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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지수 Sep 14. 2022

한국 도예가들의 분청(8)_허상욱

4부_우리 미술이 다시 보고, 다시 쓰는 분청_여덟 번째 작가, 허상욱



[서울=뉴스핌] 조용준 논설위원 = 작품 앞의 허상욱 작가 2021.11.11 digibobos@newspim.com



박지(剝地) 기법은 화장토를 기물 표면 위에 바른 분장의 두께와 거친 바탕과의 대비, 어울림이 관건입니다. 거칠게 깎아낸 바탕과 고운 분칠 한 면이 적절한 비율로 어울리고 서로 보완해줄 때 비로소 우리는 그것을 보며 호방하고 시원하다 말할 수 있습니다.


현대 분청을 작업하는 여러 작가 중에서도 허상욱(許庠旭, 1970- )은 박지 기법을 즐겨 쓰는 작가입니다.   박지기법은 기물을 만든 후, 표면이 꾸덕꾸덕하게 마르기를 기다려야 합니다. 기물 표면이 너무 마르면 젖은 화장토물이 닿았을 때 수축률이 달라 자칫 마른 후 표면이 갈라지거나 박리되기 쉽습니다. 특히 박지기법은 붓으로 일획 휘두르고 떼는 귀얄기법에 비해 화장토를 두껍게 바르는 편이므로, 기물 역시 적절한 수분을 머금은 상태여야 펴 바르기가 수월합니다. 표면을 분장이 마르길 기다렸다가 그 위에 원하는 이미지를 도칼을 동원해 선으로 그립니다. 여기까지는 선각(線刻)과 같습니다. 박지는 그은 선을 기준으로 형태의 바깥쪽, 즉 배경을 긁어냅니다. 단순히 도칼로 분장이 필요 없는 바탕을 깨끗이 벗겨내는 것이 목적이 아닙니다. 도칼로 긁어낸 정도, 필력에 따라 거친 맛도 나고 정연한 맛도 낼 수 있습니다. 눈으로 보기에도 도칼 깎아낸 면과 애당초 아무것도 바르지 않은 면은 전후가 다릅니다. 맛을 내려면, 결국 그림의 내용과 어울리는 작가의 필력, 도칼을 운용하는 강도/속도의 완급 조절 능력이 요구됩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손을 떼야될 때 손을 떼고 손을 더해야 할 때 더하는 지점을 정확히 아는 작가의 안목과 감각이 관건입니다. 같은 형태와 같은 문양을 그려도 작가마다 시원하고 두툼한 질감, 미감이 다른 이유입니다.


허상욱, 모란무늬편병, 2021,  [사진 = 솔루나 갤러리 제공]



공예제작의 측면에서, 허상욱 작가의 수법을 ‘박지’라고 이름을 붙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작가의 발상과 수법은 화가의 드로잉과 다를 바 없습니다. 캔버스나 종이 대신 흙으로 빚은 기물을 회화의 바탕으로 삼고, 젯소 대신 화장토를 바탕에 바르며, 연필이나 펜 대신 도칼을 화구로 사용하는 것이 다를까요?그릇이라는 기능만 빼놓고 본다면, 작가의 ‘그린다’라는 행위 그리고 자신의 일상을 관찰하여 보고 기억한 바를 소재로 삼는 것은 분명 화가의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겁니다.


허상욱, 분청박지어문접시(左), 분청박지연화조문박지접시(右), 2020


허상욱, 분청어화문기, 분청 박지, 철채, 2010


허상욱 작가는 작업 초기에는 거칠지만 시원한 박지문양을 주기법으로 잿빛 분청 바탕이 조화로운 모노크롬 화면을 작업했습니다. 옛 회화나 공예에 즐겨 등장하던 물고기, 모란 등의 문양 등을 즐겨 시문 했습니다. 그렇다고 그의 도안이 옛 도안을 그대로 모방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의 물고기는 언뜻 충북 계룡산 철화분청에 등장할 어문(魚紋)을 닮은 듯하지만, 그것 분명 허상욱의 새 ‘물고기’였습니다. 그가 화병에, 접시에 그린 물고기는 마치 어린아이의 동화책에서 뛰쳐나온 것처럼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입에는 꽃을 문 채 물속을 유영중입니다. 그것을 보고 옛 그림의 메기나 잉어처럼 ‘아무리 노력해도 잘 풀리지 않는 고난 상황이나 성취하기 어려운 일을 헤쳐 나가라는 의미’ 혹은 ‘과거급제나 신분상승을 기원하는 기복의 의미’는 전혀 찾아볼 수 없습니다.



허상욱, 분청모란문박지발(鉢), 2010.



허상욱 작가가 그린 모란(牧丹) 역시 ‘부귀영화(富貴榮華)의 염원’은 느껴지지 않습니다. 송나라 주돈이(周敦頤)는「애련설(愛蓮說)」에서 “당나라 이래로 세상 사람들이 모두 모란을 사랑했는데, 꽃 중에서 모란이 부귀의 기상이 있다”라고 말했습니다. 허상욱이 선과 박지를 혼합해 그린 모란을 보고 있노라면, 송나라 주돈이가 보았던 그 모란은 아닌 것 같습니다. 작가가 그린 모란꽃은 모란 특유의 풍성함은 살아 있으나, 미호, 기복, 화려함보다는 한 개인이 품은 소박함, 따뜻함, 위트가 느껴집니다.

해마다 초여름이 되면, 작가는 자신의 SNS 계정에 모란을 찍어 피드에 올립니다. 여러 해 반복되니 여름이 되면, 작가가 올린 붉은 모란꽃 사진을 언제 올릴까 기다려집니다. 피드를 볼 때마다 이제 봄이 가고 또 다른 여름이 찾아왔음을 실감하곤 합니다. 비슷한 시기, 비슷한 배경으로 작가가 모란을 사진을 찍는 것을 보니, 아마 장소가 작가의 작업실 화단인가 봅니다. 작가가 촬영한 모란은 색이 붉고 안에는 노란 수술이 가득 들었습니다. 어린 아이의 복주머니같습니다. 작가는 작업실 넓은 창 너머 화단에서 초여름 어느 때가 되면, 굵은 뿌리를 모태 삼아 가지마다 소담스럽게 핀 붉은 모란을 보겠지요. 그리고 시절이 오고 변화함을 오롯이 느끼겠지요. 그렇게 가까이에 두고 관찰하여 그린 모란은 남이 찍은 사진이나 옛 도안을 보고 그린 것과는 다릅니다. 거창한 것, 대단한 것이 아니라 자신 그리고 자신을 둘러싼 것들을 세심한 관심으로 관찰하고 그림으로 옮기는 시선은 옛 성인들이 누누이 자기 수신과 학문 연마, 삶의 태도로 강조하고 실천하려 했던 것이기도 합니다. 또한 자신의 일, 재주, 감각으로 소소한 만사 속에 비범한 힘과 삶의 의미를 깨닫는 작업 방식은 공예가뿐 아니라 모든 예술가들의 방법이기도 하고요.      



허상욱, 스타카토-정물, 2018, 서울 예탁결제원 갤러리


허상욱, 분청은채잔, 2020, 11×11×5cm, [사진 = 솔루나 갤러리 제공]



작가가 자신이 주변 본 것들을 관찰하고 눈과 마음에 담고, 그리고 도자기 위에 그림을 그리는 것처럼 어쩌면 옛 분청을 만든 도공들도 집, 작업장 주변에 핀 초화를 늘상 보며 그릇을 만들고 도안으로 그렸을지 모릅니다. 같은 수법, 문양이라도 지역과 문화에 따라 다른 기형, 표현이 존재했던 것을 보면, 옛 도공들 역시 선대로부터 도식화된 기형, 문양으로 기본은 익혔어도 점차 자기만의 표현, 당대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궁리하며 끊임없이 변형을 시도했던 것이 아닌가 합니다.

 

지난 수년간, 허상욱 작가가 시도해온 크고 작은 작업의 변화들을 차례대로 떠올려 봅니다. 그림의 화제(畫題)는 어문과 모란, 연꽃, 들꽃 같은 전통 문양에서 2018년 전후로 작가가 평소 좋아하는 커피와 글라인더, 테이블, 꽃병 등을 그린 일상 정물화로 바뀌었습니다. 최근에는 일상정물과 더불어 귀여운 강아지와 고양이, 호랑이, 파초 등도 그립니다. 기법도 시절에 따라 박지기법에서 점차 한 음(音), 한 음씩 또렷하게 끊어 연주하는 스타카토 닮은 인화문을 시도했다가 어느 날에는 낙서하듯 자유롭게 선각을 시도하기도 합니다. 최근에는 은채와 청화, 분청을 두루 섞어 새로운 회화를 시도중입니다. 특정 매체, 기법에 매이지 않고, 그는 자기가 그리고 싶은 그림, 자기 예술세계를 만들기 위해 흙과 불을 도구로 다양한 드로잉과 회화를 시도하고 있구나생각합니다. 다만 그가 전통에서 무엇인가를 계승하고 새로운 것을 도모한다면, 그것은 재료나 수법이 아니라 자신 그리고 관람자의 마음 한편에도 있을 동심, 즐거움을 일깨우는 일일 겁니다. 원래 옛 분청에서 볼 수 있는 어린 아이가 그린 듯한 투박하고 순수한 선, 해학과 익살, 편안함 같은 조형 요소들을 자기만의 표현으로 가져오고 싶은 것은 모든 현대작가들의 소망입니다. 그는 선각과 박지 그리고 최근에는 은채와 청화까지 자유롭게 격이 없이 사용하는 것을 보면, 작가는 오히려 익숙한 것, 당연한 것들을 버림으로써 옛 분청에서 볼 수 있는 자유로운 회화의 세계에 한발 더 가까이 다가가고 있지 않은가 합니다.


허상욱, 분청은채청화편병, 2020, [사진 = 솔루나 갤러리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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