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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웰컴 키즈 존

어린이라는 세계 - 키워드 : 어린이

by Chloe J

며칠 전 남편의 고등학교 동창 송년회 모임이 있었다. 이제 다들 결혼하고도 한참이 지났을 뿐만 아니라 어느 정도의 생활적 안정도 된 나이라 바쁘지만 고등학생 때를 추억하며 한자리에 모였다. 5명이 한자리에 모이고 졸업한 지 20년이 넘었지만 그들은 고등학생처럼 논다고 들었다. 그 시절의 수다를 떨고 게임을 하고 달라진 게 있다면 조금 떨어진 체력이란다. 5명 모두는 결혼했고 배우자까지 10명인 이들 가족의 수를 모두 합하면 12명이다. 현재 우리 집에 한 명, 다른 한 친구 집에 한 명의 아이가 있다. 나머지 3명 중 한 명은 난임으로 노력 중이고 나머지 2명은 딩크족이다. 딩크족은 정상적인 부부생활을 영위하면서도 의도적으로 자녀를 두지 않는 맞벌이 부부를 의미한다.(네이버 지식백과) 인구 절벽을 실감하는 순간이다. 이 모임을 표준으로 둘 수는 없지만 이대로 가다가는 인구가 절반으로 떨어지는 데는 몇 세대 걸리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인구 절벽 같은 사회와 개인적인 문제가 얽혀있는 사안은 수많은 원인들이 서로 어깨에 손을 얹고 서로의 해결을 더 힘들게 만들곤 한다. 이속에는 어린이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가 존재한다.


어린이들이 당면한 문제부터 생각해 보도록 하자. 수가 줄어들어 더없이 소중해진 지금, 어린이들은 행복할까? 2020 유엔아동기금에서 발표한 '리포트 카드 16'에서는 경제 선진국의 신체, 건강, 학습 등을 분석한 어린이 웰빙 지수를 발표했다. 한국은 21위로 전체 38개국 중 중간 정도를 차지했다. 숫자의 감을 찾아보기 위해 경제수준을 한번 살펴보면 한국은 GDP 10위까지를 기록했고, 23년 경제전망 지수에서 13위를 기록한 경제적으로 잘 사는 나라다. 그런데 비하면 행복도 21위는 높지 않은 순위다. 물론 나라의 경제적 능력과 어린이의 행복도는 다른 나라들에서도 많은 차이를 보였다. 특히 일본의 경우는 꼴찌에서 2등을 차지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여러 기준 들 중 '어린이의 삶에 대한 만족'에 있어서 한국은 29위로 소위 잘 사는 영국, 일본과 함께 최하위 군에 속했다.


그런 현상은 어렴풋하게나마 지금 흔한 어린이들의 모습으로 상상해 볼 수 있다. 어린 시절에 나는 어린이라는 세계가 있었다. 동네 친구들과의 숨바꼭질에서 절대 들키지 않을 전략을 구상하고 고무줄놀이를 잘하는 방법을 떠올렸다. 어떻게 하면 돌을 정확하게 내가 던지고 싶은 자리에 던져 사방치기를 잘할 수 있을지 생각해 보기도 했다. 남자친구들은 옆구리에 상자째로 딱지를 가져 다니며 자기만의 스킬을 구사하고 나름의 연마를 했다. 지우개 따먹기, 구슬치기... 어린이들만의 특권, 몰두할 수 있는 놀이들이 사방에 널려 있었다. 그런 곳에 몰두하면서 작지만 살벌한 그들만의 리그에서 친구를 만들고 성공의 경험을 쌓아갔다.


지금보다 무엇 하나 풍족한 게 없던 시절 시간만은 넘쳤다. 할 일이 없어서 친구들과 삼삼오오 모여 바닥에 금을 긋고 놀이를 만들어냈다. 지금 아이들은 할 일이 많다. 숙제도 많다. 할 수 있는 재미있는 것도 많고 자극적인 볼거리도 많다. 그래서 자기 속으로 들어갈 수가 없다. 궁리하며 즐길 거리를 만들어낼 필요가 없다. 노래를 흥얼거리며 자기만의 꿈을 키울 시간도, 여유도 없다.


지금의 어린이들에게는 어린이라는 세계가 없다. 마치 성인이 되기 전의 모든 단계가 탁월하고 능력 있는 성인, 즉 값이 나가는 어른을 만드는 준비작업인 양 모두 학원으로 몰아넣었다. 우리 집 어린이는 공부 학원을 다니지 않는다. 그래서 친구 섭외가 평일은 불가능하고 주말도 어렵다. 어렵사리 섭외해도 엄마의 통제 전화에 늘 아쉬움을 남긴 채 헤어져야 했다. 자기들끼리 속닥속닥 어른들이 보기에는 쓸데없는 짓을 한다. 노래를 편집하고 춤을 짜서 영상을 찍는다. 보여주기 싫어하는데 100% 응원과 칭찬만 하다 보면 가끔 보여주는 연기영상도 있다. 무서운 이야기라며 한 명이 내레이터로 스토리를 말하고 한 명은 연기를 한다. 퀄리티는 몰라도 내용의 창의성은 아이들을 따라갈 수가 없다. 그러다가 어른들은 있는지도 모르는 공모전에 영상을 출품하기도 했다. 물론 상을 받거나 채택이 되지는 못했다. 하지만 이게 진짜 공부는 아닐까? 좋아하는 것과 그것으로 사회를 만나보는 것. 그 아이들이 그들만의 세계에서 만드는 우정과 기쁨과 성취라는 경험의 기회를 빼앗아 어른들은 자신들의 잣대로 '지금은 공부할 때'라고 밀어 넣고 있다. 그래서 어린이들은 행복할까? 행복한 어른이 될 수 있을까?


엄마가 공부 안 한 아쉬움이 있으면 아이에게 시킬 게 아니라 엄마가 공부를 했으면 좋겠다. 우리가 살아갈 세상과 아이들이 살아갈 세상은 다르다. 남편이 가끔 하는 말이 있다. "예전에 엄마가 게임하면 돈이 나오니 떡이 나오니? 했는데 게임하면 돈도 떡도 다 나오고 올림픽 금메달도 딸 수 있어.." 내 부모는 우리가 사회생활할 때를 예상할 수 없었다. 그것처럼 우리는 아이들의 세상을 예측할 수 없다. 이전에 어느 책에서 사람은 자신의 20세를 기준으로 세상을 본다고 했다. 40년이나 후진 생각으로 아이의 앞날을 판단하는 잘못을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어린이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도 인구 절벽뿐만 아니라 어린이와 함께 사는 세상을 만드는 데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친다. 어린이는 모든 일에 미숙하다. 때로 그래서 그 모습이 귀여워 보인다. 그래서 우리는 처음 시작하는 미숙한 상태를 'O린이'라는 귀여운 듯, 비하인 듯 애매한 말을 사용한다. 남들이 다 쓰는 저런 말을 한철의 유행처럼 별생각 없이 따라 했었던 적이 있었다. 대중매체에서도 당연하게 사용해서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지 못했다. 유행과 같았던 말들은 기름을 부은 불처럼 타올랐다가 사그라들고 재미 들인 양 사라지지 않고 비슷한 다른 말로 옮겨갔다.


주린이, 골린이, 헬린이, 요린이... 이런 말속에는 어린이, '린이'라는 말은 귀엽고 아직은 미숙함을 가지고 있는 보호 받아야 할 대상이면서도 그들이 가진 특징인 부족함을 벗어나야 할 상태로 느껴지게 한다. 이 말이 차별이냐, 아니냐를 두고는 입장의 차이가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어린이를 미숙함으로 구분 짓는 것 자체가 하나의 구성원으로서 어린이를 인식한다기 보다 미완성의 존재로 부모인 어른에 보호받는 종속적 의미로 생각하는 것이다. 여기에는 사회적 환대가 빠져있다.


좀 더 불편한 사회현상도 생겼다. 그로 인해 직접적인 피해자가 된 적도 있었다. "노키즈존, 8세 미만은 정중하게 거절합니다."라는 노골적으로 정중하지 않은 팻말에 발길을 돌려야 했다. 분명 피해자였으나 가해자가 된 듯한 기분을 느끼며... 하지만 이런 일들이 나와 상관이 없어지면서 또 나는 더 큰 무리에 은근슬쩍 껴 이기적인 쾌적함을 누리려 했다. 아마도 많은 사람들이 사용해서 대세이고 그래서 맞는 말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익숙함에 옳고 그름의 비판하지 않고 문화라며 받아들였다. 그런 무의식적으로 참여한 어린이의 배제로 인해 특별한 이유 없이 당사자를 제외한 모든 이에게 함께 살고 있으나 함께하기 불편하다는 부정적인 시선을 만들어줬다. 아이와 엄마들은 마치 사회에 잘못이라도 저지른 양 수치심이 들었다.


아이는 자란다. 당사자들은 '키즈'를 벗어나고 사회적 배제에서 상관없는 사람이 되며 다시 가해자들이 만들어준 억울했던 쾌적함을 맞본다. 이제는 어려운 관문을 넘어온 훈장이라도 되는 것처럼 그냥 누린다. 다름 아닌 나의 이야기다. 그때는 불편하고 억울했다. 하지만 내가 봐도 아이들을 방치하는 부모들에 의해 '재수 없게' 이런 게 생겼다고 생각했다. 아이를 데리고 가는 게 민폐였고 대놓고 당당할 수 없었다. 늘 비교적 얌전한 아이라 다행이라는 생각을 했었고 음식점에라도 가면 쏟거나 흘리지 않게 하려고 아이를 다그치며 눈치 봐야 했었다.


어린이를 대상화하고 구분하는 이런 것 모두가 그것이 어디에서 왔던 어린이에 대한 타자화로 몰고 간다. 어린이는 미완성의 존재, 성인이라는 완성으로 가는 과정일 뿐, 존중의 대상에서 한발 더 멀리 떨어져 있는 듯 보였다. 또 이런 대상화는 아무런 생각이 없던 사람에게까지 어린이는 우리와 다르며 혐오할 대상이라고 암시한다. 모든 일에는 원인이 있고, 한쪽이 무조건 맞는 일이란 없다. 기가 막힐 정도로 난리 법석인 아이도 있고 도무지가 자녀를 사회 속에 어우러져 사는 사람으로 만들고 싶어 하는 것 같지 않은 부모도 많았다. 그래도 그런 사람들에게 들이밀어야 하는 것이 사회적 따돌림은 아니어야 한다.


이번 글을 쓰기 위해 노키즈존을 검색했더니 "노ㅇㅇ존"이 수도 없이 나왔다. 나도 포함될법한 것으로는 노튜버존, 노중년존, 노스터디존이 있었고 노탕후루존에 노시니어존도 있었다. 이런 걸 만든 그들은, 어쩌면 우리는 혼자 살아갈 생각을 하는가 보다. 이 수많은 no에 포함되지 않는 사람이 있을까? 세상에 경제적, 성과적으로 도움이 되는 세대, 아무 곳에도 민폐가 아닌 자만 당당하게 살아갈 수 있는 사회에 미래가 있을까? 우리는 태어나 십수 년을 누군가의 양육으로 이렇게 자랐다. 그리고 우리는 다시 한번 누군가의 손이 필요한 시기를 분명 만나게 된다. 우리는 어린이였을 때도 나이가 들어가도 가치 있는 존재다. 그리고 그 존재적인 가치는 서로가 서로에게 부여하고 지켜줄 때 온전할 수 있다.


어린이와 함께 사는 세상을 위해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어린이들은 곧 사회인이 된다. 그때까지 우리는 어린이들이 우리와 함께 행복하게 잘 지낼 수 있도록 보호하고 바른길을 안내해 줘야 한다. 우선 우리 집에 있는 어린이에게 어른으로 할 수 있는 일에 대해 생각해 본다. 부모는 자식과 동일시하게 마련이다. 자식의 기쁨은 나의 기쁨이고 자식의 실패는 나의 실패로 느끼며 두려워한다. 그래서 아이들을 좁은 울타리에 가두고 하나의 목표를 향해가길 재촉한다. 물론 아이를 위한 시작이었다. 하지만 제일 큰 게 빠져있다. 아이의 주체성과 바램이 없다. 주체성과 바램을 가질 생각할 틈도 주지 않는다. 그야말로 다람쥐 쳇바퀴 속에서 정신없이, 자기 속도에 지쳐 나가떨어질 때까지 달려야 한다. 아이에게 시간을 주자. 자신을 관찰하며 생각이 자라날 시간, 그들의 과업인 놀이를 통해서 또래들과 함께 사는 방법을 배울 시간, 이것저것 해보며 실패하고 넘어져 자기를 찾아갈 시간이 어린이에게 필요하다.


아무리 잘났다고 해도 우리는 혼자서 살아갈 수 없다. 또래를 넘어 사회 속에 함께 사는 법은 부모가 먼저 가르쳐야 한다. 공공장소에서의 규칙이나 우리 사회에서 지켜야 할 기본적인 예절, 타인을 위한 배려에 대한 개념은 함께하는 사회에서 선택이 아닌 필수다. 그리고 이런 가르침의 시작은 바로 부모가 되어야 자연스럽다. 기본을 지킬 줄 아는 어린이는 다른 세대와 유기적으로 소통할 줄 아는 어른으로 자란다.


다음은 남의 집 어린이에 대한 우리의 인식 전환이 필요하다. 언젠가 우리가 감각의 퇴화로 느릿느릿 해질 때 지금의 어린이들 배려 덕분에 삶을 온전히 영위할 날이 올지도 모른다. 지금은 그들이 당당히 배려 받는 중이다. 배려 받아본 사람이 배려할 줄도 안다. 어린이라 몰라서 실수할 때 기다려줄 수 있는 어른이 되어주는 건 어떨까? 선을 긋고 몰아내는 게 아니라 그들에게 사회적인 경험에서 성인과의 긍정적인 상호작용을 쌓을 기회가 필요하다. 그러기 위해 기본적으로 어린이 전부를 향해 환대할 마음의 준비를 해보자. 내 자리를 조금 비켜 그들의 자리를 확보해 주는 것, 무조건적인 환대를 보여주고 사라져만 가는 어린이들의 영토를 지켜주는 것은 우리가 해야 할 일이다. 미룰 수도, 대신해 줄 사람도 없다.


훨씬 더 많이 누리고 사는 요즘의 아이들은 기본적인 권리를 빼앗겼다. 신선한 공기와 뛰어놀 공간. 다른 건 몰라도 우리 모두는 이현상의 공범이다. 우리 주변에 사라지고 있는 어린이들에게 그들이 놀 자리, 배울 자리, 환대 받을 자리를 마련해 본다.


어제 엘리베이터를 막 타려 하는데 현관 자동문이 닫히며 미처 들어오지 못한 초등학생이 이미 함께 가기를 포기한 채 서 있었다. 현관 자동문을 열어 어린이와 함께 엘리베이터에 탔다. 평소의 내가 할 수 있는 어린이에 대한 배려는 여기까지였다. 그때 어린이가 "죄송합니다."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내가 열어준 문, 생각하지 못한 작은 배려가 미안했던 듯 보였다. 미안할 필요 없는 거라고 겨울이라 어두운데 씩씩하다고 한마디 하며 자전거가 멋져 보인다고 했더니 모르는 아줌마에게 자전거 자랑을 한참 했다. 진지하게 감탄하며 듣다 엘리베이터가 도착했고 우리는 마주 보며 "안녕히 가세요."인사했다.


묘하게 기분이 좋았다. 어린이와의 일대일 대화로 마치 좋은 동네 아줌마가 된 것 같은 기분이 들면서 어린 시절 어른들의 대화에 끼지 못한 궁금함과 서운함이 문득 떠올랐다. 이렇게 하나씩 서로를 알아가고 인정해간다면 나중에 나보다 키가 클 저 어린이와 함께 살아갈 미래는 보다 희망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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