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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칼브(Calw)-헤르만 헤세의 도시

우리를 성장하게 하는 것들

by 민s Brunch

4일차: 조용한 시골 마을에 가는 이유


조식으로 나온 빵을 포크로 꾹꾹 누르며, 딸아이의 입이 한라산 백록담처럼 튀어나왔다.

“아니, 어디를 간다고? 칼브? S반 타고 버스를 갈아타고? 거길 대체 왜?”

“‘알’, ‘세계’, 기억 안 나? 『데미안』 쓴 할아버지 동네 보러 간다니까.”

“그게 뭐냐고! 책 읽었으면 됐지. 난 읽었는데도 도무지 무슨 말인지 모르겠더만.”


노벨문학상 작가 헤르만 헤세도 사춘기 중1 딸 앞에서는 그저 ‘할아버지 작가’로 격하되는 마법(...) 조용한 시골 마을에 가자는 내 제안이 탐탁지 않았는지, 딸은 아침부터 툴툴 모드 풀가동 중이었다.


솔직히 조금 찔렸다. 헤세의 고향인 칼브(Calw)는 눈길을 확 끄는 볼거리는 없는 동네다. 결정적으로, 헤르만 헤세 박물관은 공사 중이라 문까지 닫혀 있었다. 공사 중인 박물관, 『수레바퀴 아래서』의 배경이 된 다리 하나, 그리고 헤세 할아버지 동상. 그게 거의 전부였다. 딸의 불만이 이해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도 꼭 가보고 싶었다. 독일 남서부까지 왔는데, 딱 지금의 딸 나이였던 내게 큰 울림을 주었던 책. 틀을 깨고 진정한 어른이 되라는 응원을 마음 깊이 새겨준 작가의 동네를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S반과 버스를 갈아타는 내내 뚱했던 딸의 얼굴은, 칼브에 도착하면서 조금 풀어졌다. 동화 속 마을처럼 아기자기한 풍경이 마음에 들었던 듯하다. 우리는 휙 한 바퀴 돌면 끝날 듯한 작은 동네를 어슬렁거렸다.

『수레바퀴 아래서』의 배경인 니콜라우스 다리 위에서 흐르는 강물을 내려다보다가, 문득 딸에게 물었다.

“너라면 소설을 쓴다면 어떤 배경을 선택하고 싶어?”


딸은 뜻밖에도 한참을 진지하게 생각하더니 답했다.

“음… 창작은 내가 가장 익숙한 세계, 그러니까 우리 동네에서 시작할 것 같아. 잘 아니까 자신 있게 글을 쓸 수 있잖아. 완전 상상의 세계는 디테일이 부족해서 설정에 대한 자신감이 좀 떨어질 것 같거든. 헤세 할아버지도 이 동네가 익숙하니까 글에도 자신감이 있었겠지.”


나는 순간 할 말을 잃었다. 『데미안』은 무슨 말인지 하나도 모르겠다고 했던 딸의 입에서 나올 줄은 상상도 못한, 근사한 통찰. 딸아이의 말처럼 창작은 익숙한 세계에서 시작되지만, 그 세계 밖의 경험은 우리에게 상상력의 기반이 된다. 그래서 그 익숙함을 벗어나보는 여행은 우리 삶에 낯선 색을 더하고, 상상에도 깊이를 불어넣는다. 그것이 우리의 익숙함에 균열을 내는 과정일지도 모른다. 그 균열 사이로 새로운 시선이 자라고, 이와 동시에 익숙했던 세계도 새롭게 해석된다.


이런 생각을 오래 할 틈도 없이, 딸이 내 옆구리를 콕 찔렀다.

“엄마, 배고파.”

"ㅋㅋㅋㅋ 알겠어."


우리는 근처 소박한 식당으로 들어갔다. 독일식 수제비라 불리는 슈페츨레와, 어제 먹고 반했던 독일식 만두 마울타셴. 두 가지 메뉴를 시키며 우리는 눈을 마주치고 풉, 웃었다.

“이거, 만둣국에 수제비 사리 추가한 느낌 아니야?”

곧 노릇하게 치즈가 녹아든 슈페츨레와 진한 국물의 마울타셴이 나왔다. 딸아이는 슈페츨레를 포크로 듬뿍 찍어 입에 넣더니 눈을 휘둥그레 떴다.

“대박! 엄마, 이거 치즈 떡볶이 맛 나! 완전 내 스타일이야!”

“이 마울타셴도 속이 알차서 맛있네.”

우리는 시원한 아펠쇼를레로 건배하며, 고소한 치즈와 쫄깃한 면발의 세계에 푹 빠졌다.


아주 작은 마을에서의 아주 짧은 여행. 하지만 나는, 그리고 아마도 딸 역시, 헤세의 고향 칼브를 오랫동안 기억할 것이다. 소박한 마을에서 자란 작가의 세계를 스친 하루이자, 툴툴거리던 내 딸의 세계가 한 뼘 자라나는 순간을 곁에서 지켜본, 기분 좋은 하루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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