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작은새 Jun 12. 2022

토요일 낮의 진부한 풍경 한 조각에 관한 짧은 시나리오

부대찌개 집의 풍경

#1


오거리 한 귀퉁이를 20년째 차지하고 있는 부대찌개집이 있다. 1미터 남짓한 폭을 가진 바깥 전면유리창에 붙어 있는 메뉴는 단촐하다. 부대찌개, 김치찌개, 라면 사리, 소주, 맥주, 막걸리. 폰트들도 하나 같이 옛날 폰트에 글자 곳곳에 세월의 흔적이 보이는 상처들이 보인다. 그 전면유리창 옆으로 가게 여닫이문이 열려 있다. 여닫이문 바로 앞에 있는 테이블에는 한 젊은 남자가 혼자 앉아서 근심 가득한 표정으로 끓고 있는 부대찌개를 멍하니 쳐다보고 있다. 그 대각선 안쪽으로 보이는 테이블에는 나이가 60-70 즈음 되어 보이는 아저씨 둘이 앉아서 이미 국물이 졸아버린 부대찌개를 가운데에 두고 대화를 나눈다. 아저씨 A는 겉으로는 멀쩡하지만 완전히 취한 말투다. 저 가게 안쪽으로는 사장님 내외분이 보인다.


아저씨 A : 야, 너 진짜 내가 진짜 좋아해 임마.

아저씨 B : 아유, 형님 요즘 저 힘듭니다.

아저씨 A : 야 그게 인생이야, 임마, 알아? 그렇게 살아 가는 거지 인생이 임마. 이렇게 사람 만나서 술도 같이 나녹거리고 하는 게 인생이라 이 말이야.

아저씨 B : (무어라 말은 하지만 카메라까지는 명확히 들리지 않는다)

아저씨 A : 야 진짜 너 좋아하는 사람이 이렇게 있다는 게 정말 축복이야, 알아?

아저씨 B : 알죠 형님.

아저씨 A : 술이나 좀 따라줘라 그럼, 어? 너도 임마 내가 이렇게 나오랄 때 나오니까 얼마나 좋아, 어? 근데 야 그 길성이 그 자식은 오늘 어디래?

아저씨 B : 오늘 등산가야 한다고 하더라고요.

아저씨 A : 그래서 안 온대?

아저씨 B : (우물쭈물한 표정으로 아저씨 A를 쳐다본다)

아저씨 A : 하이, 그 새끼 그거는 하여간 등산인지 탁구인지 무슨 그런 걸 하고 자빠졌냐 이 말이야. 사람이 그러면 안 된다고, 알아?


아저씨 A와 아저씨 B를 번갈아가며 움직이던 카메라가 홀로 앉은 젊은 남자 등 너머로 입구를 찍는다. 여닫이문으로 등산모자, 등산카파를 입고 등산가방을 메고 온 60대 정도 된 남자를 비춘다. 젊은 남자의 등은 밥을 먹는다기에는 조금 과하게 위아래로 움직이는 것이 마치 한숨이라도 푹푹 쉬는 듯하다.


아저씨 C : 야, 여기 화장실 어디야.

아저씨 A : 아니, 왔네. 아니 저기 옆으로 돌아가면 바로 있어 바로. (아저씨 C가 화장실로 가듯 문을 열고 나가자마자) 야, 저 놈 보게 저거. 그래도 왔네.

아저씨 B : (겸연쩍게 웃는다)


아저씨 C가 다시 열린 문으로 들어오며 잠깐 혼자 밥을 먹는 젊은 남자와 눈이 마주친다. 젊은 남자는 초점을 잃은 눈으로 지나가는 자동차들에 시선을 던지고 있었다. 아저씨 C는 그 표정에 흠칫 놀랐다가, 아저씨 A가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퍼뜩 자신의 친구들이 있는 곳을 바라본다.


아저씨 A : 아이고 이녀석 왔네, 야 아주 그냥 무슨 운동에 바람이 났냐?

아저씨 C : (등산 가방을 옆에 내려놓으며) 아니, 넌 무슨 낮부터 술이야. 좀 술 좀 적당히 먹어라, 어? 내가 등산이나 같이 가자고 했잖아.

아저씨 B : 형님, 오셨어요.

아저씨 A : 오자마자 아주 바가지를 긁어라 긁어 새꺄. 내가 너한테 바가지 긁힐라고 지금 여기 오라했냐? 아주 나 인생이 힘들어 죽겠다고 이 새꺄.

아저씨 C : 이 새끼는 맨날 인생이 힘들대. 볼 때마다 그런 소리나 하고 앉아있냐.

아저씨 A : 수염키우면 다냐 이 새꺄. 앉어, 뭐 시킬래. 한 명 새로 왔는데 어? 하나 또 새로 시켜얄 거 아녀. 오늘 나 5만 원 짜리 들고 왔으니까 마음껏 먹으라고. 사장님, 이거 5만 원으로 다 되죠? 뭐 먹을래 김치찌개?


사람 좋은 듯 웃는 바깥사장님은 이런 손님들이 이미 익숙하다는 듯 웃음으로 대답을 얼버무린다. 시간이 조금 지났는지 카메라는 다시 바깥에서 가게 안쪽을 비춘다. 젊은 남자는 어느새 부대찌개 불을 끄고 마지막 남은 밥을 느리적느리적 밀어넣고 있다. 안쪽 아저씨들 테이블은 몸짓만 봐도 왁작왁작한 것이 느껴진다.


아저씨 A : 야, 재밌게 살아야지 안 그래? 어? 내가 임마 김광석이야 내가. 어, 김광석이라고.

아저씨 C : 야, 새로운 말 좀 하란 말이야. 이 새끼는 맨날. 어우, 그냥 하던 소리 또 하고 내가 그 소리만 몇 백 번은 들었겠다. 새로운 소리 좀 하라고 새로운 거.

아저씨 A : (호탕하게 웃으며) 야, 이 친구가 너 진차 좋아해, 진짜로.

아저씨 B : 그럼요, 형님, 보고 싶었습니다.
아저씨 A : 어찌나 나한테 너랑 같이 보자고 보챘는지 알아?

아저씨 C : (겸연쩍게 웃는다)

아저씨 A : 인생이 뭐 별 거 있냐? 그런 거야, 그런 거라고. (사장님이 끓고 있는 김치찌개를 가져다준다) 야, 먹어.

아저씨 B : 아우, 형님 저는 배불러서.

아저씨 A : 아니 이 새끼야 형이 먹으라믄 먹는 거지 뭘, 말이. 어. 

아저씨 C : 아니 왜 그래, 먹고 싶어야 먹고 그러는 거지. 사장님 잘 먹겠습니다.

아저씨 A : 넌 임마 왜 맨날 나한테만 그러냐아.


왁작한 테이블과 카메라 사이로 젊은 남자가 지나간다. 카메라가 안사장님과 젊은 남성을 비춘다. 젊은 남성은 목소리가 약간 무언가에 받친듯 과장된 톤이지만 꼭 해야 할 말은 해야겠다는 투로, 사장님, 마늘이 많이 들어가서 참 맛있네요, 네 여기 이 동네는 처음입니다. 저기 요 앞에 있는 대학교 옆에 살거든요, 네, 친구들 데리고 자주 오겠습니다, 술도 한 잔 해야죠 하하, 한다. (여기서부터 카메라가 한 장면 한 장면을 조금 더 긴 호흡으로 담아낸다) 카메라가 다시 입구로 나가는 젊은 남성을 따라가지 않고 안사장님의 즐거운 표정을 잡아낸다. 뒤이어 지루하다는 듯 빈 식탁에 앉아 익숙한 손놀림으로 손가락을 튕기고 있는 바깥사장님의 상반신을 잡고, 뒤이어 왁자지껄한 아저씨들 테이블이 비치는 거울을 잡는다. 뒤이어 다시 젊은 남성이 앉아 있던 테이블에는 적당히 남은 반찬과 비워진 밥그릇, 바깥으로 지나다니는 행인들이 보인다. 그 풍경들 위로 계속해서 거나한 아저씨 A의 목소리와 왁작한 소리들이 담겨 있다.


매거진의 이전글 골목길에 얼룩이 번졌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