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교롭게도 파리로 출발하기 며칠 전 TV에서 프랑스 파리 지역 중 18구, 19구와 파리 북쪽 외곽 도시는 테러와 범죄의 위험성이 있으니 관광객들은 이 지역을 피해 다니기를 권한다는 안내를 들은 적이 있다.
특히 파리 동북부 외곽에 있는 제19구는 다인종 노동자 계층이 주로 사는 지역으로 프랑스 식민지였던 북아프리카에서 온 이민자들이 많다고 하는 설명까지 곁들였다.
파리에서 살아본 적이 없던 나는 파리시 구역들 간의 차이를 크게 느끼지 못했던 터라 이런 안내가 직접 와닿지 않았다.
하지만 이런 안내를 받기 몇 달 전 우리는 파리에서 묵을 숙소를 찾을 때 파리 동쪽 지역(19구)이 아닌 19구와는 정 반대 서쪽 지역인 16구에서 아파트를 찾았으니, 21세기인 지금도 파리는 구역에 따라 생활환경의 차이가 큰 도시였고 살고 있는 거주민의 부류도 차이가 있는 곳이 파리였다.
지금 우리는 파리 여행 중이다.
우리는 19구에 도착해서 먼저 주택가로 들어섰다. 이 동네의 분위기를 느껴보고 싶어서였다.
아름다운 주택이 모여있는 골목이다.
조용하고 깨끗했으며 담장에는 등나무와 개나리로 덮여 있는 아담한 주택들이 눈에 띈다.
더 눈에 띄는 건 골목 담장에 붙어 있는 표지판 이름이 "Villa des Lilas"(라일락)이다. 주택가의 이름들이 낭만적이다.
다른 편 골목 담장엔 "Villa Emile Loubet"(에밀 루베)의 대통령 이름이 붙어있는데 이곳에서 태어난 걸까? 아니면 여전히 국민들에게 칭송되는 훌륭한 대통령인가? 내가 사는 한국에도 거리에 대통령 이름이 있던가?
또 다른 쪽엔 "Rue De la Fraternite(우정)"이란 이름의 거리, "Eugene Leblanc"라는 와인 병에서 보았던 이름도 있다.
하루 종일 골목에 붙어있는 표지판 이름들만 보고 다녀도 흥미로울 듯싶다.
마치 한낮 시골 마을의 골목길에 들어선 듯한 편안하고 고즈넉한 골목 풍경이다. 평화롭기까지 하다.
파리 19구의 주택 골목
하지만 파리 19구의 지역은 이렇게 시골마을처럼 정겹고 아름다운 곳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안타깝게도 주택 건너편엔 이민자들과 노동자들이 거주하고 있을 듯 한 평수가 작고 낡은 고층 아파트들이 서있다. 마치 아직도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의 계급이 존재하고 있는 도시인 듯 여전히 이렇게 구분되어 살고 있는 주거 환경을 보니 기분이 썩 좋진 않다.
조심하라는 안내도 들었고 혹시라도 불미스러운 일이 생기진 않을까 하는 걱정스러운 마음에 우리는 그 지역까지 가진 않았다.
1850년대부터 이루어진 파리 도시계획은 이미 이렇게 될 것을 예상하고 조성한 것이었을까?
물론 150년이 훨씬 지난 지금이야 신분과 계급의 차이는 중요하지 않을뿐더러 의미가 없는 시대가 되었지만 도시계획의 미명 아래 파리에서는 시민의 계급을 드러나지 않게 나누고 있었다.
아이러니하다. 파리 시민들이 그토록 부르짖었던 평등은 어디에 존재하고 있는 걸까?
운치와 낭만을 느끼려나 했는데 갑자기 삭막한 현실에 부딪치니 마음이 씁쓸하다.
씁쓸했던 마음을 뒤로하고 골목에서 나와 우리는 생 마르탱 운하(Canal St. Martin)로 향했다.
생 마르탱 운하(Canal St. Martin)는 1825년에 개통된 운하로 파리 북쪽에 위치해 있으며 원래는 파리에 음료수를 운반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운하였다.
총길이가 5Km나 되며 지금은 물높이를 조절하면서 유람선이 다니는 낭만적인 운하가 되었다.
수문이 닫힌 후 마치 폭포처럼 물이 쏟아져 내리는 장관 때문에 보는 이들을 즐겁게도 해준다.
파리의 센 강(Seine River)도 파리 시민들이 애정을 갖고 있지만 생 마르탱 운하 역시 현지 주민과 관광객들이 많이 찾는 장소이다.
북적거리는 사람들과 오고 가는 많은 유람선들이 있는 센 강 주변보다 생 마르탱(Canal St.Martin) 운하 주변이 더 여유 있고 한적한 건 확실하다.
특히 꾸며지지 않은 주변의 자연스러운 풍경, 운하와 함께 조성되어 있는 산책로와 철제 다리는 왠지 서민적 느낌이 들어 그런지 나도 덩달아 마음이 편안해진다.
운하와 경치가 어우러져 예술가들에게 영감을 불러일으키는 장소이기도 한 이곳은 지극히 파리의 서민적인 분위기가 풍기고 있으며 운하 주변에 늘어선 골동품 가게와 카페, 레스토랑 등도 파리의 분위기와는 조금 다른 듯도 하다.
그것은 여유와 편안함 그리고 한적함이었다.
생 마르탱 운하
벤치에 누워 커피를 옆에 두고 책을 읽는 사람들, 도란도란 담소를 나누는 커플들, 의자에 앉아 흐르는 강물을 우두커니 바라보고 있는 사람들....
심지어는 벤치에 앉아 아침부터 저녁까지 종일 느긋하게 여유 있는 시간을 보내는 파리지앵들도 많다고 한다.
어느 글에선가 파리의 시민들이 센 강보다 생 마르탱 운하에 더 애정이 많다고 하던데..
우리도 잠시 벤치에 앉아 멍한 채로 여유와 한가로움을 느껴본다.
운하를 잠시 보고 있으려니 영화 '아멜리에(Amelie)'에서 나왔던 대사, "행복을 따라가기엔 너무 버겁고 힘들어서 지친 사람들에게 잠시나마 위안이 되는 곳..."이라는 말이 떠오른다.
그런 장소가 바로 이런 곳이 아닐까?
일상에 얽매여 있는 찌든 생활과 피곤함에서 잠깐이라도 해방이 될 수 있는 편안하고 위안을 얻는 곳, 매일 반복되는 삶의 템포를 조금씩 늦추어 갈 수 있는 곳이 바로 여기라는 생각이 든다.
주인공 아멜리에가 생 마르탱 운하에서 한가롭게 물수제비를 뜨는 장면이 오버랩된다.
고집쟁이인 아버지와 함께 지내며 친구도 없이 혼자 놀기의 달인이 된 아멜리에가 무슨 생각을 하며 물수제비를 떴을까?
답답하고 힘든 상황에서도 좌절하지 않고 그녀 자신만의 기쁨과 행복을 찾아 나서는 야무진 소녀, 아멜리에! 결국 이 영화는 그녀 자신만의 소박한 행복을 찾은 아멜리에의 아름다운 미소로 끝을 맺는다.
생 마르탱 운하의 분위기도 영화 '아멜리에'와 많이 닮았다는 생각이 든다. 결코 화려한 행복이 아닌 소소한 기쁨과 그 기쁨이 모여진 작은 행복들이 가득 담겨 있는 곳이라는 생각에서 말이다.
그림 "생 마르탱 운하" by Alfred Sisley (1839-1899) 와 영화 "아멜리에"의 포스터
남편도 물수제비 뜨기를 시도해보는데 제법 물방울이 몇 번 튄다. ㅎㅎ
우리는 이곳 생마르탱 운하 벤치에 앉아 샌드위치와 커피로 점심을 해결하며 잠시 '파리지앵'이 되어볼까 했지만 늦은 아침식사를 한 탓에 좀 더 시간이 지난 후에 점심식사를 하기로 했다.
역시 누구나 파리지앵이 되는 건 아닌가 보다.
우리는 좀 더 걸어 19구에서 유명한 공원, 그리고 파리에서 가장 로맨틱한 공원이라고 알려져 있는 "뷰트 쇼몽(Parc des Butt Chaumont)"에 가기로 했다.
똑같은 바로크 양식의 공원이지만 파리 근교에 있는 베르사유 궁정의 정원의 기하학적인 디자인과는 달리 훨씬 더 자연스러움을 추구하는 듯 보였다. 하지만 자연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이 공원은 사실 100% 철저한 계획에 의거하여 만들어진 인공적인 공원이라고 한다.
파리가 재개발되던 때에 오스만 남작이 나폴레옹 3세의 지시를 받아 만든 공원이 바로 "뷰트 쇼몽"이다.
오스만(Haussmann) 남작은 쓰레기 더미와 교수대가 있던 채석장을 아름다운 전경의 언덕으로 바꾸어 놓았고 영국식 공원을 본떠 인공 바위로 호수와 섬을 만들고 거기에 로마 양식의 신전도 지었다. 그래서 그런지 뷰트 쇼몽 공원은 다른 공원에 비해 이국적이고 목가적인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공원의 높은 바위산에서는 가끔 자살하는 사람들이 있어 '자살자들의 산'이라는 흉측한 별명이 붙어 있기도 하다. 하필 이 아름다운 공원에 그런 별명이 붙어 있다니 안타깝다.
인공적으로 조성된 공원이지만 '인공적임'마저도 시간의 흐름 앞에서는 사라지고, 오히려 인공이라는 단어 대신 '자연스러움'이라는 말이 튀어나올 정도로 이 공원은 그렇게 변해있었다. 오히려 이렇게 되길 상상하고 계획했던 건 아니었을까?
고풍스럽기까지 한 나무들이 울창해져서 숲을 이루었고 폭포가 떨어지는 바위에서는 오랜 세월의 흔적을 느낄 수 있었다.
뷰트 쇼몽 공원
또한 절벽에서 서니 얼마 전에 보았던 몽마르트르가 멀리서 보인다. 이 상황도 모두 다 계획에 포함되어 있었던 걸까?
"너는 다 계획이 있구나."
역시 파리답다.ㅎㅎㅎ
뷰트 쇼몽 공원에서 보이는 몽마르트르
인간의 손을 거친 아름다운 자연과 더불어 한적하고 여유로운 오후 시간을 보내는 데 있어서 뷰트 쇼몽 공원은 우리에게 완벽한 장소였다.
이곳을 찾은 파리지앵들이 제법 많다. 낭만과 휴식, 그리고 힐링을 위해....
경사가 많은 이 공원은 언덕 어디를 보아도 잔디에 누워 책을 읽거나 하늘을 보고 있는 파리지앵들이다.
편안해 보이고 평화스럽다. 그리고 그들이 부럽다.
파리를 방문하면서 가장 부러운 것 중 하나가 넓고 아름다운 공원들이 이 도시에 정말 많다는 것이다.
삶에 지친 시민들이 언제든지 방문해서 몸과 마음에 새로운 충전을 하도록 편안하고 멋진 공원들이 개방되어 있는 것이다.
시민들이 건강한 삶을 누릴 수 있도록 하는 데에 예산을 가장 많이 투입하는 나라.
선진국이란 바로 이런 나라를 말하는 게 아닐까?
지금까지 내가 경험한 파리는 알다가도 모를 듯, 또렷이 분간이 안 되는 아리송한 도시이다.
더 많이 경험하고 느껴야 알 게 될까?
하지만 기껏해야 잠시 머물다 갈 외국 관광객에 불과한 내가 장구한 역사와 전통을 딛고 이루어 낸 그들의 문화와 삶을 얼마나 이해하고 제대로 받아들일 수 있을까?
아마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아마도 여행을 마치고 프랑스를 떠날 때까지 순간순간 내가 보고 겪으며, 감성과 이성을 통해 얻어지는 오로지 나만의 '파리 다움'을 느끼는 것만으로 만족해야 할지 모른다.
비록 아쉬움과 미련이 남는 여행이 될지라도 파리에서 머문 모든 시간은 내 오랜 추억으로 간직될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