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이라는 세계 - 키워드 : '나'라는 어린이
인생에는 굴곡이 있고 추억에는 슬픔이 있다. 누군가의 슬픔은 너무 아름다운 회상과 함께 그 시절을 잃어버린 안타까움에서 온다. 또 다른 누군가는 어쩌면 자신에 대한 연민에서 오는 원망 섞인 슬픔이다. 어린 시절을 떠올릴 때 따뜻하고 아름답기만 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 모든 추억이 힘이 되고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준다면, 안정된 마음과 자기 믿음으로 어떤 어려움도 이겨내며 살 수 있을 텐데... 나도 내가 제일 예쁘던 시절이 있었다. 내가 세상의 중심이었고 엄마, 아빠는 나를 위해 존재했다. 내가 모두를 행복하게 해 준다는 착각 속에서 벗어나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우리 집에서는 그 경계가 매우 명확했다. 유치원까지만 천진난만해도 되는 아이였다. "학생"이라는 이름을 달게 되면서 평범한 아이가 공주가 되는 상황은 동화책 속에서나 가능하다는 사실을, 세상은 냉혹하고 무턱대고 믿을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아갔다. 시험과 경쟁이 당연한 듯 따라오는 사회라는 세계로 발들이며 부모님의 태도는 달라졌다. 책임지는 삶이 시작되었다.
8살의 나는 의젓한 언니였다. 맞벌이하시던 부모님은 내 손에 5살 동생의 손을 쥐어주셨다. 엄마도 감당이 안 되는 5살 동생을 병설유치원에서 피아노 학원으로 그리고 집으로 데리고 와야 하는 미션은 결코 쉽지 않았다. 초등학교 1학년, 내 등에 짊어진 처음으로 학생이 된다는 짐 만으로도 버거웠다. 동생은 5살의 호기심을 불태우며 책임감 강한 어린 언니를 속상하게 만들었다. 친구들과 피아노 학원을 마치고 놀고 싶었지만 동생을 데리고 다녀야 해서 놀 수 없었다. 어쩌다 함께 놀면 친구들은 동생을 끼워주기 싫어했고, 동생은 재미없다면서 집에 가자고 졸랐다. 그 시절의 3살 차이는 함께 게임할 신체적, 정신적 수준을 넘어섰다.
나는 못된 언니였다. 4살, 동생이 태어난 날부터 난 아이가 아니라 언니였다. 8살이면 사실 그냥 유치원 졸업생이다. 지금 아이를 키우면서 보니 12살도 키만 자란 아이인데 8살은 그냥 어린이다. 아빠는 밤이 늦어서야 집에 오셔서 얼굴을 보고 잠들기가 힘들 정도였고, 출근하는 엄마는 늘 바빴다. 종갓집 맏딸로 남편에게 내조하는 게 당연한 집에서 자라, 집안일은 온전히 엄마 혼자 해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랬으니 그 곁에서 도움이 될 수 있었던 게 바로 나였다. 엄마를 기쁘게 해주고 싶은 마음에 눈동냥으로 배운 설거지를 하고 청소를 해놓고 퇴근시간을 기다렸다. 엄마가 돌아와 기뻐하고 한 번 더 등 두드려줄 손길을 그토록 원했다. 그래서 더 동생이 미웠다. 어지르고 말썽만 부리지만 어리광을 부리면 더 예쁨 받는 것 같아서 미웠다. 동생 때문에 더 사랑을 갈구했고 뭐든 더 잘 해내려고 노력했다. 내리사랑이 그런 걸까? 내 눈에는 적응도 잘하지 못하고, 겁 많고, 엄마 뒤에 숨는 동생을 더 예뻐하는 것 같았다. 그래서 동생에게 더 날을 세웠다. 아직도 동생이 이야기한다. "언니 진짜 못됐었는데.."
어린이였던 나는 엄마를 세상 그 무엇보다 좋아했다. 원래도 작은 키에 지금은 키가 줄어 내려다봐야 하는 엄마지만 8살 올려다봤던 엄마는 초등학교 선생님을 하시며 출근할 때 늘 반짝이 장식이 있는 투피스에 뾰족구두를 신고 계시는 멋쟁이였다. 커서 엄마처럼 될 줄 알았다. 그래야 하는 줄 알았다. 립스틱도 많고 외출할 때는 치마를 입고 늘 화장한 얼굴로.. 이유를 모르겠지만 반대로 살고 있는 지금의 내 모습이, 사실 이번 엄마와의 추억을 떠올리기 전까지 그런 차이를 인식조차 하지 못하고 있었다.
엄마를 기다리는 게 어린 나에게 가장 중요한 일이었다. 요새 아이들은 학원 가느라 바쁘지만 내가 어린 시절 "아이템플" 일일학습지가 할 일의 전부였다. 이것도 경북영주라는 작은 도시에서 엄마가 교사라는 직업이라도 갖고 있었기 때문에 할 수 있었다. 동생과 같이 동생의 보호자가 되어 엄마 오기만을 눈이 빠지게 기다렸다. 작은 도시에 처음 지어진 신식 양옥집에 살았다. 초록색 대문을 들어서면 대리석 3단 계단이 나오고 집으로 연결된 현관이 있었다. 집옆으로 길쭉하게 담장을 따라 화단이 있었다. 대문에서 왼쪽으로 붙은 벽에 옥상으로 올라가는 시멘트 계단이 아슬아슬하게 나있었다. 어린아이는 한 번에 한 칸씩 오르기 부담스러운 손잡이도 없는 계단을 따라 5~6칸쯤 올라가면 계단에 앉아 담장 밖을 볼 수 있는 높이가 된다. 그곳이 여동생과 내가 엄마를 기다리는 곳이었다. 오후 5시가 되면 하염없이 그곳에서 한 곳만 응시한다.
작은 골목 '시온슈퍼'에서 4번째 초록대문의 옛날집 담장에 붙어 엄마를 기다린다. 이제 곧 슈퍼의 코너를 돌아 엄마가 화장한 예쁜 모습으로 예쁜 가방을 들고 뾰족구두를 신고 나타날 것이다. 우리는 담장에 붙은 계단을 단숨에 뛰어내려 엄마에게 달려가 안긴다. 여동생에게 엄마의 품을 조금도 내어주고 싶지 않았다.
지금 생각해 보면 몇 개 안 되는 정장을 출근하기 위해서 기본 15년씩 아껴입고 구두도 바닥이 다 닳아 못 신게 될 때까지 뒷굽만 갈아 신던 엄마가 얼마나 아름다워 보였는지 모른다. 눈치 보며 조금이라도 빨리 퇴근해야 해서 늘 종종거렸을 테고 그래서 더 많은 일을 맡아야 했던, 피곤해진 몸을 이끌고 돌아오는 지친 발걸음이 내 눈에는 어찌나 당당해 보였는지 모른다. 그때 엄마는 내 전부였다.
부모님에게 나는 말 잘 듣는 어린이였다. '어른스럽다. 착하다. 의젓하다.'라는 말이 최고의 칭찬이자 부모님께 인정받는 길이라고 생각했다. 엄마, 아빠를 기쁘게 하는 일이면서 동생과 다른 장점이라고 느꼈다. 일부러 그런 말을 듣고자 버거운 노력을 했다. 하고 싶지 않은 일에도 하기 싫다고 말한 기억이 없다. 거기다 언니라서 늘 동생의 본보기가 되어야 했다. 피아노 학원에 가기 싫었지만 뻑하면 그만 다니고 싶다고 투정 부리던 동생과 달리 꾹 참고 7년을 다녔다. 지금의 내가 어린 나를 생각하면 안타깝다. 참고 해내야 하는 기본값은 그때 만들어졌다. 그래서 현재의 내장점인 이런 끈기를 만들 수 있었을 거라고 말한다면 그럴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 나이에 맞는 어린아이로 존재하지 못했다는 아쉬움이 남는다. 그래서 지금 내 곁에서 어린이로 지내는 아이에게 더 어린이 그대로를 펼치게 해 줄 수 있는지도 모른다.
나는 아빠의 부끄러움이 되었다. 그 시절의 부모가 많이들 그랬듯 가정에서 자녀로 존중받는 한 명의 개체가 아니었다. 아빠의 소유물이었다. 그리고 아빠의 트로피가 되어야 했다. 초등 저학년까지 나는 아빠의 자랑이었다. 그때 참 시험도 자주 쳤는데 틀리는 게 거의 없었다. 아빠는 역시 아빠를 닮아 머리가 좋다며 좋아하셨고 나는 그 인정과 사랑받는다는 느낌을 느끼려고 노력했다. 초등 고학년이 되고 100점을 맞을 수 없었다. 아빠는 실망했다. 이유를 알 수 없지만 다른 일이 잘 안 풀리시는지 아빠가 화내는 날이 늘어났다. 그때 나는 나 때문에 집 분위기가 그렇다고 생각했다. 시험이 두려웠다. 저 종이 몇 장에 내 가치가 까발려지는 것 같았다. 나는 원래 아무것도 아닌데 운이 좋아 지금껏 그럭저럭 버텨온 것 같았다. 그런 생각을 할수록 공부는 안 됐다. 어차피 나는 천재도 아니고 머리도 좋지 않아 언젠가 아빠를 완전히 실망시킬 거라 생각했다. 아빠는 시험을 칠 때마다 실망했다. 그리고 내가 공부 안 한 불똥이 엄마에게 튀었다. 나는 가치를 잃었다.
5학년때였던가? 사회 시험에서 몇 점을 맞았는지 기억은 나지는 않는다. 아빠는 화가 많이 났고 사회책 뒷면이 보이게 책상에 내리치며 말했다. "아빠가 사회 책을 썼는데 공부를 이따위로 해? 얼굴을 들고 다닐 수가 없다." 그날 이후 지금껏 3번 내가 부끄러워 얼굴을 들고 다니지 못하겠다는 말을 들었다. 다음날부터 매일 엄마가 내준 사회 쪽지시험을 봤다. 나는 단지 시험 때문에 부끄러운 딸이 되었다. 다 크고 부모님과 이런 이야기가 나온 적 있다. 한 번도 잊을 수 없던 이야기를 아빠는 기억하지 못했다. 단지 왜곡과 오해였다고 하기에 아직도 아빠는 우리 남매를 평가의 무대에 올린다. 우리는 등수 매겨지고 아빠에게 자랑이거나 수치다.
그렇게 실망과 부끄러움으로 낙인찍힌 인생 하향곡선을 걸었다. 그때는 그 길 끝에 나라는 존재의 가치상실만 있을 줄 알았다. 성인이 되고 나서야 내 가치는 내가 만들고 내가 판단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깨달음은 공부로 연결되었고 배움은 있을 거라 상상도 하지 못하던 세상의 문을 열어버렸다. 부모에 대한 복잡한 감정과 그들이 완전하지 못한 존재로 나에게 가치 없음의 낙인을 찍었다는 배신감, 그로 인해 상처받은 나와 더 이상 회생불가능 할 것 같은 무기력이 삶을 온통 잡아먹었다. 그때 책 '미움받을 용기'를 만났다. 아들러에 따르면 모든 것은 다 내가 선택한 것이란다. 아빠를 미워하기로 마음먹은 것도, 무조건의 사랑했음에도 아빠에게서 날 지켜주지 못한 엄마를 원망하는 것도 내 선택이었다. 내 삶이 망가진 것 같은 책임을 그들에게 돌리고 싶은 나의 선택.
그 책을 읽은 후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내 잘못으로 생긴 일이라는 후련함이 좋았다. 누군가의 피해자로 어쩔 수 없이 발버둥 치기보다 내 두 발로 헤쳐나갈 의지가 생겼다. 지금까지의 내 삶의 곡선을 만들었던 것은 날 둘러싼 환경에 의해서였다. 부모님이 예쁘고 어린아이로만 볼 때는 공주놀이하면서 삶을 즐길 수 있었고, 언니로 불릴 때는 주어진 역할에 따라 평가되었다. 학생이라는 잣대로 등수 매겨질 때는 그 속에서 한 발도 나올 수 없었다. 이제는 아니다. 나의 모든 것은 내가 결정하고 책임진다. 더 이상 휘둘리지 않아도 된다. 6살 때쯤 스스로를 사랑하던 나를 이제야 찾았다.
어른스러우며 책임감과 경쟁심 강하고 엄마를 사랑하던 아이는 자라 내가 되었다. 내 안에 있는 6살의 귀여움과 8살의 고민, 12살 사춘기의 고뇌에 청소년기 학창 시절의 내가 모두 들어있다. 그들이 그 자리에서 치열하게 살아낸 삶의 끝에서 내가 원하는 길을 한 발씩 내딛고 있다. 지금에서야 사랑하게 된 나에게 잘 살아왔다 토닥이며 나만을 위한 정중한 대접을 해주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