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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hloe J Apr 12. 2024

6-2. 어쩌다 보니 애서가

월든 - 키워드 : 독서

초등학교 부부교사이신 부모님 슬하에 장녀로 나고 자랐지만 책을 읽으라는 소리를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다. 부모님도 책을 읽어야 한다는 필요성을 전혀 느끼지 못하시는 분들이셨다. 지금도 친정 책장에 꽂혀있는 책은 10권 정도를 제외하고는 학습자료나 연수교육자료들이다. 초등학교 때 학교에 도서관이 있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고 고등학교를 졸업하기까지 책을 대출했던 기억이 없다. 나이 독서는 30살이 넘어서 시작되었다.


내 독서의 시작은 아이를 위해서였다. 의과대학생시절 시험기간이 아닐 때도 시험이 늘 따라다녔다. 교과서를 제외한 다른 책은 생각할 수도 없었다. 그때 우리 반 1등 하는 여자친구는 늘 손에 소설책을 들고 다녔다. 두께도 당시 교과서 보다가도 훨씬 두꺼워 베개로 쓰면 딱 좋아 보일 정도였다. 처음에는 그저 신기했다 좀 괴짜스러워 보이기까지 했다. 당시 짧았던 생각으로 소설책을 볼 시간에 공부를 더하지 않는 게 이상했다.


쉬는 시간이 되면 동기들은 모두 쓰러져 잠을 잤다. 대부분 하루에 18시간 정도를 학교에서 보내는 친구들이었다. 늘 잠이 모자랐다. 그런데 그 친구는 쉬는 시간에 소설책을 보고 있었다. 이해할 수 없었지만 그 아이의 모습은 마치 쉬는 것처럼 보였다. 소설 속으로 도망가는 듯했다. 그때 '내 아이도 책을 통해 쉴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이 기억이 딸을 임신을 하면서 되살아났다. '아이의 사생활'이 나의 첫 책이었다. 이후 육아서를 손에 들게 되었고 지금까지 흘러왔다.


책 읽는 시늉을 한지 얼마나 되었을까 좋아하는 척을 하다가 좋아하게 되었다. 어딜 가나 책을 한 권씩은 들고 다니게 되었다. 집 서재에는 책 읽는 짙은 푸른 책에 단단한 가죽으로 된 안락의자가 있다. 이곳에 앉아서 책도 읽고 생각도 하고 졸리면 낮잠도 잔다. 방 한쪽 구석에 작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지만 자유시간이 생겼을 때 가장 오랜 시간을 보내는 장소다. 그곳에 앉아서 책 속으로 런던도, 파리도 다녀온다. 다른 세계로의 입구라 할 수 있다. 이제는 더 이상 딸을 위한 독서가 아니었다. 나를 위한 내가 원하는 일이었다.


외출해서 책 읽는 걸 좋아한다. 쇼핑몰 휴게공간 의자도 좋고 카페도 좋다. 익숙한 장소에서 독서를 할 때와는 다른 즐거움이 있다. 처음 가보는 장소에서 책을 읽으면 마치 여행을 하는 느낌이다. 일상에서 벗어난 느낌. 혼자 있을 때면 책 한 권을 갖고 도보로 갈 수 있는 새로운 카페, 도서관, 공원을 가본다. 그렇게 누비다 만난 마음에 드는 장소는 나만의 소소한 희열을 준다.


내 인생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책은 '데미안'이다. 육아서로 시작한 독서는 자기 계발서를 거쳐 지식서까지는 넘어올 수 있었다. 당시 마음속에는 소설은 여가시간에 재미로 읽는 책으로만 생각해 관심 자체가 없었다. 하지만 고전은 달랐다. 시대를 관통하는 메시지가 궁금했다. 도대체 사람들이 시대를 초월해 모두 공감하는 이야기가 어떤 건지 나도 한번 느껴보고 싶었다.


고전에 도전한 첫 책이 데미안이었다. 별다른 이유는 없었다. 제일 많이 들어본 책들 중에 두께가 가장 얇았다. 700페이지가 넘는 4권으로 된 전쟁과 평화 같은 책은 시도할 엄두도 내지 못했다. 첫 번째 읽을 때 데미안은 이상한 책이었다. 말도 안 된다는 생각과 스토리 자체도 이해가 안 됐다. 그냥 그 유명한 한 줄 "새는 알을 깨고 나온다."를 찾은 게 전부였다. 책을 덮고도 누군가의 인생책을 이해하지 못했다는 불편한 마음만 가득이었다.


두 번 읽고, 세 번... 6번을 읽었다. 독서 모임에서 2번 토론을 나눴다. 고전은 오랜 세월 동안 계속 읽히는 책이다. 그리고 읽을 때마다 다른 것을 안겨주는 책이다. 아직 나는 온전히 그 책을 이해하지 못했고 앞으로도 그 책을 통해서 나를 발견해 갈 것이다. 내 첫 인생책이다. 처음 읽을 때 싱클레어는 이상한 아이였고 실존하지 않는 것 같은 데미안 때문에 정신분열이 아닌가 의심하기도 했다. 그리고 지금 싱클레어는 마흔이 훌쩍 넘었지만 나 자신이다. 아직도 내 세계에서 고군분투하는 나다. 내가 하나씩 스스로 둘러친 껍질을 깨고 세상으로 나아갈 때마다 인생책 데미안이 떠오른다.


독서가 삶이 되는 과정은 천천히 물드는 과정이다. 독서라는 삶의 과제는 왜 나는 힘든 거냐고 탓하다 지칠때즘 되니 어느새 스며들어 그 속에 들어와 있었다. 과정이 평탄하지만은 않다. 계속되는 도전과 좌절이 있었다. 내 도전과 좌절의 첫 책은 사피엔스였다. 이해도 안 되고 지루했다. 앞 내용이 생각 안 나서 읽는다는 행위 자체가 무의미하게 느껴지는 과정들이었다. 실제도 2번은 도중에 포기했다. 2번째 포기는 책을 150페이지 정도를 남기고 덮어버렸다. 남는 게 없는 독서라는 행위를 하는 자신을 자책했다. 3번째 억지로 다시는 보고 싶지 않아서 눈도장으로 완독을 하고, 정리를 하면서 벽을 하나 넘었다.


이제 내게 독서의 벽은 없다. 내 선택일 뿐이다. 책이란 걸 전혀 읽지 않은 내게 대학동기인 남편이 "자기는 원래 책 좋아하잖아..."라는 말을 할 때 알게 되었다. 내 일상에 책이 쑥 들어와 더 이상 떨어질 수 없는 상태가 되어있었다. 뿐만 아니라 내게는 나보다 책을 더 좋아하는 딸이 있다. 내가 내 아이에게 독서를 선물할 수 있었다는 사실은 지금 생각해도 가슴이 뛴다. 뿐만 아니라 피상적으로 살고 있던 내 삶은 깊어졌다. 독서를 기준으로 사유가 생겼다. 삶을 탐독하고 생각하며 알아간다. 알면 보인다는 말이 있다. 알면 보이고, 사랑하고, 감사하게 된다. 내 삶에 대한 감사는 책을 통해서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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