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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Vera Ryu Mar 07. 2024

스윗 정신승리

여행에서 하나는 포기해야 한다는 법칙에 관하여

오늘은 글쓴이의 개인 사정이 있기 때문에 잠시 쉬어 가는 시간을 가져볼까 한다.


정신승리에 관한 이야기다.


개인적으로 ‘정신승리’라는 말과 그 개념 자체를 안 좋아한다. 가장 큰 이유는 역시 그것이 ‘승리’처럼 느껴지지 않기 때문인 것 같다. 아니~!~! 현실의 문제가 버젓이 있는데 속으로만 희망을 그리고 있으면 어쩌냐는 말이다.


초등학교 교과서 속 ‘무지개’ 삽화

예전에는 나도 추상적이고 이상적인 것이 곧 현실이 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어느새 나도 재밌는 상상보다는 안온한 현실을 추구하게 되었다. 김동인의 소설에서 처럼 무지개를 찾지 못해 노인이 되어 가는 것이다.


그러나 정신승리를 지양하는 나의 마음가짐은 여행에서는 예외적으로 그 반대가 된다. 어느 날 이런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어쩌면 이 ‘정신승리 권법’이야말로 싸우지 않고 오손도손 잘 여행을 하는 가장 쉬운 방법이 아닐까?


사연은 이렇다. 나는 운이 좋아 이십 대 초반부터 내가 태어났을 때 부모님이 대충 예상했을 내 인생 전체 여행 횟수보다는 더 많이 여행을 다닐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이때는 같이 간 일행이랑 맞지 않아 토라지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어려도 많이 어렸던 나는 거기에 제법 상처를 많이 받았고, 계속해서 다툼의 이유를 생각해 냈었던 것이다.


가장 큰 이유는 이거였다: 내가 가장 원하는 게 다른 사람에게는 별로 시덥지 않은 것이라는 것.

그른가...


그러니까 나는 어떤 공원을 절대 포기할 수 없었는데 다른 사람에게 그 공원은 그저 지나다니는 길에 불과할 수도 있는 거고, 어쩌면 그런 게 당연한 것이다. 너무 당연한 사실을 두고 속상해하면 안 되는 거였다.

오히려 이걸 이해하게 되니, 여행에서는 어떤 규칙을 생각하게 됐다. ‘포기할 수 없는 것 하나만 정하기’.


여행을 계획할 때는 솔직히 아무리 깐깐하고 꼼꼼한 사람이래두 신나서, 잘 몰라서, 최악의 상황은 회피하고 싶으니까 일이 착착 잘 진행되는 경우를 더 많이 생각하게 된다. 그러다 보면 이것저것 욕심이 많아지고, 일상에 흔하게 오지 않는 기회인 여행에서 뽕을 뽑고 싶게 마련이다. 바로 그걸 경계하는 것이다.


애매하게 중요한 게 여러 개 있는 것보다는 정말 중요한 거 하나만 계속 챙기는 게 더 편하다. 여러 개를 모두 챙긴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여행을 같이 가는 친구들에게 항상 말한다. ‘여행을 갔을 때 정말 포기할 수 없는 거 하나랑, 너무 원하지만 정 어쩔 수 없다면 포기해도 좋은 것 하나만 말해줘’. 1순위와 가장 마지막 순위를 꼽자는 거다.


여기서 중요한 건 서로의 1순위를 존중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홋카이도에서 나의 1순위는 밤의 디저트였다. 낙농업이 발달한 홋카이도는 우유와 술 등을 활용한, 주로 밤에 먹는 디저트가 유명하다. 당연히 단 거에 환장하고, 술만 마시면 해장 아이스크림을 먹어대는 나는 그게 꼭 필요했다.


하코다테 열대식물원의 온천욕을 즐기는 원숭이 친구들.

J의 1순위는 하코다테 열대식물원에 있는 원숭이를 보는 거였던 것 같다. 사실 나는 블로그에서 이미 열대식물원의 모습을 봐서 적잖이 기대가 빠진 상태였는데, J가 정말 원하는 것이기에 일정에서 빼지 않았다.


밤의 디저트 역시 단 걸 아주 좋아하지는 않는 J에게는 중요한 게 아니었을 것이다. 하지만 J는 얌전히 웨이팅도 기다려주고, 함께 비싼 파르페를 사 먹어줬다. (그리고 그 파르페는 생각보다 느끼하고 배불러서 나중에 가서는 부담스러웠다) 먹어 보니까 굳이 안 먹어봐도 됐을 거였단 걸 알았지만, 못 먹었다면 두고두고 생각나고 아쉬웠을 거다.


그리고 하코다테에서는 이런 일도 있었다. 우리는 원숭이들을 보고 타코야끼 맛집을 방문할 예정이었다. 그런데 날씨가 생각보다 많이 안 좋았고, 급기야는 비까지 오기 시작했다.


가까스로 버스 정류장을 찾아 비를 피하며 타코야끼집으로 가는 버스를 기다리던 우리는, 순간적으로 타코야끼 집에 가지 않아도 되겠다는 결론을 내렸다. 우리 그냥 가지 말까? 그래도 돼? 응. 정말 빠른 결정이었다. 아무래도 우리의 1순위는 이미 이룬 뒤였기 때문이다. 너무 부담스럽지 않고 좋았던 여행.


‘내가 진짜 원하는 걸 이뤘으니 이번 건 좌절돼도 괜찮아‘. 이런 달콤한 정신승리라니. 쉽진 않겠지만 여행이 아닌 일상에서도 가끔은 이런 태도를 가져도 괜찮을 것 같다.


삿포로 스스키노 거리의 ???에서.

그리고 우리는 가격에 비해 맛은 그냥 그랬던 파르페 집 말고, 더 맛있는 디저트 집을 찾았다. 아이스크림과 위스키를 파는 집인데, 이곳 이야기는 나중에 다시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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