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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태윤상학 Aug 15. 2024

아버지

가혹한 운명

 '인간의 자격'

문득문득 떠오르는 요즈음의 화두다.



작년 어느 가을날이었다. 단풍도 들고 날씨도 좋고 하여 계곡을 따라 잘 조성된 동네산 둘레길을 걷기로 하였다.


 높고 푸른 하늘 아래 누렇게 익어 가는 들판을 지나, 떠날 채비를 하는 잎사귀들의 냄새 잔잔히 풍기는 산을  흠흠거리며 천천히 올라갔다.


  30여분의 산행 끝에 산속 둘레길을 빠져나와 계단 논 층층이 놓여 있는 마을로 이어진 길로 접어들었고, 완만한 경사를 이루는 시멘트 길을 따라 천천히 올라가는데 웬 울음소리가 들렸다.

 

 놀라서 두리번거려도 어디서 들려오는지 알 수 없었다.  대낮에 들려오는 낯선 울음에 의아해하며 위로 올라 가는데, 올라 갈수록 소리는 점점 더 크게 들렸다.

둘레길  끝 지점에는 대여섯 가구로 이루어진 동네가 있는데,  그 지점 초입쯤 다다르니 곡 소리가 왼쪽에 있는 산 쪽에서 들려왔다.


사람은 보이지 않고, 목놓아 우는 소리는 온 동네를 울음 속에 잠기게 하였, 깊은 회한으로 들려오는 울음소리는

50~60대 정도의 중년 여인네의 울음소리로 들렸다.

무슨 사연일까....

살아생전에 연 끊고 살다가 뒤늦게 부모의 죽음을 뒤 찾아와 우는 것일까... 애끓는 회한을 내뿜고 있었다.

동네 주민인 지, 함께 동행한 인물인 지, 웬 중년의 남성 한분이 길가에 서서 울음소리 나는 쪽으로 가만히 바라보고 서 있었다.


회한....

내게도 회한의 울음을 울게 한 인물이 있었고, 지금도 회한에 목놓아 울게 하는 인물이 있다.


아버지시다.


왜 그렇게 사셨을까. 왜 모두에게 원망받는 삶을 사셨을까.

무엇보다 왜 가족에게, 왜 엄마에게, 왜 자식들에게 그렇게 하고 사셨을까..


  내게 아버지는 두려운 존재였다. 돌아가시는 그날까지.

내 나이 55세 때 아버지는 78세로 돌아가셨는데,

어른이 되고도 한참 지난 55세가 되도록 아버지를 벌벌 떨며 무서워하며 살았다.


내가 기억하는 아버지는...

술에 찌든 시뻘건 얼굴, 진동하는 술냄새, 목구멍 저 아래에서 끌어올려 쾍쾍 가래 내뱉는 소리, 고래고래 고함지르는 소리. 가재도구 집어던지며 행패 부리는 모습, 엄마 때리는 무지막지한 모습..

 책임하고 무능력한 가장에서 그쳤더라면 좋았을 것을,

폭력과 폭언과 술주정으로 온 식구들을 공포에 질리도록 하지는 말았어야 했다.

  

 아버지에 대한 공포는 우리만 느낀 게 아니었던 것 같다. 할아버지를 모시고 지내 아버지는 할아버지를 핑계로 걸핏하면 작은 아버지를 호출해 이런저런 주문을 하며 호령했던 모양이었다.

  장례 끝나고 여러 정리 모두 마친 후 그간 우리들 대신 고생하셨던 작은 아버지를 찾아갔더니, 작은 아버지는 말수 별로 없고 착한 분이 아버지와 있었던 일들 들려주며 아버지가 너무 무서웠다고 눈자위가 붉어지며 울먹이며 말씀하셨다. 우리가 겪었던 그 공포를 겪었다는 것에 너무 불쌍했고 죄송하였다.


 장례식장에서 고모가 아버지를 외면한 우리를 나무랐지만 아무런 감흥 없었고, 막내 삼촌은 우리 편을 들어주었다.


 결혼하고 싶지 않았다. 혼은 곧 지옥으로 인식되었기 때문이었다. 다만 지옥 같은 집에서 얼른 벗어나고 싶었다. 다행히 취업한 직장은 집에서 통근할 수 없는 거리여서 드디어 집을 벗어날 수 있었고, 집은 최대한 찾지 않았다.

 

 집을 찾지 않으니 아버지는 직장으로 전화해서 키우고 공부시킨 양육비 내놔라, 지금 당장 직장 찾아간다며  온갖 협박을 해댔다.

 생활에 쪼들린 엄마가 빌린 돈을 못 갚아, 그 돈 빌려준 빚쟁이가 어떻게 알았는지 직장으로 찾아왔고, 그래서 그 돈 갚느라 작은 공무원 월급에 쪼개 갚고 생활하기 바쁜데, 아버지는 그것도 모르고 그렇게 협박을 해댔다.


  아버지에게서 벗어나고 싶었다. 답은 결혼뿐이었다.

결혼하면 더 이상 나를 괴롭히지 않을 것 같아서였다. 그래서 결혼을 하였다. 내 예상대로 더 이상 괴롭히지 않았다. 그래서 아버지 지옥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러나 또 다른 지옥이 있었다. 그걸 몰랐다.


 즘은 잘 안 쓴다만, 예전 농담에 아주 험한 농담이 있었다. 어떤 선택을 앞둔 사람에게 조언하며, 억세게 운 안 좋은 사람을 빗대어 '쓰레기 차 피하려다 똥차에 치어 죽다'는 잘 생각해 결정하라며 건네는 저주 같은 벌한 우스개 소리가 있었다.

내 꼴이 꼭 그랬다. 남편은 더 심한 지옥이었다..

돌아보면 참 험난한 여정을 헤쳐왔다..


 아버지는 아들 다섯에 딸 하나인 6남매 장남이셨다.

할아버지 역시 장남이셨으니 아버지는 장손이셨고, 태어났을 때, 우리 할머니인 자기 엄마보다 할머니 손에서 더 많이 자랐다고 한다. 할머니가 너무 귀하게 여셔서 할머 손에서 떨어질 새가 없었다고 한다.


그리고  우리 세대도 그렇지만 아버지 연배들 세대에서는 장남 위주의 생활이 더욱 강고했었던 만큼 아버지는 집안의 기대 속에 많은 지원을 받고 성장했는데, 기대와 달리 아버지는 어긋나셨다.

  천석꾼 집안에서 어릴 때 하인들이 모는 말을 타고 서당 다니시며 공부하셨던, 양반에다 책을 좋아하셨던  할아버지와는 달리 공부에 별로 관심이 없었고, 친구와 어울려 놀러 다니기 좋아했다고 한다.


 례 끝난 후 찾아뵌 작은 아버지가 말하길, 아버지는 친구들과 '땡삐'라는 부대를 만들어 어울려 다니며 경주시가지를 휩쓸고 다녔다고 한다.

보다 못한 할아버지가 공부 좀 해서 선생이라도 하라고 설득하였으나 결국 아버지는 그러지를 못했다.


  고등학교를 마친 아버지는 마를 만나 결혼한 후에도 제대로 된 직업이 없었던 모양이었다.


 경주에서 포항까지 외갓집 땅을 안 밟고는 못 간다고 할 정도로 소문난 대지다, 대구에 섬유 공장까지 운영하셨던 외할아버지는 시집간 딸에게는 야박하여 도움을 주지 않았다고 한다. 

  엄마는 종종 외할머니가 자기 엄마였다면 어찌하든 간에 엄마를 도왔을 거라,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친외할머니가 돌아가신 후 새로 들어온 계모였던 외할머니 고등학교까지 진학시켜 준 이복 이모에 비해 자기를 초등학교만 보내주었던 외할아버지를 원망 섞어 말하곤 했다.

 

  어느 날 외갓집 방문한 엄마는 돈 300만 원을 훔쳐왔다고 하였다. 지금도 300만 원은 내게 큰돈인데, 1960년 대 초였으니 얼마나 큰돈이었을까. 당시에는 은행이 지금처럼 체계화되지 않아서 외갓집은 그 많은 돈을 과수원 지하 창고로 안방 실겅(일종의 선반) 위로 그득히 쌓아 두고 보관하였는데, 집이 돈으로 넘쳐났다고 했다. 아무튼  돈 사건 이후로 엄마는 몇 년간을 친정 나들이를 못하였다고 하고, 그렇게 훔쳐온 돈으로도 아버지는 제대로 된 일을 꾸리지 못하였다고 한다.



   엄마가 나를 데리고 친구분들과 나들이 가는 길(가운데 분이 엄마)

   몇 년 전  친구로부터  건네받았다고 한다.

   섯 살 무렵인 것 같다고 한다.(유일한 유년의 사진)

   고단한 삶은 추억할 사진조차 건사하지 못하게 하였다.



엄마는 딸의 희미한 얼굴이 안타까웠던지 사진을 들고 가 사진관에서 디지털로 켰다. 엄마가 지어주신 한복 치마저고리와 털실로 짜주신 조끼를 입고 있다.




  초등학교 시절 아버지는 울산의 어느 화학 회사에 다니게 되었는데, 초등학교 입학 전 살았던 낡고 오래된 구지역인 복산동에서 새로운 주거 지역으로 조성되던 태화강 건너 신정동 쪽으로 옮겨가 살게 되었다. 

 박정희 정권 시대였고, 국가 정책에 의해 울산은 당시 많은 공이 건설되어 공업도시로 발돋움하던 시절이었다.


  그러나 어떻게 되었던지 나는 영문도 모른 채 초등학교 3학년 다니던 중에 동생과 함께 경주 할머니 손에 던져졌고, 그날로 엄마, 아버지 얼굴을 6년 동안 딱 한번 이모와 함께 찾아가서 얼굴을 본 후 더 이상 볼 수 없었다.


  할머니 집에서 초등학교, 중학교를 보내고 6년 만에 고등학교에 진학하면서, 드디어 대구에 있는 부모 집에  와서 함께 살게 되었다.

 할머니 집으로 가기 전 어느 날 아버지가 엄마를 때려 세숫대야 그득 피를 쏟아내던 엄마 모습도 평화로운 할머니 집에서 보낸 6년 동안 모두 잊고 있었는데, 다시 돌아오게 된 부모집은 실망스러웠고, 지옥 같은 이 시작되었다.


   살림살이는 늘 쪼들렸다. 아버지 벌이가 시원찮으니 엄마는 엄마대로 궁색한 살림 헤쳐 나가느라 무척이나 애를 쓰셨다.

   어렸을 부터 엄마는 집에 잘 없었다. 나는 다섯 살 어린 동생을 돌보며 빈 집을 지켜야 했다. 아마도 엄마는 분주히 돈 구하러, 또는 돈 벌 다니셨던 것 같다.

  어렴풋이 기억이 난다. 6~7살이었을까. 아마도 난전에 무언가를 팔려 나가는 차림이 아니었을까 싶은데, 어린 나의 손을 이끌고, 머리에는 커다란 광주리를 이고서 우가 살던 동네 인근에서 한참 걸어가면 있던 학산 공원(지금은 있는지 모르겠다) 주변 길을 바삐 걸어가는 한 장면이 어렴풋이 떠오른다. 금을 모아 나누는 계주도 하였던 것 같다...


아버지..

2014년 광복절 날 아버지는 돌아가셨다.

결혼 후 아버지와는 네댓 번 정도 대면하고는 연을 끊다 시피하고 살았다. 내가 발걸음을 끊으니 넉살 좋은 아버지는 남편 사무실에 한 번씩 다녀 갔는지, 어느 날 잔뜩 술에 취해 들어온 남편이 그런 아버지에 대해 불평을 늘어놓았더랬다. 나는 직장 다니는 와중에도 주말마다, 여름 방학, 겨울 방학마다 내 시부모 지내며 밥상 차리고 살림하며  혼신을 다해 자기 부모한충성하고 있는데, 사무실 좀 다녀갔다고 그렇게 불하는 못난 남자였다.


  아버지는 그런 사람이었다. 자기의 행위가 딸자식한태 어떤 영향을 주는지 헤아릴 줄 모르는 사람이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드디어 공포의 굴레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그러나 남겨진 옷가지들과 가재도구를 정리하면서

회한의 울음을 토해내었다.

지독한 악연에서 풀려났지만, 풀난 게 아니었다.

악연도 인연이어서 목놓아 울었다.


왜 우리들에게 그렇게 고통을 주었나, 그래서  왜 우리를 떠나게 했나, 왜 자식들이 외면하게 하고 외롭게 살았나. 왜 그래서 이렇게 울게 하나.

아버지에 대한 원망과 자신에 대한 회한과 우리에게 가혹했던 운명에 대해 끝없이 목놓아 울었다


그날  산속에서 목 놓아 울던 그 여인의 울음은 곧 나의 울음이었다.


회한에 가득 찬 울음,


아버지 우리 다시는 만나지 마요.


아니 안 만날 겁니다.


나는 무기물로  존재할 거니까요.


그러나 회한으로 구천을 떠돌고 계신다면, 내 회한의 눈물로 용서했으니 부디 평안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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