 김해자 作 ⓒ shindonga.donga.com
나는 새 물건을 살 때는 혹여나 욕망이 현혹해 필요 없는 물건을 들이는 것은 아닌지 나름 깊이 고민한다. 이왕 물건을 사야 한다면 되도록 좋은 물건을 구입해 가까이 두고 애정 하며 오래 사용하려고 노력한다.
어른들 말씀이 좋은 물건은 좋은 기운이 있다고 했다. 아무 물건이나 집에 들이지 말고 인연맺지말라고 하셨다.
공예가들이 만든 물건은 오랫동안 재료를 고심해 고르고 제 성질을 존중해 다듬고 최상의 기술을 적용해 만든 것이다. 작가가 오랜 시간 재료를 붙들고 그와 관계하며 서로의 기운을 나눌 수록 좋은 물건이 되기 마련이다. 당연히 공예가의 공력은 자연스럽게 사물의 기운이 되어 기물의 곳곳에 베인다. 그만큼 대량이 아닌 인간의 공력으로 다지고 쓰다듬어 만든 물건은 사용하고 가까이 두어 눈으로 익힐수록, 그것을 만들기 위해 제작자가 자기 몸으로 기술을 익힌 과거의 시간이 고스란히 읽히기 마련이다.
요즘은 손쉽게 필요한 물건을 살 수 있다 보니, 물건을 주문해놓고 소유하기까지 기다림, 설렘이 점점 사라져 간다. 자본과 기계가 우리에게 물질의 풍요를 가져다준 것은 맞다. 시간과 노동의 단축도 가져다주었다. 산업혁명의 기계 생산, 디지털 기술의 진화가 우리가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 또는 세상을 구성하고 있는 자연, 재료, 삶 그리고 인간을 이해하는 방식을 긍정적으로 바꾸었다고는 볼 수 없다.
기계생산보다 수공을 일상화하고 그 속에서 공예의 유용과 가치를 중히 여겨야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앞서 이야기한 공예만이 우리에게 가르쳐 줄 수 있는 사물, 인간, 세계를 바라보는 태도 때문이다. 공예가 그리고 스스로 물건을 만들어 사용했던 사람들의 마음을 살펴보면, 손으로 필요한 만큼만 필요한 것을 만드는 문화의 정착, 내 소유로 인연 맺은 사물들이 최대한 나의 삶 속에 들어와 자기 생과 역할을 다하며 같이 사는 길이 보인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보기 좋고 편리하기 만한 재화가 아니라 내 유일한 물건에 깃든 마음과 그것과의 추억이니까 말이다. ■홍지수_미술평론, 미술학 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