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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 재건 계획 3. 온실

식물 말고 다른 거 키우는 온실

by 이든









이직을 할 수도 있었겠지만...

언젠가는 내 것을 하겠다는 마음을 항상 품고 살았던 나는 지금이 그 기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몇 개월 동안 뭘 시작할지 정하지도 않고는 그저 임대 놓인 상가를 둘러보곤 했다. 동네마다 시세가 어느 정도 되는지도 궁금했고, 이런저런 형태의 상가를 둘러보다 보면 뭔가 영감이 떠오르지 않을까? 기대도 있었다.




그러다 어느 날 운명처럼 한 상가를 발견하게 됐다. 광안리 해변 근처에 있는 구옥 2층이었는데 아담하고 포근한 곳이었다. 처음 이 상가에 발을 딛었을 때, 마법처럼 눈앞에 서점 겸 카페의 모습이 생생하게 그려졌고 그 환상에 취해버린 나는 그날 저녁 덜컥 그 상가를 계약해 버렸다.

그리고 바로 다음 날, 가게 이름과 로고를 뚝딱 만들어 버렸다.

'책방 온실'

어느 순간부터 나의 공간이 생긴다면 ‘온실’이라는 이름을 붙여야겠다고 생각해 왔었다. 미국 출신 방송인인 타일러 라쉬가 한 방송에서 했던 이야기가 계속 마음속에 남아있었기 때문이다.

타일러가 보는 우리나라 사람들의 특징 중 하나는 남에게 좋은 말을 해주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만약 누군가가 하고 싶은 일이 있다고 이야기하면 우리나라 사람들은 ‘그게 되겠니?’, ‘그것보단 차라리 다른 거 하는 게 더 낫지 않겠니?’, ‘그거 내가 해봤는데, 안돼.’ 등, 그 일을 하면 안 되는 이유만 계속 이야기한다는 것이다. 그는 그러지 말고 할 수 있다고 해보자고 격려해 주고 응원해 주는 서로의 온실 같은 사람이 되자는 것이다. 온실... 그의 말이 오래도록 마음속에 맴돌았다.

늘 하고 싶은 게 많은 하고잡이 일인으로써, 주위의 반대에 수없이 부딪혀 본 일인으로써, 그 말이 너무 공감됐다. 그냥 무조건 믿어주고 응원해 주는 것, 얼마나 감사하고 귀한 일인가. 그때부터 만약 내가 어떤 공간을 만든다면 꼭 서로를 응원해 주는 온실 같은 공간을 만들어야겠다고 다짐했던 것이었다.




이름을 결정하고, 인테리어를 하고, 집기와 가구를 구매하고, 메뉴도 정하고, 책장에 책도 채워 넣고, 온실이라는 이름에 맞게 화분과 식물들로 가득 채우고, 정말 정신없는 3개월을 보냈다. 가장 힘들었던 건 책장에 책 600권을 꽂는 일도 아니었고, 대출받으러 은행에 다니며 조마조마할 때도 아니었다. '결정'이 가장 힘들었다. 그동안 한 회사의 일원으로서 맡은 일만 해오던 내가, 하나부터 열까지 모든 일을 스스로 판단해서 결정하고 전적으로 책임져야 한다는 점이 가장 힘들었다. 포스 기는 어떤 회사 제품을 사용할 건지, 어떤 나무를 어디에 놓을지, 커피 잔은 어떤 디자인의 어떤 재질의 무슨 용량의 컵을 사용할지, 큰 것부터 작은 것까지 결정해야 하는 것들이 왜 그렇게 많은 건지... 하지만 내가 기획하는 내 공간이 생긴다는 것, 그 모든 힘듦과 스트레스를 기꺼이 버텨낼 수 있는 설렘이었다.




'책방온실'에서는 크게 도서, 문구, 카페 세 가지 카테고리의 상품을 판매하고 있다.

책은 직접 선별하여 입고한다. 추천받은 책도 있고, 직접 읽은 책도 있고, 잘 모르지만 설명만 보고 데려오는 책도 있다. 하지만 나름의 명확한 입고 기준이 있다. 꿈을 찾고, 이루는데 도움이 되는 책이어야 한다.

소설/예술 책은 여러 가지 이야기 속에서 삶에 대한 영감을 찾고 취향을 찾기 위한 마음으로,

에세이는 다른 사람의 삶 속에서 꿈을 찾거나 이루는 방법에 대한 힌트를 찾기 위한 마음으로,

인문/사회/자연과학 책에서는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을 알고 자신의 꿈을 펼칠 공간을 이해하길 바라는 마음으로,

마케팅/경제/경영/자기계발 책에서는 하고 싶은 일을 실질적으로 시작할 수 있도록 현실적인 도움을 얻길 바라는 마음으로,

글쓰기 책에서는 글쓰기를 통해 진정한 자신을 마주하고 원하는 게 뭔지 발견하길 바라는 마음으로,

심리/건강 책에서는 꿈을 이루기 위한 노력을 포기하지 않고 계속해서 해 나갈 수 있는 힘을 키우길 바라는 마음으로 입고하고 있다.




문구도 독서용품, 글쓰기용품을 주로 입고한다. 그중에는 '세르아레브'라는 브랜드로 제작하여 판매하는 굿즈들도 있는데, 직접 기획하고 디자인한 제품들이다. 독서노트, 50권 챌린지 스티커, 책갈피, 연필, 스마트폰 파우치 등을 판매하고 있다. 예전 아이돌 덕질시절, 굿즈 만들어 팔던 경험이 이렇게 도움이 될 줄이야... (이렇게 보면 참 뭘 하더라도 지독하게 해 보면 버릴 경험이 하나도 없다. 다 피가 되고 살이 된다.) 그 외에도 기성품인 노트, 메모지, 연필, 볼펜, 등이 있다.




카페 메뉴에는 커피 6종, 라떼 3종, 티 6종, 에이드 3종, 파운드케이크 4종을 판매하고 있다. 정말 최소한의 메뉴만 있는 심플하고도 알찬 카페다. 디카페인 원두도 있다. 카페 메뉴를 정하는 것에도 많은 고민이 필요했다. 맛있고 퀄리티 높은 커피콩을 찾는 것, 맛있는 레시피를 찾는 것, 커피를 안 마시는 손님들을 위한 다양한 메뉴를 갖출 것, 어린이도 마실 수 있는 메뉴가 있을 것, 만드는데 큰 소음이 나지 않을 것 등을 고민했다. 가끔 손님들이 '북카페라고 해서 커피는 기대 안 했는데 너무 맛있어요!' '북카페 아니라 디저트 맛집이에요!'라고 말씀해 주시는데, 그게 그렇게 뿌듯할 수가 없다.




그 외에도 도서관에 책을 납품하기도 하고, 독서모임, 북토크도 한다.

그리고 진짜 다른 사람들과 같이 꿈을 키워 보기 위해 '온실팸'이라는 프로그램을 시작하려 한다. 같이 책 읽고 생각과 영감을 나누는 '리딩클럽', 한 가지 주제로 즐겁게 수다 떠는 '토킹클럽', 하고 싶은 일을 찾고 할 수 있도록 서로 응원해 주고 다독여주는 '드리밍클럽', 같이 글을 쓰고 생각을 나누는 '라이팅클럽', 여러 가지 다양한 활동을 같이 해보는 '하비클럽' 이렇게 다섯 가지 소모임 활동을 계획하고 있다.




가게를 준비하면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던 점은 '해도 될 것과 하지 말 것을 구분하자.'였다. 그래서 책도, 문구도, 카페 메뉴도 내가 판매할 것과 판매하지 말 것을 구분하려 나름 무척 애쓰고 있다. 남의 가게에서 좋아 보이는 것이 내 가게에서는 좋지 않을 수 있다. 옆 가게가 어린이 동화책을 많이 팔아서 매출이 높다는 이야기에 흔들릴 필요 없고, 귀엽고 반짝이는 예쁜 굿즈들로 가득 채워진 매대를 부러워하지 않아도 되고, 화려하고 맛있는 케이크와 디저트로 가득 찬 쇼케이스에 주눅 들 필요 없다. 남이 가진 걸 부러워하다 내가 가진 소중한 걸 놓칠 순 없지 않나. 내가 할 수 있는 걸 알고 거기에 집중하면 된다. 그러면 그걸 알아주는 나와 취향이 비슷한 사람들이 그걸 알아줄 거다.




어느덧 가게를 오픈한 지 10개월이 되었다. 그동안 크고 작은 사건들도 많았고, 기쁘고 힘든 일도 많았다. 앞으로 또 어떤 일이 일어날지, 그 일은 어떻게 헤쳐 나가게 될지 두렵고 설레고 긴장되는 날들의 연속이지만, 내가 기획하는 내 공간이 있다는 것, 나의 새로운 세상에서만 가능한 일임에는 틀림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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