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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Vera Ryu Mar 05. 2024

해외여행에서 제일 싫은 것은?

한국인 마주치기


산울림 - 길엔 사람도 많네



내 여행의 주된 목적은 어쩌면 내가 한국에 속하고, 한국인이라는 사실을 잊는 것인지도 모른다.


한국에 살고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렇겠지만 말이다. 이 '어디서부터 지적해야 할지도 모르겠는' 사회에 나는 얼마 살지도 않은 것 같은데도 너무 쉽게 지친다. 그런 피로를 더 이상 견딜 수 없을 때 나는 도피성으로 여행을 가는 것 같다.


이런 이유로 없는 돈 겨우 긁어모아 간 해외여행에서까지 한국인을 만나는 것은 그래서 보통 스트레스받는 일이 아니다. 명절에 익숙한 가족이 모이면 더 많이 싸우듯이, 괜히 익숙한 한국인들에 더 눈살을 찌푸리게 된달까.


이렇게까지 '혐한'하게 되는 까닭은 역시 그만큼 그들의 모습에서 나를 찾기 쉽기 때문일 것이다. 말이 통하지 않는 해외에 나가면 모국어가 더 귀에 익는다. 다 비슷하다곤 해도, 한국인들은 서로 익숙한 패션을 공유한다. 게다가 익숙한 사진 찍기, 익숙한 그 억척스러움까지... 어쩔 수 없이 익숙한 타인에게서 발견하게 되는 나의 못생긴 모습. 그건 '내가 한국에 속한다 - 위 아 코리안'이라는 것을 잊기 위한 여행의 목적에 반하는 상황이다.


다시는 전망대에 가지 않겠다고 다짐했던 후쿠오카타워에서.


문제의 원인을 분석하고 발견했다면 그것을 해결하는 방법을 떠올리는 건 제법 쉽다. 나는 한국인들과 최대한 덜 마주치기 위해 몇 가지 방법을 고안해 냈다. 그중 하나가 ‘전망대 안 가기’.


보통 해외 여행지에서 전망대는 당연히 여행자들의 몫이다. 그리고 한국인은 전 세계 웬만한 곳은 다 여행을 다닐 수 있는 여권이 있다. 그렇다는 건 세계 모든 전망대는 실질적으로 한국인들이 전세를 냈다고 봐도 되는 것이다. 굳이 비좁은 곳에서 예쁜 야경 속에 비치는 그저 그런 사람들을 보며 네가 쳤네 줄을 안 서네 지지고 볶고 눈 흘기고 하느니 바로 그곳을 피해버리자는 것이다.


아니면 의외의 틈새시장을 노려 전망대와 가까운 곳에서 노닥거리는 방법도 있다. 맛집이 있다면 그 옆에 옆에 집 - 바로 옆집도 사람이 많다 - 가기, 전망대 위 말고 아래에서 놀기. 아르헨티나에서도 오벨리스코와 대통령궁이 아닌 그 옆 아무것도 아닌 장소에서 쉬면서 노닥거리던 때가 더 기억에 남는다. 제법 괜찮은 방법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후쿠오카 다자이후에서.


이렇게 무작정 한국인 배척을 내세우던 내게 이번 여행은 시작부터 다른 관점을 제시했다. 내가 삿포로로 가는 비행기에서 만나게 된 옆자리 아저씨 이야기를 말하는 거다.




우리는 비행기를 아주 간발의 차로 타게 됐다. 이에 관해서는 할 말이 너무 많은데, 간략하게 설명하자면 우리의 패인은 1. 둘 다 아침밥을 절대 거르지 못하는 타입이라는 점, 그리고 2. 오랜만에 출국해서 인천국제공항의 내부 구조를 충분히 알지 못했다는 점에 있었다. 그래서 우리는 오전에 출발하는 삿포로행 7C1904 편에 제일 마지막에 탄 사람들이 되었다.


이미 모두가 탄 비행기 수하물 칸이 비어있을 리 없었다. 꽉 찬 짐칸, 예상보다도 더 꽉 찬 짐칸에 당황해서 할 말이 없어졌다. 아니, 9명의 짐이 이렇게나 많을 일이냔 말이다. 벙찐 우리를 본 옆자리 아저씨는 ‘옆칸에 짐을 넣으면 된다’며 이야기했다.


알죠;; 우리도;; 문제는 옆자리도 이미 자리가 많았다는 것이다. 승무원의 도움을 받아 가까스로 우리의 작은 짐을 욱여넣었다. 그리고 아저씨의 옆에 앉았다.


우리의 자리가 없음에 괜히 심술이 난 나는 이 아저씨의 우악스러운 친절이 오지랖으로 느껴졌다. 도와주지도 않을 거면서 말만 얹을 건 뭐람;; 딱 한국인답게 이륙까지 퉁 부은 얼굴로 핸드폰만 하고 있었다.


길고 긴 비행기의 행렬을 기다리다 드디어 우리 차례가 왔다. 이제 이륙이다...! 그런데 이륙을 막 할 때 즈음 아저씨는 갑자기 전화를 받더니 어디론가 떠났다. 그러더니 비행기가 뜨고 나서도 안 오시는 게 아닌가..!


눈치를 보는 것도 잠시 우리는 자유롭게 좌석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짐도 놓았다. J는 일찍 나와 비행기를 타기 위해 뛰기까지 한 게 힘들다며 옆으로 누워 잠들기까지 했다. 자유가 방종으로 이어지는 시간. 이렇게 마구 써도 되나? 그런 반성 따위는 없었다. 그냥 우리가 편한 게 좋았다.


혹시 '시부야 멜트다운(Shibuya Meltdown)'을 아는가? 모른다면 구글에 검색해 보라. 종종 서울 지하철에서 보이는, 넘쳐흐르는 취기를 이기지 못하고 세상을 집으로 삼은 사람들의 모습이 담겨있다. 우리가 딱 그런 모습 아니었을까?

※주의※ 때에 따라 조금 역겨운 이미지도 있을 수 있음.



세 시간 정도가 흘렀고 삿포로가 보였다. 그리고 그 아저씨가 뿅 하고 나타났다.



뭐야?


놀라는 건 나중 일이고, 아저씨가 착륙하기 전까지 무사히 앉을 수 있게 우리는 허겁지겁 우리가 차려놓은 살림을 치우기에 바빴다. 아저씨는 너털웃음을 지으시며 '이렇게 하면 어떡해~'하며 장난스레 꾸짖으셨다.


어떻게 된 일이지... 우리의 의아함을 알아챈 아저씨는 비행기 앞쪽 좋은 자리가 비어 있었다며, 그곳에 앉아 세 시간 동안 편안하게 왔다고 너스레를 떠셨다. 성격이 원래 태연하신 편이구나. 어쩌면 머쓱해하는 우리를 배려해 그렇게 말씀하신 것일지도.


아저씨는 우리가 짐을 내릴 때 여행을 온 거냐며 다시 말을 건네셨다. 네 여행이요. 기억하기로는 아저씨는 비즈니스 여행이라고 하셨던 것 같다. 그러면 급한 전화가 이해가 되지. 나는 마음이 풀려 가볍게 좋은 여행 하시라고, 말씀을 드렸던 것 같다. 생각보다 유쾌한 경험이었다.


사실 아저씨와 내릴 때 한 대화는 사실이 아닌지도 모른다. 이렇게 기억하게 된 것은, 손쉽게 경계가 많고 타자화가 심했던 나의 태도를 바꾸는 아저씨의 내공이 흥미로웠기 때문일 것이다. 해외에서 한국인 만나기 싫은 이유? 당연히 멀리서 바라본 그들은 차가워 보이고, 또 자기들끼리 하는 얘길 들어 보면 죄 쟤는 어떻고, 저런 건 싫고 하는 싫은 말이 들려서 그런 거였다.


그런데 아저씨와의 짧은 대화는 그것이 어떤 경계심에서 나온 것일 수 있다는 생각을 들게 했다. 왜, 싫은 감정도 다른 것에서 느껴지는 두려움에서 비롯된 것일 수 있지 않는다. 안정적인 것이 깨질 수 있다는 불안감. 가뜩이나 낯선 곳에 가서 마주하는 것들이 내 생각대로 흘러가지 않을 때 나오는 방어기제.


스스키노 거리 닛카상 앞에서.


이 경험이 내 여행의 운명을 좌우할 정도로 큰 것이었냐? 그건 아니다. 여행을 하며 한국인들을 기분 좋게 마주칠 수 있었나? 그것도 아닌 것 같다. 그렇지만 삿포로 크리스마스 마켓을 무난히 갔다 왔고, 야끼니꾸 가게에서 한국인의 대화가 들려도 크게 개의치 않았고, 에이비씨 마트에서 마주한 한국인들을 그러려니 하고 넘길 수 있었던 것 같다. 그 무심함과 너스레를 생각하며.


양고기가 들어간 스프카레.
삿포로 TV타워와 일루미네이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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