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세상의 절반은 굶주리는가 - 키워드 : 고통
오른쪽 손가락을 삐었다. 골절도 아니고 베인 것도 아니다. 잠깐의 욕심으로 손가락이 희생당했다. 재활용 쓰레기를 언제나 버릴 수 있는 아파트에 살면서도 일주일에 한 번 쓰레기 버리러 가는 날은 왜 그렇게 빨리 돌아오는지 모르겠다. 최대한 미루더라도 일주일이 한계다. 배달음식에 봄맞이 집정리까지 해서 평소보다 2배 정도 쓰레기가 많이 나왔다. 어떻게 해서든 한 번에 가려고 욕심내며 재활용 쓰레기장으로 향했다. 90리터 대형 봉투에 담긴 쓰레기를 한 손에 두 개씩 들고 슬리퍼를 끌고 현관을 나왔다. 엘리베이터 1층에서부터 결승점까지는 대략 100미터쯤 된다. 평소 헬스장에서 키운 근육의 힘을 빌려 어깨 높이까지 바짝 들고 레이스를 시작했다. 50미터에서 신호가 왔다. 손가락이 원래는 움직일 수 없는 방향으로 굽혀졌다. 질 수 없다는 생각에 이번에는 발걸음을 재촉해 본다. 잠시 쉬고 내렸다 가면 시간이 길어질 터였다. 마침내 견뎌냈다. 쓰레기를 처리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엘리베이터에 들어가 버튼을 누르는데 윽! 오른손 두 번째 손가락, 두 번째 마디에 통증이 왔다.
이후 손을 꽉 질 수도 없고 종일 욱신거리는 통증이 계속된다. 생명에 아무런 지장이 없는 이런 작은 고통에도 일상의 웃음이 사라졌다. 잠깐의 귀차니즘과 욕심 때문에 앞으로 몇 주는 고생할 통증이 남았다. 갑자기 내가 내 몸을 소모품 다루듯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디 하나 교체할 수도 없으면서...
매일 병원으로 출근하는 직업인으로 일로 만나는 사람들은 늘 아프다. 대부분 나이가 있으신 경우가 많아서 고칠 수 없는, 평생 조절해 가면서 살아야 하는 지병을 갖고 있는 경우가 많다. 상담 시간이 되면 그들은 약을 먹는 고충부터 병의 경과나 합병증, 쇠약해져 가는 체력에 대한 불안을 호소한다. 그래도 그걸 들어주고 안심시키거나 치료를 받을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게 내 직업이라서 늘 똑같은 말을 해야 하지만 친절히 대하려고 노력한다. 객관적으로 그들의 힘듦은 내 손가락보다 훨씬 고통스럽고 치료된다는 희망 없도 가질 수 없다. 그들을 겉으로 이해하는 척만 공감메시지를 건네본다.
그나마 이런 공감을 해줄 수 없는 한 명이 있다. 바로 아버지다. 건강염려증이 있어 늘 온 가족이 아버지의 건강을 걱정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분이다. 일주일에 4~5번 전화하는데 하루도 건강상 괜찮은 날이 없다. 친정 엄마가 어디가 아프다고 하면 아버지 본인이 더 아프다고 말씀하시는 분이다. 언젠가부터 들어주는 것도 힘들어졌다. 병원 환자에게 보다 더 냉담하고 딱딱하게 병원 가시라고 처방을 냈던 것 같다. 엄마를 힘들게 한다고 생각돼서 더 그랬다.
한발 떨어져 객관적으로 생각하니 얼마나 외로웠을까 싶다. 기댈 곳이 이제 가족밖에 없고, 그 안에서 사랑을 갈구하는 모습을 안타깝게 생각하고 잘 받아주지 못하는 내가 못나 보인다. 이제 와서 생각하니 아직은 내가 아버지의 보호자가 될 마음의 준비가 덜되어서 이런 게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어쨌건 나는 이기적이다. 내 손가락 다친 게 가장 아프다. 다수의 고통도 공감하는 척 흉내만 내고 내 아버지의 고통에는 짜증이 난다. 문득 나는 세상사람들도 내 부모도 나 자신도 진심으로 사랑하지 않고 살아간다는 생각이 든다. 역시 문제는 나다. 나조차도 보듬으며 살지 못하니 모두가 나를 괴롭히려는 것만 같이 느껴졌다.
내 삶은 평탄하지 않았다. 일상에도 쉴 새 없이 힘듦이 묻어있다. 사실 모두가 그렇다. 쇼펜하우어는 삶은 고통이라고 말했다. 우리는 각자의 고통을 감당하며 살고 있다. 고통이 삶의 기본값이라 생각하니 내 고통에 대한 아픔도 관조할 여유가 생긴다. 그리고 비슷하고도 다른 고통을 안고 살아가는 이름 모를 이들에게 연민의 마음이 든다. 나는 고작 손가락한마디가 아프다고 며칠을 징징거리지만 내 곁에는, 나라 곳곳에는, 지구상에는 드물지 않게 다양한 고통으로 생명의 위협을 느끼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 특별한 잘못 없이 안고 태어난 환경의 불평등으로 인간답게 살지 못하는 이들이 세상에 있다는 건, 특별한 이유 없이 비교적 윤택한 상황에서 나고 자란 우리의 부채일지도 모르겠다.
내 손가락도 어찌하지 못하는 나는 그들을 위해 기도하고, 아버지께 전화나 한번 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