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ssidi cape와 저녁 초대
오늘은 네아 스키오니에 머문 지 닷새째 되는 날이다.
이른 아침인데 밖에서 들리는 새소리가 제법 요란하다.
어제는 먹구름으로 가득했던 하늘이 오늘은 맑고 청명한 전형적인 그리스 날씨를 우리에게 선물한다.
비 오는 날에도 잔디에 물을 주고 계시던 할아버지께서는 오늘은 아침부터 집수리를 하고 계신다.
날씨, 시간, 장소에 관계없이 무척 부지런하신 분이다.^^
파란 하늘, 맑은 날씨를 느끼고 싶어 마당 벤치로 나와 커피를 마시자고 남편을 졸랐다.
청량함을 느끼고 싶었다.
우리 부부는 오늘 특별히 꼭 가야 할 곳, 딱히 해야 할 일들은 없지만 적어도 하루에 한 가지 이상은 의미 있는 일 들로 채우고 싶은 마음에 지도를 보며 이곳저곳 기웃거린 결과 숙소에서 차로 약 15분 정도 떨어진 비치 'possidi cape'에 가기로 했다.
점심 식사 후 오늘도 여전히 아름다운 꽃길을 운전하며 목적지로 향했다.
독특한 지형을 갖고 있는 possidi cape는 바다 쪽으로 좁고 길게 해변이 뻗어 있는 멋진 비치다.
더욱 흥미로운 사실은 해류에 따라 해변의 모형이 바뀌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걷다 보면 모래사막에 있는 듯한 느낌도 들지만 끝까지 다다르면 모래사장 양쪽에 바다가 펼쳐져 무척 신기한 장면을 만날 수 있는 곳이었다.
바다를 사이에 둔 하얀 모래와 푸른 바다, 파란 하늘은 주변의 어떤 아름다운 풍경이라도 고개를 숙이게 만든다.
바다와 만나는 맨 끝에 보이는 비치까지의 거리가 눈으로는 가까워 보였는데 끝까지 가려면 꽤 많이 걸어야 했다.
걷는 길이 모래해변이 아닌 자갈 해변인데 자갈이 닳아 모래가 된 흔적을 볼 수 있었다.
바닷속은 자갈인데 자갈이 닳고 닳아 모래가 되었나 보다.
얼마나 오랜 세월을 보냈기에 자갈이 모래가 이렇게나 많이 쌓인 건지 신기하다.
사진으로 보았을 땐 바다 쪽으로 뾰족하고 길게 나와있는 조그마한 곶(cape)처럼 보였는데 막상 와보니 양쪽으로 꽤 넓은 모래사장이 만들어져 있다.
지금은 성수기가 아니지만 그래도 이름난 장소라 그런지 사람들이 눈에 보인다.
햇볕에 몸을 그을리는 사람도 있고, 엎드려 책을 보는 사람, 우리처럼 바닷가를 거니는 사람도 있다.
가족이 소풍을 와서 돗자리를 펴고 즐기는 사람들도 있다.
이런 멋진 곳에서 언제든 수영도 하고 쉴 수 있는 이곳 사람들이 몹시 부러워지는 순간이었다.
잔잔하고 아름다운 바다에서 수영을 하고 싶어 몸이 근질거렸지만 쌀쌀한 날씨가 우리를 말리고 있다.
잠시 아름다운 풍경과 함께 시간을 보낸 후 숙소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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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네아 스키오니에서 묵는 숙소는 1층과 2층으로 된 구조로, 1층은 게스트가 묵고 호스트 가족은 2층에 살고 있다.
딸 넷을 키우고 있는 이 부부는 바쁜 듯 보이는데 특히 남편이 항상 바빠 보인다.
그렇지만 항상 웃는 얼굴로 친절하게 우리를 대해주니 기분이 좋다.
딸 셋은 초등학생이고 막내는 세 살이란다.
딸들을 아침과 오후, 학교에 데려다주고 데려오곤 하는 일 외에 방과 후 수업을 받는 아이들을 위해 여기서 떨어져 있는 마을까지 딸들을 케어한다.
이 외에 다른 업무도 하는 듯 보이는데 한국의 학부모만큼이나 열정적이고 부지런한 분이시다.
아마 이 마을에서 가장 바쁘게 사는 분일 듯도 싶다.
정원 벤치에서 책을 읽고 있는데 호스트의 큰 딸인 크리스티나가 붉게 상기된 얼굴로 오더니 자전거를 탔다고 자랑을 한다.
그리고는 제일 친한 친구 아나스타샤랑 반쪽씩 나눠가진 거라며 목에 걸린 목걸이를 자랑한다.
그 모습이 어찌나 귀여운지...
나비 모양의 목걸이를 꺼내 보여주며 본인이 좋아하는 색이라고 무척 좋아한다.
무슨 색을 가장 좋아하냐고 물었더니 블루라고 한다.
그리스 여인답게 블루라니...ㅎㅎㅎ
얘기하는 도중 갑자기 동생과 태권도 수업을 가야 한다고 한다.
태권도라는 말에 깜짝 놀라 태권도를 배우냐 물었더니 '그린벨트'라고 자랑을 한다.
태권도를 배우는 게 재밌다고 얘기하는데 동생 코딜리아까지 합세해 본인도 배운다며 신나게 얘기를 한다.
자매의 모습이 너무 귀엽고 사랑스러웠는데 한편으로는 그리스 작은 어촌에서 태권도를 배우는 자매들을 만날 수 있어 깜짝 놀랐다.
아이들에게 태권도를 가르쳐주는 선생님은 한국인이 아닌 그리스사람이라고 했다.
이곳에서 약 15분가량 떨어진 '카뇨디'라는 마을까지 가야 하는데 매일 아빠가 데려다주시고 수업이 끝날 때까지 기다렸다가 아이들을 데리고 오신다고 한다.
호스트에게 왜 아이들에게 태권도를 배우도록 권유했냐고 묻자 태권도를 배우면 몸도 건강해지지만 특히 예의와 인내심을 배울 수 있어서 아이들에게 배우도록 했다며 태권도가 아주 좋은 운동이라고 엄지 척을 해주신다.
나도 저절로 뿌듯해진다.
그런데 잠시 후 딸 셋이 태권도 복으로 갈아입고 내려오더니 우리 앞에서 태권도 시범을 보이겠다고 한다.
씩씩한 구령에 맞추어 동작을 외워서 똑같이 하는데 정말 깜짝 놀랐다.
최고라고, 훌륭하다며 큰 박수로 칭찬을 해줬더니 무척 좋아한다.
우리나라의 태권도를 그리스 어촌 마을에서 눈앞에서 볼 수 있다니 자랑스럽고 몹시 행복한 시간이었다.
세 따님이 귀여운 태권도 실력을 보여줘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는 보답으로 저녁식사에 초대하겠다고 하니 부부는 무척 좋아한다.
초대에 응하겠다는 그들의 대답을 듣자마자 바로 저녁 식사 준비에 들어가니 정신이 없다.
칼라마리와 야채를 넣은 전과 불고기 그리고 잔치국수와 비빔밥을 준비하기로 했다.
모든 음식에 재료가 비슷하게 들어가서 크게 준비해야 하는 건 없었는데 단출했던 두 사람 식탁이 갑자기 여덟 명으로 늘어나니 당황스럽기도 했다.
더구나 처음 맛볼 한국 음식이 그들에겐 어떤 맛으로 다가갈지 걱정이 되어 조금 부담스럽기도 했다.
다행히 남편이 많이 도와줘서 무사히 준비할 수 있었다.
저녁 7시가 되어 그들은 우리 숙소로 내려왔는데 초대 선물이라며 딸들이 우리를 위해 그린 그림들, 와인, 그리스 문양이 들어간 화병과 그리스 전통간식 등 푸짐한 선물을 가지고 방문했다.
카타리나는 그림을 보여주며 나와 남편을 그린 거라며 설명하는데 그 어떤 선물보다 정성이 느껴진다.
우리도 한국에서 가져온 젓가락들을 아이들에게 주었더니 무척 신기해하며 좋아한다.
우리도 나름 최선을 다해 준비한 한국음식을 대접했는데 호스트 'Costas'와 그의 부인 'Stella'는 다행히 입맛에 맞았는지 잘 드신다.
그런데 아이들은 처음 맛보는 한국 음식이 낯설었는지 먹는 둥 마는 둥이다.
아이들을 위해 따로 뭔가 준비를 했었어야 했나 싶어 마음이 안타까웠다.
하지만 셋째 딸, 카타리나(Catarina)는 국수가 맛있다면서 잘 먹는다.
아이들은 예의 바르게도 먹는 음식들 마다 맛있다며 칭찬을 해줘 놀랍기도 했다.
그런데 네 명의 딸 이름을 몇 번씩 들었는데 지금 생각해 보니 기억이 잘 안 난다.
카타리나, 데스피나(Despina), 코딜리아 그리고 크리스티나(Cristina)(확실한지 모르겠다 ㅠㅠㅠ ).
그런데 아이들 이름은 모두 조상의 이름을 따서 짓는 게 전통이라고 해서 무척 놀랐다.
나이가 어린 여자 아이들이라 무척 살갑게 군다.
갑자기 달려와 품에 안기기도 하고 얼굴에 입도 맞춰준다.
너무 사랑스럽고 예쁜 아이들이다.
두 아들만 키운 우리 부부는 이런 경험이 처음이라 낯설지만 무척 행복한 시간이었다.
아이들이 우리에게 궁금한 것도 많은가 보다.
무슨 색을 좋아하는지 묻길래 Green을 좋아한다고 하자 갑자기 데스피나도 그린을 좋아한다며 나에게 달리며 안긴다.
어찌 사랑스럽지 않을 수 있을까?
그러자 데스피나는 우리에게 본인이 알고 있는 유머를 해주겠다고 하는데 영어에 서툰 데스피나가 그리스어로 말하면 아버지는 영어로 우리에게 통역을 한다.
아버지는 딸의 유머를 우리에게 열심히 영어로 통역을 하는데 딸을 사랑하는 아버지의 정성이 느껴진다.
열심히 전달하는 부녀의 노력에 우리는 얼마나 감동받고 또 웃었는지...ㅎㅎㅎ
이어 세 자매가 스스럼없이 어른들 앞에 나란히 서더니 그리스 인기 대중음악에 맞춰 노래도 부르고 함께 춤도 춘다. 아이들 재롱에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이렇게 예쁜 딸들을 둔 호스트 부부가 부럽기까지 하다.
그리스는 다자녀를 위한 지원이 있는지 호스트에게 물었더니 많지 않다고 한다.
자녀 네 명에 대한 지원이 매 달 약 120달러 정도라고 하니 한국에 비하면 부족한 지원인 듯싶다.
그래서 요즘엔 그리스 젊은이들이 결혼을 하면 자녀를 한 명 이상 나으려 하지 않는다고 한단다.
한국도 딩크족이 늘어날 뿐만 아니라 아예 결혼을 기피하는 젊은이들도 많은데....
한국, 그리스 모두 위기임에는 틀림이 없다.
이런저런 얘기를 주고받다 보니 밤 9시가 훌쩍 넘었다.
자야 할 시간이라며 스스로 신발을 챙겨 신는 아이들이 볼수록 기특하고 귀엽다.
서로 안아주고 입을 맞추며 우리는 아쉬운 이별을 했다.
네아 스키오니에 온 이후 처음으로 몸과 마음이 바쁜 하루였지만 최고로 행복한 하루였다.
이 글은 2024년 5월 그리스를 여행하며 기록한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