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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Vera Ryu Mar 12. 2024

흰수염폭포 광장을 왁킹으로 뒤집어놓으셨다

여행지 리뷰 아니고 여행지 가이드 리뷰는 또 처음

세븐스타 나무에서.


흰수염폭포를 방문할 즈음엔 이미 오후를 지나고 있기도 했고, 투어의 후반부이기도 해서 이미 지친 상황이었다. 으 멀미나...


요즘 유행하는 비에이 투어는 보통 세븐스타 트리, 크리스마스 나무, 탁신관, 흰수염폭포, 닝구르테라스를 버스로 이동하며 방문하는 투어다. 이렇게 방문 지역을 나열만 해놓으면 잘 모르기 쉬운데, 홋카이도는 정말 넓다..^^ 하루 종일 버스로 이동을 한다는 소리다.


그래서 흰수염폭포에 다 와갈 즈음에는 아... 그냥 화장실 갈 생각밖에 없었다. 이렇게 피곤해지면 사실 가이드의 말은 아무것도 안 들린다. 아 빨리 내리고 싶당. 그때 가이드가 흰수염폭포로 접근할 수 있는 관광지 입구 쪽 광장을 가리키며 이렇게 이야기했던 것 같다.


여러분 저기 저 광장 보이시죠?
제가 저기서 잠시 왁킹을 출 거예요.



아 정말이지, 막을 새도 없이 웃음이 터져 나왔다. 여기서요??? 왁킹을?!




비에이 역 근처에서.


여행을 다니며 가장 아쉽고 난감한 것은, 내가 아주 뛰어나지도 않고, 아주 못나지도 않은, 딱 평범한 사진 실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아니 사실은 애매한 사진 실력보다는 트렌드에 민감하지 못한 데서 오는 아쉬움이 더 큰 것 같다.


내 사진은 뭐랄까, 여행 정보를 찾으려고 포털을 막 뒤지다가 어쩌다 들어가게 되는 2007년에 세계일주를 하신 누군가의 티스토리나 기본 스킨 블로그... 에 첨부되어 있을 것 같다. 좋게 말해 시대를 타지 않는 사진을 찍을 줄 안다고 하겠다.


아무튼 나도 다른 사람들처럼 인스타에 감성 사진 올려서 바이럴 타고 싶은데...! 그런 거 해줄 사람 어디 없나?


있었다. 투어 상품을 뒤져보니 심지어 DSLR로 사진을 찍어주는 데가 있다고 했다. ㅇㅋ예약. 그렇게 좐박을 만나게 됐다.


‘그 나무‘. 사실 별 건 없다


좐박이 처음 삿포로에 간 것은 2018년 관광을 위해서였다고 했다. 좐박은 지금 삿포로 지역 가이드로 일하고 있다. 그의 가이드 스타일 중 가장 눈에 띄는 건, 삿포로의 수많은 맛집을 꿰고 있다는 것이다.


투어를 신청하면서 이것까지 기대하진 않았는데 - 그야 투어가 끝나고 난 뒤의 일정까지 봐주는 여행사는 잘 없으니까 - 관광버스 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의 저녁 식사를 추천해 주고, 심지어는 일본어를 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해 대신 예약까지 해 주었다. 그리고 내가 추천을 받아 간 고깃집도 장난 아니었다. 하루 식비를 10만 원 쓰는 사람이 추천한 곳 다웠다.


원래는 요식업계에 있었다고 했다. 학교도 요리 관련 학교를 나왔고, 실제로 잠깐 관련한 일도 했다고 했다. 다만 처음 들어간 곳의 환경이 맞지 않아 얼마 있지 않아 나오게 되었고, 돈을 모아 삿포로를 오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는 다시 반복되는 이야기다. 가이드가 되고, 나의 투어를 도와주게 되었고, 광장에서 왁킹을 췄다.


아직도 이 ‘왁킹을 췄다’는 부분이 놀라운데, 이유가 크게 두 가지가 있다. 일단 하나는 나로서는 절대 절대 절대절대 절대 절대절대절대 절대 상상할 수 없고 실현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아까부터 내가 ‘광장’이라고 언급하고 있는 이 장소가 어디인지 아는가?


흰수염폭포 입구. 구글 로드뷰.


이런 느낌이다. 그리고 겨울엔 나름 유명 여행지여서 사람이 바글바글하다. 여기서 왁킹을 춘다니... 사실 오전에 투어를 시작할 때부터 그가 왁킹을 춘다고 이야기하긴 했다. 자기소개를 하면서 왁킹을 배우고 있다며 새로운 취미를 알린 뒤였다. 이때만 해도 ㅋㅋ 웃기다(설마)라고 생각했다. 아니 어디서 추냐고요~ 그게 관광지일 줄은 진짜 꿈에도 생각 못했다.


두 번째 이유는 좐박의 MBTI를 들었기 때문이었다. 원래는 내향인이었다고 했다. 사실 이것도 믿을 수 없었다. 가이드하는 모습을 보면 내향...? 전혀 매치가 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솔직히, ‘가이드’랑 ‘내향인’이 양립할 수 있는 단어냔 말이다!! 이 성격이 바뀌게 된 것도 물론 2018년의 삿포로 전후 즈음이었다고 했던 것 같다. 특히 가이드를 하며 많이 바뀌었다고 했다. 오...




지금은 3월이고, 삿포로를 간 건 12월이었으니 이미 투어를 한 지도 꽤 지났는데, 좐박이 아직도 기억에 남는다. 이렇게 세심한 가이드를 받아본 기억이 없었기 때문인 것 같다. 어떤 가이드가 단체 관광객한테 힘내라고 영양제까지 챙겨주냔 말이다!~!


탁신관의 자작나무 밭에서.


한편 그의 일과 성격과 그가 짧게 공유해 준 그의 인생 한 조각이 이렇게 기억에 남는 이유는, 또 나 역시 비슷한 경험을 해봤기 때문인 것 같다. 나는 오랫동안 바라던 분야에서 일을 해보려다가 실패한 적이 있다. 나는 이 경험을 ‘튕겨져 나온 경험’이라고 한다. 공이 빠르게 움직이다 부딪히면, 빠르게 움직였던 만큼 다시 강하게 튕겨져 나온다. 내가 느낀 게 딱 그런 느낌이었다.


짧았던 ‘시련’이 무색하게 이후 꽤 오랫동안 방황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시기에 대한 결론을 아직 내리지 못했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때 좐박의 이야기를 들으니 신기하기도 하고, 저럴 수도 있구나 싶기도 하고 하여튼 여행을 갔는데 사람에 이렇게 관심을 갖게 된 게 희한하면서도 웃기고 신기하고 기분이 좋았다. 그리고 그의 알 수 없는 삶의 궤적 - 요리하다가 가이드를 하게 될 것을 예상할 수 있는 사람은 사실 많지 않다 - 을 보며 내 삶도 저렇게 흘러갈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래서 오히려 안심이 되었다.


너무 궁금해서 인스타로 좐박의 근황을 종종 찾아보곤 한다. 그는 설날이 언제인지 잊을 정도로 엄청 바쁘게 지내는 듯 보였다. 곧 삿포로의 비수기가 시작되니 짬을 내어 한국에 잠시 들어온 것 같기도 하다. 푸하하 열심히, 알차게, 그리고 무엇보다도 행복하게 지내시는구먼! 가끔 그가 공유하는 왁킹 실력도 날이 갈수록 화려해지는 것 같다. 비에이는 아름다운 풍경과 예쁜 사진들 말고도, 기분 좋은 추억이 많은 곳으로 남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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