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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RN Jul 13. 2021

왜 회사를 떠나야 했을까 -2

대리급 연구원 편

 대리급 연구원은 정말 바쁘다. 하루 8시간을 쉴 새 없이 쪼개서 산다. 머리를 사용하기보다는 몸이 기억해서 움직이는 일이 대부분이었다. 매일 1만 걸음 이상씩 걸었다고 보면 될 듯하다.

 일이 익숙해진 만큼 새로운 미션들이 추가된다. 예산, 자산, 안전과 같은 관리업무를 슬슬 배우기 시작한다. 용어조차 생소한데 이걸 처리해나가야 하니 머리가 아파진다. 슬픈 건 이걸 아무리 열심히 해도 실적으로 인정해주지는 않는다는 사실이다.

 아침 5시 30분에 기상해서 6시쯤 시내버스를 타고 6시 30분에 셔틀버스로 갈아탔다. 그러면 회사는 7시 15분쯤 도착한다. 잽싸게 식당으로 가서 아침을 먹고 양치를 하면 7시 55분쯤이 된다. 8시가 되면 아침 체조를 하면서 일과가 시작된다.

 사무실에서 간단히 오늘 할 일을 교환하고 추가로 하달된 업무가 있는지 확인을 하게 된다. 보통 이 추가 업무는 대리급 연구원들이 떠안는다. 가장 빠릿빠릿하게 일처리를 할 수 있는 직급이기에 더 많은 일을 부여하는 듯하다.

 공장에서는 50분 업무, 10분 휴식과 같은 규칙이 있지만, 연구원들은 동시에 실험을 많게는 4~5개를 병행한다. 그 자리를 지키지 않아도 되는 실험이 있을 때, 어렵게 시간을 짜내서 타이밍이 맞는 동료와 짧게나마 티타임을 하면서 휴식한다.

 주 40시간 근무로 전환되면서 야근이 많이 없어지긴 했지만, 실험 데이터 처리는 주로 야근 때 이뤄졌다. 데이터 정리를 하면서 내일 해야 할 일도 머릿속에 그려지고, 데이터 예측도 대강이나마 할 수 있게 된다. 뭔가 결과가 좋을 거 같으면 설레서 다음날 출근을 빨리 하고 싶어 진다. 하지만 반대의 경우에는 연차 휴가가 정말 간절하다.

 업무를 마치고 나면 빠르면 오후 7시, 늦으면 8~9시쯤이 된다. 말 그대로 녹초가 된다. 몸과 머리를 다 소진했기 때문에 다른 걸 할 수 없다. 그때 체력이 남은 선배들이 눈치 없이 술 한잔 하자고 물어보곤 한다. 지속적인 요청이 있거나 또는 선배의 기분이 안 좋은 날이면 거절하기란 쉽지가 않다. 그래서 지옥을 선택하는 경우가 있다.

 해산 시간을 9시나 10시로 딱 정해주는 사람은 간단히 술 한잔하고 돌아가기에 부담이 없다. 그런데 보통 술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게는 내일이 없다. 어떤 선배는 나를 새벽 3시까지 붙잡은 적도 있었다. 집에 와서 1시간 자고 다시 출근한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입에 술 냄새를 풍기며 출근하는 민폐를 끼치면서 말이다.

 월요일은 주말에 몰아서 잔 늦잠 덕에 체력이 가장 좋다가 점점 금요일로 갈수록 바닥이 난다. 말수가 적어지고 커피 흡입량이 점점 늘어난다. 이 사이클을 반복하면, 만 30세 때 종합검진을 받을 수 있는데 이때 위염을 선물 받게 된다.

 평소 건강관리에 민감했던 터라 충격이었지만 그래도 너는 고혈압은 없네, 고지혈증은 없네 등과 같은 말로 안심시켜주는 선배분들이 있으니 다행이었다. 그냥 술 줄이고 운동하고 일찍 자고 하면 안 될까요 의견을 제시해봤지만 그건 불가능하다는 답변이 우세적이었다.

 슬슬 지쳐갈 때쯤 회사를 떠나고 싶다는 마음이 들기 시작한다. 그중, 인사정책에 불만을 갖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3년 차부터 9년 차까지 성과급이 줄어드는 바람에 연봉이 정체되어 있었고, 아무리 열심히 해도 인사고과는 거의 정해져 있었다. 호봉제라서 인사고과에 따른 인센티브 차등지급도 없었기에 열심히 할 필요가 없었다.

 새벽까지 남아서 일을 할 때가 있었는데, 매일 칼퇴하는 동료보다 낮은 고과를 받게 되면 진짜 퇴사 욕구가 들끓는다. 이에 더해 같이 일하는 동료나 리더와 트러블이 있거나 하면 떠나고 싶은 마음은 걷잡을 수 없이 커지게 된다.

 이때, 내 가치를 알아주는 다른 곳이 있지 않을까 생각을 해봐야 한다. 마침 이맘때쯤 우연찮게 헤드헌터를 통해서 이직 제안이 오고, 아는 선후배를 통해 좋은 자리를 소개받기도 한다. 보통은 현재의 관성 때문에 새로운 기회를 버리지만, 만약 저 경우라면 한 번쯤 도전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아마도 가장 많은 일들을 해내는 직급이 대리급 연구원이 아닐까 생각한다. 묵묵히 해내는 것을 알아주는 사람 또는 조직이 분명 있을 것으로 확신한다. 지금의 처우가 불만족스럽거나 인간관계에 지쳤다면 다른 곳을 가보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물론 그곳에서도 대리급 직원들에게 기대하는 바가 크기 때문에 일의 양이 줄어드는 꿈은 포기해야 할 듯하다. 단, 그 가치를 다르게 보는 곳은 존재할 것으로 본다. 계속 두드리면서 기회를 찾는 시간을 가져봤으면 좋겠다.

그래도 가장 재미있던 순간은 이때쯤이니까 최대한 즐기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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