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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최고의 사랑

어린이라는 세계 - 키워드 : 사랑

by Chloe J

태어나고 보니 나였다. 세상은 나를 중심으로 움직였다. 나와 엄마, 아빠밖에 모르던 시절, 특별한 이유 없이 자신을 사랑했다. 사랑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그때 만날 수 있던 가족이라는 사람들은 나만 보면 웃었고, 좋아했고, 사랑한다고 말해줬다. 유치원이라는 곳에 가서도 나는 사랑받았다. 다른 친구들보다 뭐든 잘하는 나를 부모님은 좋아했고, 그런 나를 보며 웃었고, 사랑한다고 말했다. 학교라는 곳에 가며 다른 사람이 되었다. 나는 그대로였는데 평가 기준이 달라졌다. 사랑할 이유가 있어야 사랑받게 됨을 알게 되었다. 사랑받을 이유가 없어서 더 이상 사랑할 수 없었다. 나 자신에 대한 사랑. 성적이 전부인 학창 시절을 지나며 성적으로 사랑받지 못함을 인정하게 되었다. 사춘기의 저주로 외모로도 사랑받을 수 없다는 사실을 인지하면서 내 속의 공주는 죽었다. 누군가를 끊임없이 질투하고, 동경하고, 부러워했다.


사랑받을 존재가 되지 못한다는 스스로의 열등감에 빠져있었다. 이럴 때 누군가의 사랑 고백은 나를 목 메게 했다. 그에게 잘 보이기 위해, 인정받기 위해, 계속 사랑받기 위해 지속할 수 없는 노력을 했다. 사랑받고 있었으나 버림받을게 두려웠다. 나를 한없이 약하고 매달리는 존재가 되게 했다. 만났던 몇 명을 나쁜 남자로 만들었고, 스스로는 핍박받은 존재, 약자 역할로 젊은 시절의 연애 과정을 소모했다.


몇 번의 사랑을 하고 남편을 만났다. 나는 남편의 첫사랑이다. 사랑에도 권력이 있다. 나는 그때까지 늘 지배받는 쪽이었다. 하지만 경험자와 무경험자 사이의 사랑에서 확실히 경험이 유리했다. 나는 권력자였다. 전에는 한 번도 그래본 적이 없는 태도로 사랑을 대했다. 내가 먹고 싶은 것만 먹었고, 내가 보고 싶을 때만 만날 수 있었다. 그렇다고 사랑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권력관계를 맞봐버려서 놓기 싫었다고나 할까? 화나도 참던 과거와 달리 감정도, 말도 거르지 않았다. 기다리고, 참고, 달래던 내가 기다리지도, 참지도, 달래지도 않았다.

'이러다 헤어지겠지...' 4살 연하남이어서 미래를 함께 꿈꾸기 힘들다고 생각했을지도... 약간 남녀 간의 사랑에 대한 허무감에 빠져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어쩌다 보니 결혼해버렸다. 이런.. 이미지를 다시 세팅할 수도 없고, 남편은 불필요할 만큼 기억력이 좋았다. 그래서 속죄하는 마음으로 지금도 맞춰주며 산다. 남편이 딸에게 가끔 말한다. "너네 엄마 진짜 착해졌어.."


이후 운명의 사랑을 만났다. 정말 내 인생을 다 주어도 아깝지 않을 사랑이었다. 그도 온몸으로 매일 쉬지 않고 사랑을 표현했다. 그는 좋은 것만 보면 나에게 주고 싶어 하고, 함께할 수만 있다면 어디라도 같이하길 원했다. 가끔 사이가 안 좋기도 했지만 전부 내가 원인이었다. 화해도 내가 손만 내밀면 금방 아무 일도 없었던 듯 그는 이해해 줬다.


그런 운명의 사랑에게서 요즘 이상한 기운이 감돈다. 우리가 사랑에 빠지고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가끔씩 투닥거렸을 때를 제외하고 우리는 늘 붙어 있었다. 하루에도 수도 없이 서로를 향한 사랑고백에 원래 한 몸이었던 것처럼 서로에게 없어서는 안되는 존재였다. 교집합이라기 보다 포함관계 같은 사이. 나는 신경 쓸게 너무 여러 가지였고 그는 오직 나만 바라봤다. 그는 나만 괜찮으면 됐다. 나에게 속해 있었다.


처음부터 죽고 못 사는 사이였던 것은 아니다. 첫 만남, 첫 호칭이 얼마나 어색하던지... 약속처럼 나만 부를 수 있는 애칭이 생겼고 서로에게 익숙해지는 시간을 가졌다. 나는 이런저런 경험이 더 많아 그나마 빨리 적응했지만 그는 모든 게 서툴렀고 천천히 익숙해졌다. 그래도 그게 사랑임을 의심할 수 없었다. 다른 사람에게 한 조각도 나눠주지 않은 온전한 사랑을 받았다.


너무 가까운 사랑이 늘 좋기만 했던 건 아니었다. 그와의 사랑에 존재하는 권력을 처음에는 내가 쥐고 있는 듯 보였다. 그는 너무나 투명해서 나의 모든 것을 비추고 있었다. 상처 줄까 봐 나의 모나게 삐져나오는 성질을 감추려 해봤지만 나만 바라보는 그에게 숨기기는 힘들었다. 이따금 내 기분으로 인해 사랑의 크기가 컸던 그의 마음이 슬퍼졌다. 그 모습을 보는 내 마음도 힘들었다. 투명한 마음에 어두운 빛이 물들까 자괴감이 들었다.


이제 더 익숙해질게 없을 만큼 서로의 마음을 말없이도 꿰뚫은 것 같던 때, 그에게 나 아닌 다른 관심이 자라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나 아닌 다른 이와 소통하고 싶어 하고, 내가 함께할 수 없는 무언가를 하고 싶어 했다. 한시도 곁에서 떨어지면 힘들어하던 그는 생사확인만 되면 하루 정도는 아무렇지 않게 각자 생활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어느 정도 바랬던 바이지만 이런 식으로 예상하지 못한 사이 생각보다 빨리 밀려들지 몰랐다.

그는 미안해한다. 그도 알고 있었다. 나를 사랑하긴 하지만 또 다른 사랑이 생겼다고 말만 못 할 뿐이다. 나에게도 선택의 여지는 없다. 돌이킬 수 없는 화학작용으로 그는 내에서 성큼 물러섰다. 이제 권력은 그가 가졌다. 나는 지금 이 자리에서 바라볼밖에... 가끔 손 내밀 때 감사하며 받아들여야 할 뿐이다. 그는 사춘기 소녀의 상큼함으로 엄마를 등지고 세상을 바라보고 있다.


소모적이고 자기 파괴적이었던 남녀 간의 사랑을 건너, 희생적이고 집착이었던 모녀의 사랑을 지나왔다. 젊고 예뻤던 나이의 나는 나를 사랑해 주지 못했다. 지금 와 거울 속 어느 때보다 예쁘지도 명석하지도 않는 내가 있었다.


자기 역사 쓰기를 하기 위해 들렀던 친정에서 나를 만났다. 7살 그림일기를 시작으로 초등학교 5학년 때까지 썼던 일기를 엄마는 보물 인양 꺼내 넘겨주셨다. 손때가 묻고 커피라도 쏟은 듯한 세월의 색깔로 물들어가던 공책 일기장 20권. 스스로 자진해서 썼던 일기는 아니었다. 부모님의 강요에 쓰기 시작했고 선생님의 부지런함에 숙제 차원에서 채워가던 짜증 나는 의무였지만 그 속에는 그때는 몰랐던 귀엽고 사랑스러운 내가 고스란히 있었다. 시인이 장래희망도 아니면서 일기를 덜 쓰고 때워 볼 목적으로 시를 그렇게나 써댔다. 그땐 참 내 머릿속에서 일어나는 잔꾀들을 아무도 모를 것 같았는데, 어른이 되고 보니 엄마 말처럼 "다 보인다."


30년 전의 내가 느끼고 행동했던 추억들이 귀엽고 안쓰럽게 느껴진다. 친구와의 투닥거림, 동생과의 다툼, 월말고사에서 번호 잘못 쓴 것까지... 그땐 참 그게 세상의 전부였는데 지금 와 돌아보니 세상이 무너질 듯 속상해하던 나를 다시 만나 안아주고 싶다. 어쩌면 지금의 딸을 보는 것보다 더 너그러운 눈으로 나 자신을 바라보게 되는 듯했다. 이미 결론을 알고 있는 영화를 보는 느낌이어서, 결과를 알기에 가질 수 있는 느긋함이라고 생각된다. 30년 뒤의 내가 지금의 나에게도 그렇겠지? 지금의 자책과 스스로에 대한 실망이 다 그것도 경험이었고 괜찮다고 말해주고 싶겠지? 내 보물, 어린 시절 일기장은 나를 사랑할 분명한 근거를 마련해 줬다. 나는 잘 해냈고, 잘 하고 있고, 잘 해낼 거라고 그러니 믿으라고 말해준다.


먼 길 돌아와 떠나갔던 사랑을 다시 만났다. 오래전의 사랑했다 외면했던 나와 화해할 시간이다.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그 사람이 정말 행복하길 원하는 것이다. 비교로 인한 좌절감으로 스스로를 비난했던 시절까지도, 내가 행복하길 바라지 않았던 적은 단 한순간도 없었다. 따라서 내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은 나 이어야 한다. 이 최고의 사랑이 실현되어야만 다른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다. 내가 행복해야 곁에 있는 누군가의 행복을 바랄 수도 있다. 알면서도 실천은 힘들었다. 나는 언제나 누군가보다 못났고 성격까지 별로였다.


다른 도리가 없었다. 내가 날 사랑하지 않는 세상에 행복은 바래 볼 수 없다. 내 삶에 나를 zoom in 하기로 했다. 아무리 뛰어나고 잘난 사람도 내게는 조명 없는 배경일 뿐이다. 스스로 행복하고 사랑하는 내가 되어 곁에 있는 사람까지 행복을 나눠줄 수 있는 사람이고 싶다. 한때 딸아이로 인해 빛나고 싶었던 적도 있었다. 딸이 빛나면 곁에 있는 나도 빛나 보일 줄 알았다. 이제는 아니다. 행성이나 위성이 아니라 항성으로, 누군가를 통해서가 아니라 나 자신 그대로 빛나고 싶다. 내 빛으로, 나의 밝은 기운으로 가족 모두를 품어주고 싶다.


사랑하는 행복한 나와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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