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 자신이
도망치던 시절이 있었다.
불편한 감정이 올라오면 나는 즉시 다른 일을 찾아 헤맸다.
유튜브를 켜고, 게임을 시작하고,
아무 의미 없는 대화를 이어가고,
억지로 바빠 보이려는 행동을 반복했다.
몸은 늘 바빴지만,
사실 내가 피하고 있던 건 언제나 나 자신이었다.
그러나 이제 나는 안다.
두려움은 없애는 것이 아니라
함께 데리고 가야 하는 것이라는 걸.
그래서 도망치고 싶은 충동이 올라오면
예전처럼 급하게 등을 돌리기보다
한 번은 멈춰 선다.
숨을 들이마시고,
내 안에서 올라오는 감정을 조용히 바라본다.
완벽히 마주 서지 못해도 좋다.
중요한 건,
적어도 등을 돌리지 않는 것.
그 작은 차이가
과거의 나와 지금의 나를 가르는
분명한 경계가 되었다.
한때 내 삶의 중심에는 언제나 남들이 있었다.
남들이 어떻게 볼까,
무슨 말을 할까,
이 선택을 비웃지는 않을까.
그래서 나는 늘
보이지 않는 심사대 위에 올라간 사람처럼
단단히 긴장한 채로 살았다.
남들이 좋아할 만한 말,
남들이 칭찬할 만한 선택,
남들이 불편해하지 않을 태도를
정답처럼 골랐다.
그러다 보니
정작 “나는 무엇을 원하는가?”라는 질문은
삶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이제는 다르다.
물론 여전히 타인의 시선이 흔들림을 만들 때도 있다.
그러나 삶의 중심축은
천천히, 그러나 확실하게
남들에서 나로 이동하고 있다.
“나는 이게 좋다.”
“나는 이건 싫다.”
“나는 이렇게 살고 싶다.”
단순하지만 오랫동안 말할 수 없었던 문장을
조심스럽게
그러나 분명하게
내 삶의 중심에 놓고 있다.
관계를 정리하고,
경계를 세우기 시작하자
곁에 남는 사람의 수는 자연스레 줄어들었다.
예전의 나는
그 공백을 견딜 수 없어했을 것이다.
‘혹시 내가 잘못하고 있는 건 아닐까?’
‘사람이 줄어드는 삶이 과연 괜찮은 걸까?’
그러나 시간이 흐르자
그 고독 속에서
고요한 평화가 피어올랐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괜찮은 시간,
누군가에게 잘 보이기 위해
문장을 고치지 않아도 되는 공간,
말하지 않아도 되는 침묵.
그 자리에서 나는 알았다.
고독은 벌이 아니라
내가 나로 있을 수 있는 자리라는 것을.
몸도, 마음도, 욕구도
조금씩 같은 방향을 향하기 시작했다.
몸이 지치면
이제는 억지로 버티지 않고 멈춘다.
쉼이 필요하다고 인정한다.
감정이 올라오면
예전처럼 덮어버리지 않고
잠시 그 자리에 앉혀둔다.
“아, 지금 화가 났구나.”
“지금 서운하구나.”
“지금 무섭구나.”
욕구가 올라오면
수치심 대신
그냥 있는 그대로 바라본다.
“나는 인정받고 싶구나.”
“나는 사랑받고 싶구나.”
“나는 쉬고 싶구나.”
그 위에서 조금씩 나만의 기준을 세워간다.
무엇을 선택할지,
무엇을 놓칠지,
무엇을 지킬지,
무엇을 내려놓을지.
아직 완벽히 정렬되지는 않았지만
서로를 향해 조금씩 같은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예전의 나는 완벽해지려고 애썼다.
흐트러지지 않는 사람,
늘 옳은 선택만 하는 사람,
늘 괜찮은 사람.
그러나 이제 내가 되고 싶은 사람은
틀리면 인정할 수 있고,
두려우면 두렵다고 말할 수 있고,
넘어져도 다시 일어날 수 있는 사람이다.
남자는 과거의 자신을 바라보았다.
그토록 많은 것을 좇으며
대체 무엇이 되고 싶었던가?
왜 그렇게 피하고 숨으려 했던 것일까?
그 모든 길의 뒤편에는
언제나 단 하나의 문장이 있었다.
“나는 사랑받고 싶었다.”
그 마음은 나만의 것도, 특별한 것도 아니었다.
사람들은 누구나 감추고, 피하고, 지키며 살아간다.
겉모양은 달라도 근원은 비슷했다.
그래서 나는 결심했다.
‘나’로 살되, 세상과 함께 살기로.
나만의 진심을 지키면서도
세상과 조화롭게 살아가려는 마음.
그 둘이 만나는 지점이
비로소 “삶”이라는 것을.
나는 거울 앞에 서서
조용히 나를 바라본다.
조금 지쳐 있고,
조금 흔들려 있고,
조금 불안한 얼굴.
하지만 더 이상
억지로 괜찮은 척하지 않는다.
나는 내게 말한다.
“그래, 나는 아직 완벽하지 않다.
하지만 이제는 도망치지 않는다.
남의 삶이 아니라
나의 삶을 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걸로 충분하다.”
남자는 어디 특별한 곳에 도달한 것이 아니었다.
다만 도망치지 않고,
남의 기준에서 벗어나고,
고독을 견디며,
감정·몸·욕구·기준을
한 방향으로 모아가기 시작한 사람.
완벽하지 않지만
정직하게 서 있는 사람.
그것이
남자가 마침내 얻게 된
“자기 자신”이라는 이름이었다.
남자는 본래의 자신으로 돌아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