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아 메이트인 친구가 내게 육아관을 물었다. 아기 어린이집 입소신청서를 쓰다가, 육아관에 대해 쓰는 부분이 있다며 자신의 육아관을 일목요연하게 적어낸 종이를 보여주었다. 자기 일에만 계획적이고, 육아에 대해서는 흘러가는 대로 살던 나는 순간 머리가 띵해지는 것을 느꼈다. 아, 나 정말 아무 생각 없이 애를 키우고 있었구나.
집에 돌아온 남편을 붙잡고 대뜸 우리 육아관에 대해 토론해보자고 자리에 앉혔다. 생각해보니 우리 육아관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 아기 낳고 병원에 있을 때. 우연히 TV에서 아이에게 책 읽기를 강요하는 부모 사례가 나오는 걸 보면서 남편은 "정작 본인은 읽지도 않으면서 왜 아이한테 책을 읽으라 하는 거냐"며, 자신은 같이 책 읽고 공부하는 아빠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그의 평균 독서량은 1년에 1권 정도)
자연스럽게 육아관에 대한 물꼬가 트인 우리는 이상적인 이야기를 늘어놓으며 밤늦게까지 토론을 했었다. 아이가 17개월이 된 지금, 비슷한 이야기를 하며 우리는 또 한참을 떠들었다.
토론을 통해 도출해낸 우리의 육아관은 아래와 같다.
[아이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자]
우리는 둘 다 내성적, 내향적인 기질을 타고났다. 어릴 적 말수가 너무 없어서 주변의 걱정을 샀다는 것은 우리 둘 사이의 공통적인 부분이었다. 나는 초등학생 시절, 학교에서도 교회에서도 말을 하지 않고 눈도 마주치지 않아서 그 모습을 본 엄마의 지인들이 하나같이 입을 모아 걱정을 했다 한다. 사회성이 너무 떨어지는 것 같다며. 그랬던 나는 활달한 친구들을 만나고, 대학시절 학보사 기자로 길거리에 내던져지고, 매일 발표과제를 하고, 회사생활을 시작하면서 사회성을 충분히 길렀다. 지금은 쌩얼로 유튜브 영상에 출연할 정도라, 엄마는 걱정을 하던 그 지인들이 지금의 너를 보면 깜짝 놀랄 것이라 했다.
남편 역시 남부럽지 않은 내성적인 사람. 어릴 적 친척 어른과 식당에 갔다가 "이번에는 주문을 네가 해보라"며 윽박지르는 모습이 지금도 트라우마처럼 남아있다고 했다. 어린 시절의 일인데도 너무나 생생하게 기억에 남는다며, 결국 알아서 잘 자랄 건데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받아들이지 않은 그 시절 육아법이 잘못됐다고.
아마도 우리 아이는 우리를 닮아 내성적인 아이가 될 것 같다. 그럼에도 우리는 억지로 사회성을 길러주겠다는 이유로 원치 않는 친구를 갑자기 만들어주거나, 본인이 원치 않는 무대에 밀어 넣는 행동을 하지 않을 것이다. 어린아이가 올바르게 자랄 수 있도록 길을 터주는 것은 필요하지만 '너는 틀리고 우리가 말하는 것이 맞다'라고 우기며 아이를 정신적 낭떠러지로 밀어 넣지 않을 것이다. 너는 조금 내성적이고 때로는 어떤 것을 잘 해내지 못할지라도 여전히 내가 가장 사랑하는, 나의 아기일 것이라고 말해줄 것이다.
[항상 잘하는 아이가 아니어도 된다]
나와 남편은 둘 다 형제가 있다. 나는 언니, 남편은 남동생. 둘 다 형제보다 공부를 잘하는 편이라 어린 시절 비교를 많이 받았다. 물론 우리가 '좋은 쪽'이었지만 결론적으로 우리에게 그 칭찬은 좋은 것이 아니었다. 나는 언니보다 공부를 조금 잘하는 것 빼고는 잘하는 것이 없는 사람이라 생각하며 살았다. 나에게 들리는 칭찬은 '공부 잘한다'뿐이었기 때문에 그 외에는 모두 부족하다고 생각했다. 남편은 자신이 공부에서만큼은 두각을 드러냈기 때문에 항상 그 자리를 유지해야 한다는 부담감이 있었다고 한다. 그 결과 자신이 잘할 것이라는 확신이 들지 않는 일에는 절대 도전을 하지 않게 되었다고.
얼마 전 아빠와의 통화에서도 같은 맥락의 이야기가 나왔다. '칭찬의 역설'. 조카가 퍼즐을 잘 맞추는데, 양손으로 두 개의 퍼즐을 동시에 맞출 정도였다. 잘한다고 연신 칭찬을 하다, 어른도 맞추기 어려운 장식용 퍼즐을 맞춰보라고 건네주었다. 조카는 조금 해보고는 어려운 건 안 한다며 쉬운 퍼즐을 찾았다. 아빠는 결과에 대한 칭찬이 아니라 새로운 것, 더 어려운 것을 시도하는 것, 즉 과정에 대한 칭찬을 해주어야 아이가 성장할 수 있다고 했다.
우리 모두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실제로 실행하기는 참 어렵다. 아이가 무언가를 해내는 모습을 보면 너무나 기특해서 나도 모르게 '잘한다'는 말이 나온다. 표면적인 것, 결과에 대한 칭찬이 좋지 않다는 걸 알면서도 눈에 보이는 것에 생각 없이 칭찬을 한다. 대부분 실패하고 가끔 성공하는 모습을 보며, 나도 모르게 성공했을 때만 환하게 웃거나 크게 소리 내며 칭찬을 한다.
과정을 칭찬하기 위해서는 아이가 새로운 시도를 시작하는 순간부터 실패하는 모든 과정을 낱낱이, 면밀하게 지켜봐 주어야 한다. 넋 놓고 아이가 노는 것을 바라보다가 성공할 때만 칭찬했던 과거의 나를 반성하며, 앞으로는 너의 모든 시도와 실패를 지켜보며 '새롭게 도전하는 것을 무서워하지 않는 아이', '실패하더라도 다시 시작하는 것에 두려움이 없는 아이'로 길러내고 싶다.
[아이와 같이 공부하는 부모가 되자]
나는 육아에 대한 로망이 있는데 아이와 함께 동화책을 만들고, 아이와 함께 역사공부를 하는 것이다. 아이와 대화를 나눌 수 있는 때가 되면 우리 마음대로 주인공을 정하고 떠오르는 대로 스토리를 만들어 볼 것이다. 손 가는 대로 그려낸 엉망진창 그림을 차곡차곡 모아 우리만의 동화책을 만들고 싶다.
항상 역사에 대한 지식이 부족하다고 느끼는 입장에서 아이가 역사에 대해 물으면 답해줄 수 없을 것 같으니 애초에 같이 공부를 하고 싶다. 최근 '공부왕찐천재' 채널의 홍진경이 딸 라엘이와 역사만화를 그리는 과정이 나왔는데 내가 하고 싶었던 것이 딱 그 모습이었다.
엄마는 세상 모든 일을 다 알진 않아. 사실 모르는 게 더 많지. 너보다 잘하는 게 있다면 '내가 무엇을 모르는지 알고, 그에 대한 답을 찾는 방법을 아는 것'일 거야. 때로는 책에서, 때로는 TV에서, 때로는 직접 눈으로 보면서 새로운 정보를 찾아가고, 배우고, 기억하고 싶어. 아마 그렇게 찾아낸 답은 엄마가 암기식으로 외웠던 어떤 지식들보다도 오래 기억에 남을 거야.
반면 파워 이과인 남편은 수학이나 과학을 같이 공부하고 싶다 한다. 아이가 '하늘은 왜 파란 거야?'라고 물었을 때 우쭐하며 답을 말해주는 것이 아니라 '왜 그런 걸까?' 하며 같이 답을 찾아가고 싶다고. 파워 문과인 엄마는 이야기를 만드는 방법과 역사 이야기를, 아빠는 세상이 돌아가는 원리에 대해 '함께 행동하고 함께 생각하고 함께 공부하는 부모'가 되고 싶다.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누워있으면서 아이에게 공부하라고 윽박지르는 그런 부모가 되지 않을 것이다.
크게 정리하면 이 정도지만 사실 모든 이야기의 기저에는 '자존감 높은 아이'로 길러내고 싶다는 생각이 깔려있다. 몇 번을 실패해도 자책하지 않고, 무언가를 못하는 사람이라고 해도 여전히 자신을 사랑하며, 내가 진정 좋아하는 일이 무엇인지 잘 아는 아이가 되었으면 한다.
우리는 그렇게 자라지 못했다. 스스로 참 잘 컸다고 생각하면서도, 나는 여전히 나를 온전히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이라 다시금 '자책'한다. 내가 나를 대하는 태도가, 훗날 아이가 나를 대하는 태도 그리고 본인을 대하는 태도가 될 것임을 알면서 다시 또 그렇게 행동한다.
아가야, 엄마 아빠는 네가 스스로를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으면 해. 그렇게 너를 길러내기 위해 우리는 우리의 과거, 때로는 아팠고 때로는 슬프기도 했던 그 시절을 떠올리면서 지금의 나를 받아들여 보려고 해. 너를 멋진 사람으로 길러내기 이전에 내가 그런 사람이 되어야 하니까, 나는 나를 사랑할 줄 아는 멋진 사람이 되어보려 해. 너는 나와 다르게 자랐으면 하면서도, 나날이 나를 닮아가는 너의 얼굴을 보며 행복감을 느끼곤 해. 언제까지나 지금처럼 그렇게 나를 닮은 얼굴로 나를 바라보며 웃어주었으면 해. 나 또한 스스로에게 웃어줄 수 있는 사람이 될 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