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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hloe J Mar 22. 2024

5-4. 기준의 변화

왜 세상의 절반은 굶주리는가 - 키워드 : 기준

세상에는 기준이 있다. 각자도 각자의 기준으로 삶을 영위한다. 적절한 기준은 개인과 사회의 성장을 가져오지만 불합리한 기준은 그 누구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 하지만 우리는 그 불합리를 문화라는 이름으로 과거의 것을 계승하곤 한다.


개인과 집단의 기준은 많은 부분에서 다르다. 개인의 기준에 대해 먼저 생각해 본다. 나는 완벽주의 성향을 갖고 있다. 새로움을 불안해한다. 그래서 새로움이 다가오고 어떤 일이든 생기게 되면 루틴화를 하는 성향이 있다. 위키 글쓰기를 시작한 이야기를 해보고자 한다. 나는 위키 글쓰기로 처음 글쓰기연습을 해보는 학생이었다. 정말 초보중 초보, 5줄 이상 쓸 수 없었다. 마음을 먹었고 지속하기 위해 루틴을 이용했다. 루틴에 가장 중요한 것은 시간이다. 어느 시간에 할 것인가를 정할 때도 기준이 있다. 반드시 짝짓기를 한다. 밥 먹으면 양치하는 것과 같이 출근하면 쓰기 시작한다는 규칙을 뒀다. 처음에는 물론 너무 어색하다. 졸업 후 직장을 다니며 글 쓸 일이 없었다. 글을 전혀 쓰지 않다가 독서가 데려다준 길 끝에서 처음 하는 시도였다. 그것도 주어진 주제에 글을 쓴다는 것은 겨우 한 줄도 결심이 필요했다.


어떤 일이든 힘이 들어가면 지속하기 힘들다. 이때는 크고 부담스러운 마음을 덜어줘야 한다. 지킬 수 있는 최소의 결과물을 설정해 준다. 다음으로 할 일은 강제적인 일로 만들어주는 것이다. 어디에든 선언을 한다. "나는 오늘부터 글을 쓰기로 한 사람이다."라는 느낌을 스스로에게 줄 수 있는 것이라면 그 무엇도 좋다. 나는 매일 써서 글을 단체 채팅창에 올리는 사람이 되기로 했다. 아무도 확인하는 사람이 없다. 안 했다고 체크할 사람도 없다. 하지만 스스로 안다.


이렇게 개인의 과제를 해결해 가면 많은 부분 해결이 된다. 개인의 문제는 혼자의 기준을 잘 지키면 성취는 자동으로 어느 정도 따라온다. 하지만 사람은 혼자서 살 수 없다. 태어나면서부터 이미 가족이 존재하고 크던 작던 공동체에 속해 살아간다. 개인 삶의 기준과 달리 공동체적 기준은 때로는 불합리하고 때로는 전체를 위한 희생을 강요받기도 한다.


삼 남매 중 첫째, K장녀인 엄마 슬하에 완벽한 K장녀로 자랐다. K장녀에게 부여된 가정 내에서의 불합리한 기준이 있다. 그게 불합리한 기준인지도 원가족을 떠나오기 전에는 몰랐다. 친정의 기준에 의하면 12살 차이 나는 나이 어린 남동생과 결혼을 안 한 여동생은 집안의 모든 일에서 열외 되었다. 집안일에 경제적인 책임을 혼자 지는 것은 그럴 수 있어서 감사한 다치고, 물리적인 행동이 포함된 일에서부터 심리적인 부담까지 부모님은 내게만 의존하신다. 내게 기대거나 두 분이 감당하셔야 한다고 생각하신다.


이제는 내가 부모님의 보호자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은 하고 있지만 좀 이기적으로 이야기하자면 딸을 다 키우자마자 부모의 보호자로 다시 끌려들어 가는 느낌이다. 거기에 더해 부모님은 내가 동생들의 보호자가 되어야 한다고는 생각하신다. 불합리라고 갈아엎어버릴 수가 없다. 부모님의 건강도 불안한 이런 시점에서 내가 취할 수 있는 행동은 제한적이다. 고작 내가 딸에게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마음의 짐이 대물림 되지 않도록 조심하는 것뿐이다.


내가 바꿀 수 있을지는 불투명하지만 부모님을 진심으로 위하고 동생들을 마음으로 보살필수 있기 위한 가족 안에서의 기준을 말이나 해보자. 우선 부모님은 자식에 대한 사랑과 기대는 비슷한 정도로 표현이 되어야 한다. 사랑과 기대를 각각 다른 사람에게 준다는 것 자체가 불합리다. 부모님께서 동의할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사랑보다 기대를 받으며 자랐다. 동생들은 집안일과 부모님 부양의 의무에서 벗어나있는 사람들처럼 행동했고 그래도 부모님께서는 상관이 없었다. 하지만 이제부터는 적게라도 자식도리로 해야 하는 일에 일정 부분 의무를 줘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부모님과 동생들의 동의도 필요하다. 희망이지만 내가 가져야 하는 가족으로서의 의무는 60%의 경제적 책임과 1/3의 심리적 책임이 적절하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된다면 남는 자리를 부담이 아니라 사랑으로 채울 수 있을 것 같다. 이런 기준조차도 나에서 끝나야 한다. 기대는 아이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 내 아이에게는 기대 대신 응원과 사랑만 남겨본다.


가끔은 아무런 기준 없는 세상에서 살면 구조의 제한 없이 자유로울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하지만 실제 그런 상황이 온다면 일정 규칙 없는 매일이 다른 일상은 자유보다는 불안해진다. 보통 우리는 어느 정도라도 정해진사회의 기준 안에서 편안함을 느낀다. 그 안정된 사회의 기준 속에서 개인의 삶에도 기준을 만들어간다. 그런 일상의 일관성은 삶의 안정감을 느끼게 해 준다. 새로운 일을 시작하거나 이사를 가면 설렘과 동시에 일상 전체에 불안이 존재한다. 그 어떤 행위도 단 한 번이라도 선례가 생겨야 불안이 줄어든다. 모든 일에 머리를 쓰면서 살아갈 수는 없다. 따라서 일정 기준은 우리의 삶을 오히려 편안하게 해 준다.


하지만 그 기준은 기대에 맞게, 적절하게, 공평하게 긍정적인 방향으로 변화를 거듭해야 한다. 세상의 모든 것이 바뀌는데 확고부동의 기준은 "사람이 존엄하다."는 정도로 족하다. 그래야만 기준으로의 역할을 다할 수 있고 개인과 단체를 모두 행복하게 함께 살아갈 수 있게 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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