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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Vera Ryu Mar 18. 2024

크리스마스는 삿포로 아니고 하코다테에서 2

일본어로 '춥다'는 '사무이(寒い)'

히나상은 6시쯤 붉은 벽돌 창고 근처 크리스마스트리 앞에서 보자고 했다.


6시에 이곳에서 12월 크리스마스 시즌을 기념해 작은 불꽃놀이가 펼쳐지기 때문이다. 불꽃놀이에 관해서는 전혀 몰랐는데, 히나상과 연락하지 않았다면 쉽게 알지 못했을 정보였다.


히나상은 지하철에 사람이 많아 조금 늦을 것 같다고 해서, J와 나는 붉은 벽돌 창고 주변을 어슬렁 걸어 다니며 구경했다. 사람은 바글바글했다. 한국인은 잘 안 보여서 기분이 좀 좋았다. 그리고 크리스마스 분위기가 지대로 났다!! 12월이라는 게 겨우 실감이 났다.


아카렌카 창고 풍경.


아카렌카 창고, 일명 붉은 벽돌 창고는 사실 다른 지역에서도 흔하게 볼 수 있는 말 그대로 창고로 쓰이던 건물이었는데, 시간이 지나며 안에 크고 작은 상점들이 들어오게 됐다. 이름과 같이 붉은 창고로 지어져 옹기종기 모여있는데, 크리스마스 장식과 제법 잘 어울린다.


하코다테의 창고 앞은 바로 바닷가(부둣가)이다. 그리고 거기에 큰 크리스마스트리가 하나 덩그러니 있다. 전선줄을 정말 야무지게 감아 둬서, 밤에 봤을 땐 엄청 크고 풍성한 나무인 줄 알았다. 다음날 아침에 웬 목각인형 같은 걸 보고는 아주 당황스러웠던 기억이 있다.


히나상이 도착하고 어색하게 J를 소개했다. 이쯤에서 말하는데, 사실 나와 J 모두 내향적인 사람이다. 히나상과 하코다테에서 만날 수 있다는 생각에 설레긴 했는데, 생각해 보니 나와 히나상은 이번이 두 번째 만남이었다. 나와 히나상 모두 서로에 관해 아는 게 0에 수렴하는 상태.


수프 파는 부스.


어색하게 애매한 일본어와 한국어를 섞어 가며 이야기했다. 불꽃놀이를 기다리며 수프를 먹었는데, 진짜 개 맛있는 옥수수 수프였다. 다만 양이 좀 많아서 - 그도 그럴 게 천 엔어치였다. 거의 만 원어치라는 뜻이다. - 결국 다 먹진 못했다.


이 날 하코다테는 꽤 추웠는데, 너무 추워서 사무이(춥다)라는 말을 제일 먼저 배울 지경이었다. '사무이 무새'가 되어 시간을 때우다 보니 불꽃놀이가 시작됐다.


하코다테 ‘크리스마스 판타지’


하코다테의 불꽃놀이 - 정확한 프로그램 이름은 크리스마스 판타지 - 는 대충 5분 정도 한다. 긴 시간이 아니어서 적당하게 구경하다 보니 끝이 나 있었다. 화려한 불꽃이 사라지고 나니 허전했다. 창고 구경은 내일 해도 되고, 하코다테 전망대를 들렀다 히나상이 추천한 이자카야에 가기로 했다.


여행 가기 전에 조사했을 땐 일본의 3대 야경이라길래 히나상과 이야기할 때 대홧거리로 썼는데, 다른 야경에 밀려 이젠 3대 야경이 아니게 됐다는 소식을 들었다. '우리 하코다테 그 정돈 아닙니다'. 지방 사람들은 없는 게 없는 서울 사람들의 기고만장함에 치를 떨다가도, 서울 친구들이 자기네 고장에 놀러 오겠다고 하면 '아냐 우리 지역에 별 거 없어...' 하게 된다. 그게 생각이 나서 좀 웃었다.


한 때는 일본의 3대 야경에 속했던 하코다테의 야경.




이자카야에 갔다. 히나상이 고심해서 골라준 곳이었다. 일정 시간 동안 술을 무제한으로 시킬 수 있는 시스템이었다. 안주 따로 시키는 것. 한국에도 종종 이렇게 하는 술집이 있긴 하지만 가본 적이 없다. 나는 술찌니까 조금만 먹어야지~ 그리고 개 취해서 호텔에 도착했다.


히나상의 소개로 히나상 친구 리노상도 만나게 되었다. 리노상은 일이 끝나고 조금 늦게 도착했는데, 키가 크고 성숙한 느낌이 나는 히나상과는 스타일이 달랐다. 키가 큰 사람과 키가 작은 사람은 항상 같이 다닌다더니, 그게 일본에서도 적용되는 법칙인가 보다.


그리고 중요한 것 :


히나상이 나한테 '스타이루'가 좋다고 해줌!!


언제쯤 이런 매너 있게 상대방을 칭찬하는 말에 가볍게 웃어넘기며 겸손을 떨 수 있을까? 아직은 기분이 너무 좋아서 입이 귀에 걸리고 난리였다.


자연스럽게 한국과 일본의 문화나 미디어에 관해 이야기하게 되었다. 히나상은 케이팝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하며 한국 문화에도 관심을 갖게 되었다고 했다. BTS 지민이 최애라고 했다. 내가 맨날 미디어에서 보던 한국에 정착한 한류 팬의 루트와 맞춘 것처럼 똑같아 신기했다. 정말 소프트파워의 시대구나...


한편 나는 일본과 관련해서 생각나는 드라마나 노래가 많지 않아서 정말 부끄러웠다. 생각나는 게 ㅜㅜ... 야쿠자가 나오는 범죄물이나 현대 사회의 고통을 다룬 어두운 영화뿐이었다. 히나상에게 그런 걸 안다고 말하기가 진짜 너무 부끄러웠다. 아 취향 좀 진작에 바꿀걸... 


꼬치~


다행히 일본의 것들을 좀 아는 J 덕분에 대화를 원활하게 할 수 있었다. 히나상과 리노상은 일본의 애니메이션이나 노래를 많이 아는 J가 신기한 듯했다. 신기한가요? 저희도 님들이 신기해요...^^




신나게 이야기하며 술을 마시다 보니 11시를 좀 넘긴 시각이었다. 원래는 함께 디저트 카페나 바에 가기로 했는데, 우리는 다음날 일정이 있기도 해서 아쉽게도 이만 헤어지기로 했다.


그렇게 계산을 하고 나가려는데 문제가 발생했다. 결제가 되지 않는 것이다! 눈치로 살펴본 바로는 카드 결제 기기가 고장이 나서 분할 결제를 못하게 된 것 같다. 아니 그게 또 왜 하필 오늘 고장이 난담... 고장 난 게 맞겠지? ㅜㅜ.. 돈이 부족해 현금으로는 결제를 아슬아슬하게 하지 못해서 난감했다.


상황 파악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우리들에게 히나상이 파파고를 열심히 돌려줬는데, 결과를 보여줄 때마다


카드 결제의 기회가
깨져버린 것 같습니다


라고 나와서 당황스러웠다. ㅠ아니 안 되는 건 알겠는데 대체 어디서 '깨지다'가 나온 것이지? 심각한 상황에서 엉뚱한 번역이 괜히 웃겨서 뒤로 빠져서 혼자 웃고 있었다. 언제쯤 이런 시답잖은 게 안 웃기게 될까?


아무튼 일본어 할 줄 아는 분들은 저 '깨져버리다'의 의문 좀 해결해 주시기 바랍니다.


여차저차 있는 현금 없는 현금 다 끌어모아 결제를 하고, 택시를 타고 호텔로 돌아왔다. 한사코 거절했는데도 히나상은 택시비까지 내 손에 욱여넣듯 쥐어 주었다. 뭐야 히나상... 서로 계산하려고 카운터 앞에서 싸우는 한국인이랑 너무 똑같은데...?


난 히나상에게 해준 게 없는데 너무 잘해줘서 미안할 정도였다. 교통비에 관광지 입장료에 - 히나상 것은 히나상이 결제했다 - 택시비까지... 일본 물가가 싸지는 않으니 은근히 부담이었을 텐데 그런 티를 내지도 않았다. 히나상... 나보다 한 살밖에 많지 않잖아... 심지어 히나상은 나와 J에게 바리바리 하코다테의 특산품을 선물로 주었다고. 감동 심하다.


히나상은 7월에 다시 한국에 온다고 했다. 한국의 지옥 같은 불볕더위를 맛보게 되는 것이다. 히나상이 더위에 힘들어하지 않도록 놀러 오면 J와 함께 잘 모실 날만을 기다리고 있다.


하코다테 전망대 올라가는 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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