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에 지도가 없는 나, 뭐든 놓고 다녀서 정신없는 내가 딸까지 책임져야 하는 첫 번째 여행이다. 잔뜩 긴장을 하고 아침 6시 20분 택시를 탔다. 공항까지는 50분 정도 걸렸다. 기사아저씨의 대응은 따뜻했고 나는 얼어있었다. '요새는 애들이 다 알아서 하죠.' 나도 곧 그런 날이 오겠지? 일을 잘 저지르는 편이라서 내가 이렇게까지 긴장할지 몰랐다. 딸과 나는 앞으로 10년 동안 1년에 한 번 해외여행을 하자고 약속했다. 긴장하지 않고 내 집 드나들듯 편하게 공항을 갈수 있는날이 내게도 올까? 내게도 언젠가 자유가 오겠지?
삶의 모토가 자유다. 자유롭고 싶다. 지식에서 자유롭고 싶어서 책을 읽기 시작했다. 누군가에게 직접 배워야만 한다면 제약이 많이 따른다. 아직 독서에 자유를 얻었다고는 할 수 없지만 궁금한 건 책으로 해결할 수 있다는 지식의 자유 지도를 알게 된 기분이다. 언어! 그것이야말로 진짜 자유다. 언어를 얻는 것은 세계를 하나 더 얻는 것. 아직 자유롭지 못하다. 언어란 필요가 있어야 하는데 그럴만한 동력이 없었다. 지금부터라도 내 자유에 좋은 장비하나를 갖길 포기하지 않고 싶다. 그리고 여행이다. 유랑하는 삶을 살지 않는다면 여행보다 더 물리적으로 자유로울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그 첫 발걸음이다. 딸과 하는 첫 번째 지역의 확장. 자유!
11시 20분에 하늘에 오르고 바로 밥을 먹었다. 메뉴는 된장덮밥. 맛이 있다기보다는 여행에 취해 있어 뭘 먹어도 좋다. 아줌마가 된 이후로 남이 해주는 밥은 가리지 않는다. 디지털 시대 어떤 콘텐츠든 영상으로 제작되고 있는 지금. 나는 영상을 잘 못 본다. 왜 그런지는 모르겠다. 친구가 선물해 준 책을 읽었다. 일부러 스포 하지 않는 차원으로 어떤 책인지 전혀 모르고 비행기에서 첫 페이지를 열었다. 서커스 유랑단에서 태어난 주인공의 이야기, 작은 조각이었지만 파리의 이야기 그리고 이번 여행길 프랑스 작가의 책이었다. 책 제목이 '가벼운 마음'이다. 등장인물과 장소를 알게 되면서 흥미가 생겼다.
갑자기 불이 꺼졌다. 한국으로 치면 오후 1시인데 수면모드다. 우리가 가고 있는 런던이 새벽 3시라서 그런가 보다. 큰일이다. 잠은 안 온다. 비행기에 준비되어 있는 디지털기기는 어찌나 좋아졌는지.. 하지만 영상을 보면서 가고 싶지 않다. 강박적인 성향 중 하나가 미디어 강박이 있다. 생각을 밀어내는 시간처럼 느껴지는 그 소모되는 느낌이 싫다. 아까 읽던 책을 생각했다. 서커스 유량단에서 태어난 주인공이 2살 때 이야기가 시작된다. 내가 마지막으로 읽던 부분은 아직 8살이었다. 이후의 그녀의 삶을 혼자 상상해 본다. 제목처럼 얼마나 가벼운 마음으로 삶을 알아냈을까? 그런 삶이 여행자적인 삶이겠지? 유랑단은 달팽이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은 이전에 들렀던 곳에 다시 가지 않았다. 늘 어딘가로 떠날 준비가 되어있는 사람들이었다. 우리의 삶이 어쩌다 보니 여기까지 온 것처럼 그들의 삶도 필연을 가장한 우연일까? 아니면 진정한 선택으로 본연의 삶을 즐기는 걸까? 그들의 삶이 윤택할 것 같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보다 더한 자유의 삶을 사는 사람이 있을까? 잠시 내가 바라는 자유가 그런 것일까? 생각해 본다.
일에서 벗어났고 가족으로부터도 벗어났다. 딸을 데리고 있지만 인생 최대로 마음이 자유롭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랜만에 심심할 일 없는 요즘세상에서 심심한 시간을 보내고 있다. 생각에 대한 생각을 하면서...
비행기가 오전에 출발하고 6시간이 지나고 12시간이 지나도 밖은 대낮이다. 비행기 안은 계속 불이 꺼져있고 다들 밤처럼 행동한다. 앉아서 자거나 영상을 보는 게 전부인데 밥은 3번이나 나왔다. "아니, 또 먹어?" 우리가 시간을 감각하는 흔히 사용하는 방법이 태양의 뜨고 짐과 관련된 빛의 변화가 첫 번째 일 테고 다음이 끼니때를 알리는 배꼽시계가 아닐까? 비행기를 타면 이 두 가지가 무너진다. 그러면서 다른 세상으로 들어가나 보다. 다른 세상으로 들어가기 위해서 원래의 흐름을 깨버리는 중이다. 이렇게 정신이 없으니 새로운 세상에 대한 불안감이 줄어든다. 불안에서도 자유롭고 싶다. 몸도 잘 알고 있다. 살고 봐야 한다. 걱정은 몸이 편해져 걱정할만할 때 할 수 있나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