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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Vera Ryu Mar 20. 2024

노보리베츠 - 지옥온천 = ?

우리 아무것도 하지 말자

이제는 너무 지쳤다.


열심히도 돌아다닌 지난 순간들.


삿포로 첫날부터 하코다테까지 총 3일 치의 일정 내내 숙소에 들어와 기절하지 않은 날이 없었다.


문제의 시작은 계획이었다. 신나서 여행 계획을 세울 땐 적당히 가성비 있으면서도 야경이 예쁘거나, 풍경이 예쁜 숙소만을 눈에 불을 켜고 찾아댔다. 숙소까지도 알차게 즐겨 주겠다는 불굴의 의지였다.


실제로 어떤 면에서는 이 계획에 성공하기도 했다. 바로 전날인 하코다테에서였다. 히나상과 술을 그렇게나 먹고 나서도 꾸역꾸역 숙소로 돌아와, 호텔에 딸린 외부 욕탕에 몸을 담갔다 숙소로 돌아와 잠들었기 때문이다.


하코다테의 아침.


그날 하코다테의 기온은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미친 듯한 바람은 아직도 느껴지는 것 같다. 무슨 그런 바람이 다 있지. 바다 근처에 살고 싶은 생각이 살짝 수그러드는 체험이었다.


너무 지쳐서 숙소 구경이고 뭐고, 나가서 밤문화를 즐기고 말고 그냥 쉬고 싶었다. - 물론 야무지게 밤에 편의점까지 나가서 푸딩 따위를 깨작깨작 먹고 오기도 했다. 어라, 이 정도면 충분히 알차게 즐긴 것 같은데... - 당연한 얘기지만 여행도 체력 고려를 잘해야 한다.


매일매일을 일한 사람처럼 12시를 넘기기 직전에 들어와 간당간당히 씻고 잠들면 진짜 기분 좋은 여행이랑은 거리가 멀어지기 때문이다. 물론 많은 한국인들이 그렇게 여행하고 있다.


딱 하코다테에서 기차를 타고 노보리베츠로 갔을 때, 특히 노보리베츠역에 도착해 왠지 구리구리한 화장실에서 멀미를 느낄 때. - 기차를 타고 멀미하기는 처음이다 - 그때가 피크였다.


참 한국인다운, 다시 말해 일정에 대한 압박이 가득하고 욕심이 그득그득해 어느 것 하나 포기를 하는 것조차 싫어하는 여행에 대한 환멸 말이다. 원래부터 약골 체력이라 어렸을 때부터 날아다니지는 못했던 나의 체력을 알고도 이런 스케줄을 짠 과거의 나에 대한 원망 말이다. 욕심이 많아도 너무 많은 나의 성정이 지겨워지는 순간이었다.


노보리베츠역.


게다가 노보리베츠에 도착한 날엔 하필 비가 처적처적 내렸다. 하코다테에서부터 이어져 온 비소식이었다. 그렇지만 노보리베츠엔 히나상이 없다. 그저 우리 같은 관광객뿐이다. 내게 노보리베츠는 이런 인상이었다. 여행자의 숙취가 있는 곳.


노보리베츠에 가게 됐다.




이미 말했듯, 노보리베츠로 넘어간 건 기차를 통해서였다. 이번에도 해안가를 보면서 가게 되어 좋긴 한데, 너무 오래 걸려!!!


장장 4시간 동안 기차를 타야 했다. 게다가 우리가 예매한 시간대의 열차가 원래 그런지, 그간 탔던 열차보다 훨씬 구렸다. KTX 타다가 새마을호 타게 된 느낌...


좌석도 잘못 골라서 사람들이 얼마나 들락날락 들락날락 들락날락거렸는지 모른다. 피곤한데 앞에서 정신없이 움직이니 나중에 가선 짜증도 났다.


막 잠에 쩌들고 입 벌리고 잠들어서 입은 마르고. 이게 진짜 숙취 아닌가? 생각해 보니 여행의 피로는 심각한 숙취와도 맞먹는 것 같다. 심장에 무리가 가는 점에서도 더더욱. 그렇다면 몸에 해로운 술을 자제하듯 과도한 여행도 조심해야 하는 것 아닌가?


평화로워 보이지만 지옥의 열차.


나는 숙소에 도착하기까지 너무 지쳐 있어서 J에게 하는 말이 필터 없이 툭툭 나오기 시작했다. 사실 이쯤부터 제대로 길을 찾아가기 위해 온갖 상황을 다 고려하는 게 지겨워지기 시작했다.


기억에 남는 건 노보리베츠역에서 지옥온천이 있는 마을까지 올라가는 버스를 탄 일인데, 여기서 사소한 문제가 발생했기 때문이다.


많이들 알고 있듯, 일본의 버스는 뒤에서 실물 이용권을 뽑으면서 탑승한다. 그런데 이 버스는 관광객이 너무 많이 타다 보니, 이 종이 내뱉는 장치가 종이 뭉텅이를 씹어버려 이용권이 나오지 않았다. 나는 이게 마음에 들지 않았는데, J는 왜 내가 똥 씹은 표정인지 이해하지 못했다. 당연함. 내가 말을 안 했으니까...


J는 보통 내가 기분이 안 좋으면 원인을 찾아내 해결해 주거나, 대안을 제시해 준다. 기억으로는 이번에도 J는 내 문제를 해결해주려 했던 것 같은데, 나는 너무 피곤하고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지 모르겠어서 답답한 나머지 원래탑승할때저기서종이를뽑아야하는데기계가고장이안나와서종이를못뽑았다고ㅡㅡ 라고 쏘아붙여 버렸다.


말이 별로 안 심한 것 같다고요? 사실 대부분의 대화에서 말 자체의 폭력성이 문제가 되는 일은 드물다. 다만 말을 하는 당사자의 표정과 어조, 분위기, 조명, 온도, 습도... 그런 것들이 상대방에게 미묘하게 상처를 줄 수 있다.


그래서 말하고도 아차 싶었다. J가 어떻게 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닌데... 내가 너무 피곤한 것 같군. 이쯤 되면 꼭 쉬어줘야 한다.


그래서 우리는 과감히 지옥온천을 빼기로 했다.




온천은 들어가 몸을 지지는 게 목적이다.


굳이 들어가지 못할 온천을 방문해 풍경이나 구경하며 따뜻한 수증기만 쐬다 오느니, 풍경은 그저 그렇더라도 얌전히 물속에 들어갔다 나왔다 하기를 반복하는 게 어떨까 싶었던 것이다.


결론적으로 제일 편안하고 아늑한 선택이었다. 료칸에만 누워 있는 것 말이다.



안내를 받아 방에 도착하니 아직 눈이 녹지 않아 제법 예쁜 풍경이 우리를 맞이하고 있었다.


우와 대박 (찰칵) 이런 것도 (찰칵) 있네 (찰칵) 신기하다 여긴 뭐지? (찰칵) 물도 주네 완전 좋다 (물 찰칵) 화장실이 따로 있구나 ~ 불은 어떻게 켜? (드르륵) 아 이렇게 ~ (찰칵) 이건 과자인가? (찰칵) 귀엽다 먹어봐 (찰칵) 플레이팅 플레이팅. 이제 먹어봐 (콰삽) 너무 좋은데? 이제 누워있자.


홋카이도의 명물 세이코마트에서.


우리는 조용한 방 안에 누워있다가

세이코마트에 들러 아이스크림도 먹어주다가,

온천욕을 하고,

저녁을 먹고,

그냥 잤다.


료칸은 훌륭했다. 깔끔하고 조용해서 아무 생각 없이 쉬기에 최고였다. 저녁을 먹고 8시부터 자리에 누우니 조금 심심해져서, 뭐 볼 거 있나 하며 TV 리모컨을 만지작 거렸다.


손이 엄청 큰 여자들이 나와 연말용 파티 요리를 하는 것 외에는 뭐... 조금 보다가 말도 모르겠고 조금 피곤해져서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다 이불에 파묻혀 잤다.


장담하는데 내가 최근 5년 간 잔 잠 중에 제일 맛있는 잠이었다. 사실 이전 글에서 하코다테로 가는 기차에서 자는 잠이 정말 맛있었다고 했는데, 그건 최근 1년 중 최고였던 거고 이 잠이 진짜였다. 거짓말 안 하고 신생아처럼 내리 잠만 잤다.


어찌나 푹 잤는지 중간에 요의가 있어 잠시 깼을 땐 온몸이 땀에 젖어있었다. 땀이야 아침에 목욕해서 씻으면 되니까... 볼일만 해결하고 다시 잠에 빠졌다. 노보리베츠에서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도 이번 여행에서 가장 기억에 남았다.


노보리베츠 푸딩. 맛은 그냥 푸딩 맛이다.


가장 큰 이유는 주말에도 알람을 맞출 정도로 긴장 상태가 계속되는 나날을 보내다가, 몇 년 만에 처음으로 아무 생각 없이 잠을 푹 잤기 때문이지 않을까. 지금도 그 한가로움이 그립다. 서울엔 가득한 이웃집의 소음도 없고 잠들지 않는 배달 오토바이 소리도 없는 곳...


인생의 여독을 풀기 최고였다.


가이세키 후식으로 나온 아이스크림과 초콜릿.
노보리베츠역 근처 카페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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