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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hloe J Oct 17. 2024

천천히 가라

나는 슈퍼 J이다. 

계획 세우기는 원래 내 취미였다. 계획에 있어서 작심삼일은 당연한 일이다. 인생은 우연의 연속이니 계획이 달라지는 것은 필연적이다. 계획이 달라지면 신난다. 또 계획을 세우면 되니까. 학창 시절에는 친구들의 시험 계획까지 세워주며 계획 내공을 키우곤 했다.


성인이 된 후에도 계획 세우기는 여전히 좋아했다. 하지만 이제는 실행력까지 갖추게 되었다. 성장감을 느낀 이후에 찾아온 변화다. 공부 커뮤니티에서 진짜 내가 하고 싶은 공부를 하며 늦은 나이에 성장을 실감하고 있다. 남들이 좋다고 하는 것들을 무작정 따라 하던 시기를 벗어나, 진정으로 내가 하고 싶은 큰 목표를 세우고 매일 작은 결과들을 쌓아가고 있다. 이 과정에서 내 계획들은 점점 탄탄해졌다. 어느 정도 성과도 나왔다고 할 수 있다. 2개의 강의를 찍고, 5권의 전자책을 출간했다.


작가가 되고 싶었던 나에게 출판사와의 기획 출판 계약은 꿈같은 일이었다. 계획은 내 마음대로 세우고 열심히 실행할 수 있는 문제였다. 하지만 기회라는 것은 계획과는 무관해 보였다. 아무리 노력해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매일 글을 쓰고, 모임을 꾸리며 나누는 과정은 그저 취미생활 같았다. 앞으로도 아무 일도 생기지 않을 것 같던 그때, 우연히 기회가 찾아왔다. 출판사와 '마인드맵 실전편'에 대한 기획 출판 계약을 하게 된 것이다.


계약을 하던 날, 약속 장소에 한 시간 일찍 도착했다. 시원한 에어컨 바람 아래 잠시 계약 관련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긴장한 나머지 양쪽 겨드랑이가 축축해질 정도로 땀이 흘렀다. 계약도 했고, 계약금도 받았다. 이제 집필만 하면 된다. 집에 돌아오자마자 계획을 짰다. 목차에서 절의 수를 세고, 특별한 일정을 고려해 집필 8주, 탈고 2주로 10주 동안의 최선의 계획을 세웠다.


직장인에 가정주부였으니 원래 해야 할 일도 있고, 꿈같은 새로 주어진 집필도 해야 했다. 하루에 가능한 시간을 분배해 J 특유의 계획을 세웠다. 이런 면에서 나는 메타 인지가 뛰어난 편이라 자신도 있었다. 3주차까지는 아무 문제가 없었다. 하지만 3주차에 허리를 다쳤다. 큰 사고는 아니었고, 진단도 심하지 않은 디스크였다. 그래도 의자에 앉아 있는 것이 힘들었다. 나는 중요한 일의 우선순위를 조정해 계획을 줄여가며 멈추지 않고 진행했다.


계획은 장대했다. 집필 8주 중 이제 6주차에 접어들었다. 매일 글을 쓰고 있는가? 물론이다. 매일 분량은 늘어가고 있고, 이미 100장을 넘겼다. 그러나 문제가 있었다. 건강이 걸림돌이 되었다. 정형외과에 며칠 다닌 후 한결 나아졌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통증이 찾아왔다. 약해진 허리는 다시 다칠 수 있었지만 중요한 할 일이 있으니 마쳐야 한다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내 몸을 소중히 여기지 않았다. 몸을 보듬고 보살펴야 한다는 인식이 부족했다. 통증은 진통제로 가리고, 할 일을 하는 것이 늘 우선이었다. 몸이 보내는 신호를 무시하자 마음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의욕도 줄어들고, 입맛도 사라졌다. 내가 얼마나 바라던 일이었는지를 의심하는 자신을 발견했다. 아무리 중요한 일이라도 몸이 건강하지 않으면 한 발짝도 나아갈 수 없다는 사실을 실감했다.


겨우 스케줄에 맞춰 글을 쓰다 보니 마음은 가라앉고, 다른 사람들만 보였다.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는 듯 보이는 나와 달리 성장하는 주변 사람들을 보며 자책하는 나를 발견했다. 나는 이미 잘하고 있었고, 최선을 다하고 있었다. 그러나 회복이 필요한 시점에서도 머리는 감정에 휘둘려 내 몸을 몰아세웠다. 지금까지의 내 성장은 반성과 자책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래서 기쁨과 행복보다는 늘 부족함과 조급함이 앞섰다.


몸이 따라주지 않는 상황에서 마감을 맞추고 있는 나를 바라보니 스스로가 안쓰러웠다. 이번 주말, 토요일부터 3일 동안 모든 계획을 비웠다. 머리가 세운 계획들은 주로 지식을 담고 글로 쏟아내는 것이었다. 처음으로 가슴에게, 몸에게 무엇을 하고 싶은지 물어봤다. 살아있음을 느끼고 싶었다. 계절을 느끼고, 이 순간 주어진 질문에 천천히 시간을 보내고 싶었다. 나에게 선물 같은 시간을 주고자 한다. 책 한 권 들고 카페에서 한 시간 동안 책을 읽더라도, 이제는 머리가 정한 할 일에서 벗어나 본질적인 것 이외의 목적이 없는 단순한 시간을 계획해 본다. 천천히, 몸을 위한 시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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