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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별 직전에 찾아온 기적같은 하루

by young

우리는 언젠가, 삶의 마지막 순간에 다시 한번 웃을 수 있는 힘이 생길까요?


지금부터 들려드릴 이야기는 그 물음에 작은 대답이 되어준 어느 어르신의 하루에 관한 기록입니다.


올해 아흔이 넘으신 한 남자 어르신이 이 이야기의 주인공입니다.

뇌졸중으로 편마비가 있으셔서 왼쪽 팔다리에 힘이 잘 들어가지 않았지만, 평소에는 요양보호사 선생님이 옆에서 부축만 해드리면 천천히 걸음을 옮기실 수 있었습니다.


어느날부터 날이 맑은 아침이면 어르신은 가끔씩 요양보호사와 동네에 있는 작은 절까지 산책을 다녀오셨습니다.


그 절은 여름이 되면 수국으로 아주 유명한 곳이었는데, 담장을 따라 흐드러지게 피어나는 수국을 어르신이 참 좋아하셨습니다.


"내년에 또 같이 오면 좋겠네.”


그렇게 아름다운 수국과 함께 첫 여름을 보낸 어르신은 내년 여름을 기약했습니다.


그렇게 겨울이 지나고 다시 봄이 오자, 어르신은 입이 닳도록 그 절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수국 피려면 아직 멀었지?”


그렇게 말씀하시며, 한 번 더 꽃을 볼 수 있기를 바라셨습니다.


그러나 여름이 가까워질수록 어르신의 기운이 부쩍 쇠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워낙 고령이신 데다 뇌경색을 앓으셨던 이력이 있고, 만성질환과 더불어 기온 차가 큰 날씨 탓에 자주 폐렴 증상이 나타났습니다.


식사량도 줄고 잠시도 앉아 있는것조차 숨이 찰 정도로 힘들다고 하셨습니다.

요양보호사 선생님이 말을 걸어도 고개만 겨우 끄덕이시는 날이 많아졌습니다.

그 절에 수국이 곧 핀다는 이야기를 해드려도 작은 미소만 잠시 지으실 뿐, 금방 다시 눈을 감으셨습니다.


결국, 여름이 되었지만 어르신은 더이상 일어나지 못하고 의식이 꺼졌다 돌아왔다를 반복하셨습니다.

의식이 돌아올 때도 요양보호사를 알아보지 못하고, 눈길은 허공을 떠돌았습니다.

이름을 불러도 대답은 없고 시선이 맞닿아도 금방 흩어졌습니다.

요양보호사는 어르신의 기운이 더 이상 회복되기 어렵다는 걸 직감했습니다.


어느 날 아침, 선생님이 제게 조용히 전화를 주셨습니다.
목소리가 낮고 조심스러웠습니다.


"센터장님, 이제 정말 오래 못 버티실 것 같아요. 어제부터 거의 의식이 없으세요."


저는 곧 보호자에게 말씀을 전했고, 오랜만에 어르신의 아들과 딸, 손주들이 하나둘 어르신 댁에 모였습니다.


거실 가득 가족들이 둘러앉아, 서로 말을 아끼며 조용히 어르신의 숨소리를 지켜보았습니다.


그렇게 하룻밤이 지나고, 걱정되는 마음에 어르신댁으로 가고 있는데 요양보호사로부터 전화가 왔습니다.

저는 마침내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전하시는 걸까 싶어 마음이 무거워졌습니다.


숨을 고르며 전화를 받았는데, 선생님의 목소리는 뜻밖에도 떨리면서도 조금 들떠 있었습니다.


"센터장님, 어르신이... 어르신이 오늘 아침에 혼자 눈을 뜨시더니 저를 알아보셨어요. 그리고 수국을 보러 가고 싶다고 하세요."


저는 잠시 할 말을 잊었습니다.
믿기지 않았습니다.
어제만 해도 눈도 못 뜨시던 분이 또렷하게 의식이 돌아오셨다니.


선생님은 잠시 울먹이듯 말씀을 이었습니다.


"어제까지만 해도 거의 의식이 없으셨는데, 갑자기 이렇게 또렷하게 말씀하시니까 저도 어떻게 해야 할지...”


요양보호사에게 물어본 어르신의 상태는 의식이 완전히 돌아와 요양보호사는 물론 아들 딸도 정확히 알아보셨지만, 몸은 여전히 일으키지 못하셨습니다.


저는 잠시 망설이다가, 혹시라도 마지막이 될지 모르는 소원을 들어드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부랴부랴 차를 몰아 그 절로 갔습니다.


아침 햇살 속에서 담장을 따라 흐드러지게 핀 수국들이, 마치 기다렸다는 듯 활짝 얼굴을 내밀고 있었습니다.

한 송이, 한 송이, 색도 크기도 조금씩 다른 수국들을 바라보니 가슴이 먹먹했습니다.

그 꽃을 마지막으로 보고 싶어 하시던 어르신의 얼굴이 떠올라, 휴대폰으로 사진을 여러 장 찍었습니다.

절 앞마당의 수국도, 담장 너머 골목길에 흘러넘치듯 핀 수국도, 꽃잎이 지기 시작한 한쪽 그늘의 수국도 빠짐없이 담았습니다.

그리고 서둘러 어르신 댁으로 돌아왔습니다.


거실 문을 열자, 여전히 가족들이 둘러앉아 있었고, 어르신은 머리맡에 누워 계셨습니다.


“어르신, 저 다녀왔어요. 수국이 정말 예쁘게 피었어요.”


제가 휴대폰 화면을 어르신 눈앞에 살짝 들어보였습니다.

어르신의 시선이 아주 천천히 화면 위로 옮겨갔습니다.

파랗고 보라빛의 수국들이 가득한 사진을 보시더니, 마치 숨을 고르는 듯 잠시 뜸을 두시고 아주 작은 목소리로 말씀하셨습니다.


"아... 예쁘네... 정말 예쁘네..."


그 순간, 옆에 있던 아들도 눈물을 훔쳤고, 요양보호사 선생님도 손으로 입을 가리고 조용히 우셨습니다.


그렇게 한참을 보시던 어르신은 피곤하신지 잠에 드셨고, 저는 조용히 방을 빠져나왔습니다.

아드님은 저와 같이 방을 나와 어르신이 의식을 찾으신게 요양보호사와 제 덕분이라며 감사해하셨습니다.

저도 어르신이 금방 자리를 털고 예전처럼 걸으실 것만 같아, 마음이 괜히 들떴습니다.

어쩌면 내일쯤 기운을 조금 더 차리셔서 다시 수국을 보러 가자고 하시진 않을까, 그런 생각도 스쳤습니다.


하지만 다음 날이 되자, 전날의 일이 마치 잠시 스쳐간 꿈이었던 것처럼 어르신은 다시 의식을 잃으셨고 저녁이 되어 가족들이 모두 곁에 둘러앉은 가운데 어르신은 아주 조용히, 마치 숨결이 스며나가듯 마지막 숨을 거두셨습니다.


'회광반조' 라는 말이 있습니다.


임종 직전 환자가 갑자기 의식이 또렷해지거나 기력이 돌아오는 현상을 말하는데, 이 현상에 대해서 전문가들은 뇌의 억제장치가 약해지면서 마지막으로 또렷해진다거나, 스트레스 호르몬이 폭발적으로 분비하면서 생기는 현상 등으로 이야기 합니다.


하지만 저는 어르신이 남은 기운을 써서 마지막으로 보고 싶었던 풍경을 마음에 담아두신 거라고 믿습니다.


지금도 저는 그 이야기를 떠올릴 때마다 생각합니다.

우리는 언젠가, 삶의 끝에서 다시 한 번 웃을 힘을 얻게 될지도 모른다고.


그 마지막 웃음이 누군가에게 오래도록 따뜻한 기억으로 남는다면, 그것만으로도 한 생의 끝은 충분히 아름다울 수 있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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