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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RN Apr 11. 2021

퇴사 생존자

도망가자. 어디든 가야 할 것만 같아.

 2020년부터 책임 연구원 진급자에게 3주 휴가 생겼다. 7월, 내 10년 회사 생활에서 가장 긴 휴가를 보냈다. 마침 아내가 취업준비 중이어서 함께 제주도로 향했다. 평소에 늘 쫓기듯 살아와서인지 휴가 중에도 불안에 떨면서 즐기지 못했던 게 너무 아쉽다.


 휴가 아까운 줄 모르고, 며칠 동안 무기력하게 쉬기만 했다. 체력이 조금 돌아올 때쯤, TV도 틀기 시작했다. 보이스 오브 코리아라는 프로그램에서 선우정아의 ‘도망가자’라는 노래가 흘러나왔다. 노래 가사가 마치 내게 삶의 힌트를 주는 것처럼 느껴졌다.


 ‘도망가자. 어디든 가야 할 것만 같아.’
 ‘넌 금방이라도 울 것 같아. 괜찮아.’
 
 이번 여행 중 받았던 가장 고마웠던 선물은 아내가 고른 숙소였다. 내게 가장 시급한 것은 휴식이었다. 도망이라는 표현이 더 가까울 것 같다. 아내는 다도, 명상과 같은 힐링 프로그램이 있는 숙소를 예약했다. 그때부터 생각을 줄이는 법의 소중함을 깨닫기 시작했다.
 
 나는 늘 시간이 아까웠다. 더 많은 걸 하고 싶어서 동시에 여러 가지 생각을 하고 행동했다. 밥 먹으면서 영상을 보거나, TV를 보면서 휴대폰으로 인터넷 서핑을 하는 것처럼 말이다. 이게 나를 갉아먹는다는 것을 몰랐다.
 
 숙소에서는 아무 생각을 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밥 먹을 때는 밥만 먹었고, TV를 시청할 때는 TV만 봤다. 저녁에는 다도 프로그램에 참석했는데, 아내와 둘이 앉아서 여유롭게 차를 마셨다. 아무 생각하지 않고 그 시간에만 집중했다.



  차를 마시는 시간은 약 1시간 정도였다. 그런데 그 시간이 아주 길게 느껴졌다. 아주 오래 쉬는 것 같았다. 아무 생각 없이 1시간을 쉬는 것이 이렇게 큰 휴식이 되는지 몰랐다. 정신이 조금 돌아올 때쯤 아내가 내게 철없는 소리를 했다.
 
‘오빠도 좀 쉬어. 나도 쉬어보니까 너무 좋아.’
 
 물론 쉬는 게 당장은 좋기야 하겠지만, 그 이후가 문제라는 걸 알고 얘기하는 건가. 눈을 감고 의자에 기대서 대답 없이 멍하니 있으니, 아내는 내 대답을 눈치챈 듯 한마디 더 건넸다.
 
‘지금 좀 쉬고 준비해서 다시 일하면 되지. 지금 이렇게 살다가는 다 끝나. 한번 더 생각해봐.’
 
어쩌면 아내가 내게 중요한 기회를 주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 정말 그만둬도 되는 건가. 다른 일을 해도 지금보다 많이 벌기는 쉽지 않을 텐데 괜찮을까. 수많은 생각을 했다. 하지만 이 시간으로 인해 내 미래의 계획이 점차 발전하고 구체화되어  나는 결국 퇴사를 하였다.





 아침에 눈을 떴을 때, 뭔가 다른 기분이었다. 내가 회사를 1주일이나 비워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가끔 간단한 문의전화는 왔지만 큰 문제는 없었다. 남은 2주도 그렇게 보냈다. 내가 무엇을 더 할 수 있을지에 관한 고민들로 나머지 시간을 채웠다.
 
 휴가가 끝나고 돌아와서, 대학원을 갈지, 다른 회사를 알아볼지, 창업을 할지, 글을 쓸지, 유튜브를 할지에 관해 생각을 정리했고, 하나씩 준비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아내의 생일에 아내가 취업에 성공했고, 나의 퇴사 일정은 더욱 가속화되었다.
 



 선우정아 ‘도망가자’라는 노래는 10년 후에나 고민해 볼 문제를 먼저 생각해보게 된 계기가 되었다. 어릴 적 막연하게 세웠던 무의미한 목표 때문에 소중한 것들을 다 희생할 뻔했다. 이제부터는 의미에 중점을 두고 확실한 목표를 세워서 나아갈 때라는 각성을 해주었다.
 
‘그다음에 돌아오자 씩씩하게, 지쳐도 돼 내가 안아줄게.’
 
 나는 퇴사라는 도망 전략을 썼다. 지친 몸과 마음을 휴식하고, 더 무장해서 씩씩하게 돌아왔다. 퇴사 생존자로 남아 나는 더 편안하고 다양한 도전을 하며 안정된 삶을 살고 있다.


지금 힘들다면, 그 자리에서 잠시 도망가서 아무 생각하지 말고 쉬고, 몸이 편안해지면 미래를 깊게 고민해보길 바란다. 민이 끝나면 하나씩 도전해보자. 결과적으로 는 하기 싫은 일을 하면서 버티는 것보다, 하고 싶은 일에 도전하는 것이 훨씬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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