졸업 15년 만에 다시 1학년
소설을 읽고 독서모임 하는 게 참 재미있다.
한 사건을 두고 다른 감정을 느끼고, 각자 다른 인물에 감정이입 하고, 같은 대사도 다르게 듣는다. 그리고 그 다름을 나누는 게 참 재밌다. 소설은 읽는 사람에 따라 각기 다른 흔적을 남긴다. 종이 배경에 따라 같은 물감이라도 다른 색으로 보이듯, 같은 책을 읽어도 모두 다른 내용이 남는다. 그걸 꺼내보여 타인과 나누는 것이 공감과 이해의 시작이다.
아쉬움이 있다면, 내 인생이 어느 정도 무르익고 나서 이 활동을 시작했다는 점이다. 어렸을 때, 학창 시절에, 적어도 대학을 졸업하기 직전에라도 이런 경험을 해봤더라면... 지금의 나는 또 다른 사람이 되어 있지 않았을까, 더 나은, 더 단단하고 넓은 사람.
독서모임, 오히려 중/고등학생에게 정말 필요한 활동이지 않을까? 톡톡 튀는 학생들과 하면 더 재미있을 것 같은데...
어느 날 문득 떠오른 이 생각이 커졌다 작아졌다 희미해졌다 선명 해졌다를 반복하며 한동안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고, 청소년을 상대로 하는 독서모임, 한번 해 볼까? 결국 거기까지 이어지고 말았다.
청소년이라고는 만나 볼 기회도 없고, 잘 알지도 못하는 내가 어떻게? 내 능력이 감당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이 생각은 한동안 계속되었다.
결국 정신 차려보니 한국방송통신대학교 청소년교육복지심리학과에 입학하여 수업을 듣고 있는 날 발견하게 됐다. 이게 이렇게까지 할 일인가. 이게 맞는 건가. 한 학기의 1/3 지점이 지나서야 그런 생각이 들었다. 가게 운영하랴, 육아하랴, 집안 살림하랴, 편히 쉬기에도 모자란 이 귀한 시간에 말이다. 문득 후회와 회의가 몰려오면 꿀떡 집어삼켜버린다. 내 몸 밖으로 그것들이 나오지 못하도록. 내 몸 밖으로 나오면 실체가 되어 영향력을 가지게 될까 봐. 이왕 시작한 거 한 학기는 마쳐봐야지..! 뭐라도 되겠지!라는 마음으로...
아무런 목적 없이 그냥 흘러가는 대로 내버려 뒀던 지난 대학시절과는 확실히 다르긴 달랐다. 가장 큰 차이점은 진짜 듣고 싶은 과목만 강의계획서를 꼼꼼히 살펴보고 선택해서 듣게 된다는 것이다. 이전에는 수업을 선택할 때 고려해야 할 사항들이 많았다. 강의실은 먼지, 수업시간은 언제인지, 쉬운 수업인지, 과목 구분은 어떻게 되는지, 몇 학점짜리 수업인지, 같이 들을 친구가 있는지... 나에게 필요한 수업인지 아닌지만 중요한 지금과는 다르게 말이다. 지금은 딱 필요한 수업을 발견하게 되면, 이런 수업을 들을 수 있어서 다행이라는 마음까지 생겨난다. 한 톨의 지식도 놓치지 않겠다는 집념까지 생겨나는데, 이래서 공부하는데 목표와 목적이 중요하다고들 하는 것이다.
방송통신대학이지만 비대면으로만 이루어지진 않고, 출석수업을 가야 하는 경우가 있다. 얼마 전 출석수업을 다녀왔다. 전국의 모든 출석수업을 교수님이 진행하는 건 아니고, 지방 본부의 수업들은 대부분 지인이나 제자에게 맡기는 모양이었다. 이번에 만나게 된 강사님 중에 우리 과 출신 선배님도 있었다. 그분은 40대 후반이 되어서야 새로운 뭔가를 시작해보고 싶다는 생각으로 이 과에 편입했고, 더 공부하고 싶다는 욕심으로 10년 동안 석/박사 학위를 취득하고, 수련에만 2-3년 걸리는 자격증을 따서 지금은 모 대학 상담센터장으로 일하면서 시간강사 일도 하신다고 한다. 자녀도 세명이나 있다고 하시던데.... 말이 쉽지, 그분의 담담한 목소리에서 그 간의 고생이 보이는 것 같아 존경심이 솟구쳤다. 그분도 공부를 시작할 때 10년 뒤, 이 자리에서 후배들에게 수업을 하고 대학에서 강의를 하게 될 거란걸 상상이나 하셨을까...?
새로운 공부를 시작한 지금의 나는 상상도 못 할 10년 뒤의 나는, 어떤 모습일까? 지금의 목표대로 청소년 대상 독서모임을 활발히 하고 있을까? 아니면 생각지도 못한 다른 길을 찾아 또 다른 인생 도시를 건설해서 살고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