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 시작부터 병이 났다. 연말부터 어깨가 심하게 쑤시고 골골대더니 목 주변에 수포가 오르기 시작했다. 병원에 가니 대상포진이라 한다. 젊으니까 심하게 아프진 않겠지만 아이에게 옮을 수 있으니 조심하라고.
사실 몸이 아픈 것보다는 정신적으로 힘들었던 게 더 컸다. 연말이라 그런지, 산후우울증이 이제야 온 건지 유달리 외로웠다. 집까지 놀러 와 주는 친구도 있고, 육아 고민을 나눌 친구도 있고, 모르면 물어볼 육아 선배인 언니도 있고, 육아를 열심히 돕는 남편도 있는데. 그럼에도 이유 모를 마음의 쓸쓸함이 있었다. 청소년의 사춘기처럼 육아를 하는 엄마에게는 문득 이렇게 마음의 사춘기가 오곤 한다. 마치 세상에서 내가 제일 힘든 엄마인 양 투정 부리게 된다.
아이에게 옮을 수 있다는 말에 남편은 다음 날부터 휴가를 써서 육아를 전담했다. 나는 안방에 누워 휴식을 취했지만 마음이 계속 불안했다. 이미 아이와 많은 접촉을 했는데 이미 옮은 거면 어쩌지? 아이가 울고 있는데 아빠가 잘 보고 있는 걸까? 며칠 뒤에 친정에 가기로 했는데 그전까지 나을 수 있을까? 남편이 휴가를 계속 쓸 순 없는데 언제쯤 수포가 사그라들까?
거기에 친할머니가 편찮으셔서 응급실에 실려갔다는 소식까지 들려 내 마음은 더 무거웠다. 어느 쪽이든 내 소중한 사람이 아픈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았고, 아픈 원인이 내가 되거나, 그 아픔 옆에 내가 있어주지 못했을 때의 죄책감이 컸다.
그렇게 막막한 마음이 들던 와중, 엄마가 우리 집으로 오겠다고 말했다. 친정은 차로 3시간 거리. 결코 쉽게 올 수 있는 거리가 아니다. 게다가 엄마는 장기이식을 받은 사람이라 면역억제제를 복용하고 있어서 대상포진의 전염에 아기보다 더 위험성이 높은 상태다. 평소 손목도 약해 아이를 돌보는 일을 부탁할 수 없었던 사람이기도 하다. 그런데 우리 집으로 오겠다니. 머리로는 '엄마 몸을 챙겨야지, 난 괜찮으니 안 와도 돼'라고 생각했지만 마음으론 반가운 생각이 들었다. 생각지도 못했던 엄마가 날 위해 와 준다니 철없게도 기쁜 마음이 먼저 들었다.
엄마가 오기로 한 날이 가까워졌을 때 즈음, 내 몸은 많이 회복이 되었다. 수포가 조금 퍼지는 듯하더니 금방 사그라들었고 가장 심했던 부위는 딱지가 앉기 시작했다. 근육통이나 어지럼증 같은 증상들도 좋아져, 아이와 접촉하지 않는 선에서 아이와 놀아줄 수 있게 됐다. 정작 몸이 회복되고 나니 이대로 엄마를 오라고 해도 되려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몸도 약한 엄마를 이 추운 겨울 오라 가라 해도 되는 것일지. 엄마에게 묻자 엄마는 그래도 오겠단다. 아직 다 나은 것도 아니고 오히려 이럴 때 더 잘 챙겨 먹어야 한다고. 가서 반찬이라도 해주고 오겠다고.
그렇게 엄마가 오는 날, 나는 크리스마스 선물을 기다리는 아이처럼 엄마를 기다렸다. 아이에게도 연신 '할머니가 오신대. 빨리 오시면 좋겠다. 이따 오시면 잘 웃어 드려야 해'라며 당부를 했다. 엄마는 오자마자 어떤 반찬을 해줄지, 오늘은 무엇을 해먹을지, 그 재료는 다 있는지 확인했다. 엄마는 채소를 가득 넣은 된장찌개를 끓이고, 내가 가장 좋아하는 엄마표 김밥 재료를 준비했다. 아이 반찬 줄 게 없다고 하자 멸치볶음과 어묵볶음, 감자채 볶음을 만들었고 내가 가장 먹고 싶었던 반찬도 가득 만들어주었다.
같이 밥을 먹으면서는 그동안 내가 왜 외로웠는지, 왜 골병이 나도록 스스로를 혹사시킨 건지 쉴 새 없이 떠들었고 엄마는 내 말에 동조를 해주었다. 반찬을 한바탕 만들고 나서는 엄마 취향의 영화를 찾아 함께 보았다. 아이가 하원하고 나서는 이것저것 책을 함께 읽으며 아이가 얼마나 많이 컸는지 이야기를 나눴다. 엄마와 나누는 소소한 일상들이 이유 모를 내 외로움을 채워주었다. 나는 엄마에게 혼자 밥을 먹지 않아서, 혼자 아이 돌보느라 고군분투하지 않아서 좋다고 말했다.
엄마는 사랑으로 날 키웠지만, 어쩔 수 없이 나에겐 결핍이 있었던 것 같다. 맞벌이였던 엄마는 항상 바빴다. 내가 기억하는 엄마는 항상 빠르게 앞에서 걷고 있었다. 내가 뒤처져도 뒤돌아보지 않았던 뒷모습이 어린 나에게 작은 상처로 남았던 것 같다. 내가 엄마가 되고 보니 뒤돌아볼 틈도 없었던 엄마의 마음을 생각하게 됐다. 집안의 맏이로 자라 딸 중 유일하게 대학 진학을 하고, 쉴 틈 없이 공부해 졸업하자마자 취업을 하고, 몸 성한 곳 없는 지금까지 스스로 채찍질하며 달려온 엄마. 나와 똑 닮은 성격의 엄마는 자신이 먼저 걸어가 길을 찾아놓지 않으면 안 된다는 부담감이 있었을 것이다. 잠시 주변 풍경을 돌아보거나 뒤처진 사람의 속도를 신경 쓸 겨를도 없었을 테다. 엄마가 그렇게 분주히 걸어준 덕분에 나는 길을 잘 찾았고 그렇게 목적지에 다다를 수 있었다. 내 기억엔 날 기다려주지 않은 엄마의 뒷모습이 각인되어있지만 사실, 엄마는 먼저 도착해 나를 묵묵히 기다리고 있었을 것이다.
그렇게 2박 3일을 보내고 엄마는 아침 버스를 타고 떠났다. 버스 터미널로 가기 위해 택시를 타는 엄마를 창문 밖으로 바라보았다. 어릴 적 그렇게나 봐왔던 엄마의 뒷모습이지만 이제는 엄마의 부담감도, 나의 서운함도 남아있지 않았다. 엄마는 내 인생의 롤모델이었고, 선생님이었고, 때로는 무서운 감독관 같았지만 결국 나는 엄마에게 이런 걸 바라 왔던 것 같다. 나를 바라봐주고, 걱정해주고, 내가 좋아하는 것을 기억해주고, 함께 밥을 먹어주고, 이제까지 수고했다 토닥여주는. 내가 아이에게 '잘한다, 예쁘다, 대단하다' 외쳐주듯이, 나 또한 엄마에게 그러한 것을 원했나 보다. 그리고 엄마가 때로는 말로, 때로는 행동으로, 때로는 눈빛으로 마음을 전할 때 마음속 외로움이 걷혀 가는 것을 느꼈다.
나의 완쾌와 함께 친할머니도 무사히 회복해 퇴원을 하셨다. 내 목에 났던 딱지들도 떨어져 나가 아이를 원 없이 안으며 놀아줄 수 있게 되었다. 냉장고에는 엄마가 해 둔 나와 아이의 반찬이 가득 있어 당분간은 메뉴 고민을 안 해도 된다. 그저 엄마가 왔다 간 것뿐인데 그 사이 내 걱정과 고민들이 해결되어 있다. 아이가 날 보면 그렇게 웃고, 내가 안 보이면 그렇게 울던 것이 이제야 이해가 된다. 엄마도, 엄마를 보니 좋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