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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거벗은 어르신

by young

장기요양기관을 운영하다 보면 당황스럽고,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난감한 상황들을 자주 마주하게 됩니다.

그중에서도 제가 가장 오래 기억에 남는 경험이 하나 있습니다.


방문요양센터를 열고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상담신청을 하신 남자어르신이 계셨습니다.

상담 당시엔 치매 판정을 받긴 하셨지만 인지 상태는 비교적 괜찮으셨고, 태도도 매우 온화하셨습니다.

요양보호사 선생님과의 첫 만남도 무리 없이 진행되었고요.


하지만 문제는 아주 예상치 못한 곳에서 터졌습니다.

어르신 댁을 방문했던 요양보호사 선생님이 어느 날 사무실로 전화를 주셨습니다.
목소리는 평소보다 한 톤 낮았고, 살짝 당황이 묻어 있었습니다.


"센터장님, 지금 어르신댁에 왔는데... 어르신이 옷을 하나도 안 입고 계세요."


처음엔 무슨 말인가 싶었습니다.

더운 날이었으니 속옷 차림인가 싶었는데 아예 전라로 계신다는 겁니다.

그게 일시적인 것도 아니고 요양보호사가 방문을 할 때면 매번 옷을 벗고 계셨습니다.


처음에는 저와 요양보호사가 옷을 입으셔야 된다고 말씀드리면 다시 옷을 입으셨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저의 요청에도 계속 옷을 입지 않고 가만 놔두라며 화를 내셨습니다.


결국, 요양보호사 선생님은 어르신의 노출을 견디지 못하고 그만두셨고 저희는 다시 요양보호사를 구해야했습니다.


여자 요양보호사는 도저히 전라의 어르신을 케어하기가 어려워 남자 요양보호사로 겨우 매칭을 했습니다.


요양보호사에게는 사전에 어르신이 옷을 벗고 있으시다고 말씀을 드렸고, 옷을 입으라고 하면 화를 내시기 때문에 그냥 모른 척 해달라고 했습니다.


요양보호사도 어르신의 벌거벗은 모습에 움찔했지만, 애써 외면하며 케어를 이어나갔습니다.

다행히도 같은 남자가 케어하니 크게 문제될만한 일들은 일어나지 않았고, 저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습니다.


가끔 어르신이 요양보호사가 없는 시간에 벌거벗은 채로 나가다가 이웃분들의 항의가 들려오기도 했지만, 그럴때마다 어르신이 치매가 있어서 그렇다고, 죄송하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렇게 나름 평온하게 지내던 어느 날, 요양보호사의 다급한 전화가 걸려왔습니다.

내용인즉슨, 조금 전 국민건강보험공단에서 모니터링 차 어르신댁을 방문했다가 벌거벗은 어르신을 보고 깜짝 놀라 나갔다는 겁니다.


가끔 새로 장기요양서비스를 이용하시는 어르신이 잘 받고 계시는지 국민건강보험공단에서 방문을 하는 경우가 있는데, 하필 이 어르신께 방문을 왔던 것입니다. 그것도 여자 선생님이요.


그리고 다음날, 국민건강보험공단으로부터 연락이 왔습니다.

해당 어르신에 대한 긴급 사례관리 회의를 열자는 요청이었죠.


*사례관리란?

문제행동이 있는 대상자에 대해 개인이나 기관 내에서 해결이 어려울 경우 지역사회지원을 통해 해결을 하는 서비스제공 과정입니다.


그 회의에서 저는 처음으로 들었습니다.

성적 문제 행동은 단순히 "어르신이니까", "치매라서"라고 넘어가서는 안 되는 문제라는 것을.


성적 문제 행동을 보일 때는 우선 그 원인을 파악하는게 중요합니다.

예를 들어 본인의 바지 속으로 손을 계속 집어 넣는 어르신이 있다면 옷이 불편해서 그런건지 , 가려움증 때문에 그런건지, 아니면 정말로 성적인 문제가 있는건지를 파악해서 그에 따라 해결을 해야된다는 것이지요.


옷을 벗고 있는 어르신도 마찬가지 입니다.

정말로 성적인 문제가 있을 수도 있지만 실내 온도가 너무 더워서 그럴 수도 있고, 지남력이 떨어져 지금이 아침인지 밤인지, 공공장소인지

집 안인지 인식하지 못해서 그럴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단순히 “또 옷 벗으셨네” 하고 넘기는 것이 아니라, 왜 그런 행동을 반복하시는지 관찰하고, 그에 맞는 조치를 취해야 합니다.


정말 성적인 충동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적절한 상담이나 약물 조정, 혹은 환경적 대응이 필요할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런 상황을 그저 민망하다고 외면하거나 농담처럼 넘기는 순간, 어르신은 그 행동이 ‘괜찮은 것’이라고 인식하게 된다는 점입니다.


성적인 문제 행동은 초기부터 일관되고 단호하게 대응해야 그 행동이 습관화되지 않고,

다른 어르신이나 요양보호사에게 피해가 확산되는 것을 막을 수 있습니다.


그날의 사례회의 이후, 저는 다시는 이런 문제를 애매하게 넘기지 않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이후 저희는 해당 어르신의 행동에 대해 상황을 명확히 기록하고, 반복 여부와 환경 요인을 면밀히 관찰하기 시작했습니다.


실내 온도를 조정하고, 어르신의 옷차림을 보다 편안하고 안정감 있는 복장으로 바꿔드렸으며,
방문 시간에는 사전 예고를 드리고 시각적 단서(예: 시계, 캘린더, 오늘 날짜가 적힌 메모 등)를 활용해지남력 저하로 인한 혼동을 줄여드리는 방식도 병행했습니다.

의사선생님과 상의를 통해 증상을 줄일 수 있는 약도 새로 처방을 받았습니다.


또한 요양보호사 선생님께는 대응 매뉴얼을 공유하고, 단호하면서도 감정 없는 어조로 행동에 선을 그어드리는 방법을 함께 연습했습니다.


그 결과, 어르신의 노출 행동은 점차 줄어들었고, 현재는 요양보호사 선생님이 방문하셔도 이전처럼 민망한 상황은 거의 발생하지 않고 있습니다.


저는 이 과정들을 보며 다시 한번 느꼈습니다.
돌봄은 감싸주는 일인 동시에, 경계를 세워드리는 일이기도 하다는 것.


정확히 선을 그어드리는 것이 어르신을 통제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안정된 일상과 관계를 회복하는 첫걸음이라는 걸요.


그날의 사례회의가 없었다면, 아마 지금도 우리는 불편함 속에서 애매하게 웃으며 그 상황을 넘기고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다가서는 용기와 멈추어야 할 경계를 함께 지켜내는 선택.

돌봄 현장은 늘 선택의 연속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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