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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어린이라는 세계

키워드 : '나'라는 어린이, 어린이, 사랑, 나의세계

by Chloe J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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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글이나 책을 쓰고자할때 나오는 주제는 자신이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 일상이다. 따라서 취미에 대한 이야기나 직업에 대해 쓰게되는경우가 많다. 어린이를 대상으로하는 독서교실의 선생님이라는 직업을 가진 저자의 어린이 이야기가 처음에 내 마음을 끌지는 못했다. 상상이 간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렇게 오랫동안 베스트셀러였음에도 들춰보지 않았던 듯 하다. 이제와 생긴 왜 그렇게 열광했나?의 질문에 별기대 없이 책을 들었다. 그리고 그 곳에서 세상모든 어린이가 아니라 두명의 어린이를 만났다. 바로 '나와 어린시절의 딸'. 저자가 바라보는 시선에 서있는 어린이를 통해서 내가 사랑한 두 어린이를 만나는 시간이었다.


사람은 작은 생명체로 태어나 십수년을 성장하며 성인키 만큼 자란다. 우리 사회의 기준은 성인이었다. 어린이에대한 배려는 없었고 아이가 자라는 동안 받침대의 역할을 당연히 부모가 해야할 일이라고 여겼다. 5~6명의 형제 자매가 있던 부모님의 세대는 어린이에대한 배려를 받아보지 못해 그런게 있는지도 몰랐다. 어린이라는 존재를 소유적으로 생각하기도 했고 존재자체를 미완성의 과정이라고 생각했다. 마치 완성되어야만 온전한 권리가 생기기라도 할 것 처럼 생각했다. 우리는 제대로 '한명'의 대우를 받지 못하고 자랐다.


어릴적 기차를 탔다. 초등학교 저학년으로 기억한다. 명절이었는지 기차역에 사람이 많았고 입석도 많았다. 미리 예매를 했던 우리 가족은 3자리를 배정 받았다. 엄마, 아빠, 나, 여동생. 여동생은 엄마의 무릎에 앉았고 나는 온전한 한자리를 차지하고 앉았다. 앉은지 10분도 지나지 않았을때 할머니 한분이 같이 앉자며 허락을 구하지 않고 걸터 앉으셨다. 예상했겠지만 결국 할머니의 영역 확장으로 나는 그자리에 있을 수 없어 아빠 무릎에 앉아야했다. 그때는 그랬다. 이 장면을 단지 노인공경의 주제로 바라보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때 어린 나는 몸이 불편한 어른에게 배려를 베풀 기회를 빼앗겼다. 온전한 한명의 인간으로 대접받지 못했으며 어리니까 함부로 해도 된다는 느낌을 받았다고 아직도 기억하고있다. 그때 아무도 내가 덜자란 어른이 아니라 어린이라는 존재 자체로 존중받아야한다고 말해주지 않았다. 단지 부모님은 권리를 보장받지 못한 막무가네가 속상했을 테다. 그런 어린 나에게 저자는 부당한 대우를 받았다고 말해준다. 어린 나를 나 하나로 온전히 정중한 대접을 받아야할 한명이라고 알려준다. 지금의 내가 어린 나를 보듬을 수 있는 기회를 준다.


며칠전 진료실에 친한 직장동료가 아이와함께 방문했다. 아이는 3살이었고 들어와 내려놓자마자 이것저것 손에 닿는 것을 당겨 떨어뜨렸다. 오랜만에 만나는 아주 작은 손님이 너무 반가워 손을 씻고 쪼그리고 앉아 아이와 눈을 맞췄다. 그 아이가 보는 것을 함께 바라보다가 나도 모르게 터져나오는 말이 있었다.

"여기서 보니까 너무 다르고 궁금하다!" 위에서 내려다봐야하는 어린이의 시선으로는 볼수 없는 책상위 수수께끼처럼 한쪽 끝만 보이는 물건들이 비밀이야기처럼 느껴졌다. 손이가는것은 당연한 이야기고 당기고 싶은 것도 의지가 아니었으리라...


딸이 어렸을때도 같은 시선에서 보고 같은 시선에서 생각했으면 이해해줬을 많은 사건들이 스쳐지나갔다. 물을 쏟을 것만 같아서 대신 해주려 했을때 스스로 하겠다고 우기더니 1분도 지나지 않아서 엎질러버린게 한두번이 아니었다. 식사를 하러가도 옷에 흘린다고 앞치마를 둘러준다고 하면 안흘린다 저항하다 결국 옷을 엉망으로 만들었다. 그때는 여유가 없었다. 혼자 내 앞가림만 하면 되는 삶을 살다가 성인 남자와 살게된 후 집안일이 늘어난것도 불만이었는데 하나의 생명을 길러낸다는 것은 직장이 파라다이스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아이는 단 한번도 엄마를 화나게하고 싶지 않았을텐데 일부러 넘어트리고 엎지르는 것만 같았다. 바쁘고 계속되는 삶에 뭐가 소중한지 생각하지 못하고 쳐내듯 살아간 젊었던 후회하는 내가 있었다.


옷걸이 꼭대기에 지금은 쓰지 않는 모자가 걸려있다. 남편의 사용하지 않는 모자 앞면서 삐뚤빼뚤한 글씨로 "9살 혜영이"라고 적혀있다. 지금은 12살인 딸이 9살이었을때 수학공부를 함께 했다. 시작부터가 잘못된 선택이었다. 40이 다된 내가 9살의 수학실력이 답답했다. 자꾸만 혼내는 분위기가 만들어지자 딸에게 미안했다.

"9살 혜영이는 몰랐는데 40살 됐다고 답답해해서 미안해... 9살 혜영이보다 네가 더 잘하는데 말이지..."

그랬더니 딸이 만들어줬다. 그 모자를 쓰면 9살 혜영이가 되는 마법의 모자였다. 딸이 모자를 씌우고 '혜영아'이름부르며 투닥거리던 추억이 가슴을 아려오게 만든다. 그럼에도 두어번 그 모자를 벗어던진것은 기억나는데 기억안난다.


이미 딸은 나보다 못하는게 거의 없어졌다. 내가 봐주고말고 할게 없다. 이제 딸이 날 봐줄 일만 남았다. 나는 점점 나이들테고 딸은 성숙해간다. 배려받지 못한 어린이는 배려하는 어른으로 자라기 힘들다. 배려하지 못한 어른은 배려받는 시니어가 되기 힘들다. 사람의 삶은 남의 손에서 시작해 남의 손으로 끝난다. 어느 시기의 삶도 지나가는 과정이 아니다. 그 자체가 소중한 인생이다. 배려할수 있을때 배려하는 삶은 결국 자신을 위한 일이기도 하다.


어린이의 배려는 더이상 남의 일도 아니고 개인의 문제도 아니다. 힘이 약한 계층을 사회적으로 보호하고 배려하는 것은 스스로를 위한 일이면서 어쩌면 사회의 존망을 직접적으로 결정짓는 문제와 엮여있다. 지금 우리 사회에서 가장 심각한 문제인 인구절벽의 실마리를 저자는 쉬운문제라고 말했다. 말로만 미래 사회의 주역이라고 말하지 말고 어린이가 살기 좋은 사회를 만드는데 작은 힘을 보태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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