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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의 차를 훔친 사회복지사

by young

저는 사람 얼굴을 잘 알아보지 못하는 안면인식장애가 심한 편입니다.

이것과 관련된 에피소드들이 굉장히 많은데, 그중 하나가 대학생 시절입니다.


대학생이었을 때, 저는 얼굴을 못 알아보는 걸로 동기들 사이에서 굉장히 유명했습니다.

그래서 이름을 잘못 부르거나 동기를 못 알아보는 경우가 굉장히 흔했는데, 그걸로 인해 저에게 마음의 상처를 받는 동기들도 제법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수업을 마치고 계단을 내려가는데 동기 한 명을 마주쳤습니다.

저는 반가운 마음에 과한 액션으로 동기를 껴안으며 이제 오냐, 난 이제 간다 같은 일상적인 말을 건넸는데, 그 동기의 표정이 다소 이상했습니다.


평소에 자주 대화를 나눴던 친구였는데, 매우 어색한 반응을 보여서 몸이 안 좋나 싶어 급하게 대화를 끝내고 다시 계단을 내려갔습니다.


그렇게 1층 로비까지 내려갔는데, 방금 인사를 나눴던 그 동기가 입구에서 걸어 들어오는 것이었습니다.

옷을 바꿔 입구요.


완전히 당황해 버린 저는 동기에게 가볍게 인사를 하고 버스를 탔는데, 버스 안에서 곰곰이 생각을 해보니 처음 마주쳤던 동기는 사실 선배였던 것이었습니다.

그것도 그냥 선배가 아닌 저와 같은 동아리에서 활동하는 선배였습니다.

선배에게 반말로 "야, 이제오냐?"라고 하며 껴안았던 기억이 스멀스멀 올라오면서 식은땀이 등으로 한줄기 흘렀습니다.

그제야 동기인 줄 알았던 선배가 표정이 이상했던 이유를 알아버린 것입니다.


마침 다음 날이 동아리 모임이 있는 날이어서 선배님께 안면인식장애가 있어 실수를 한 것 같다고 사과를 드렸고, 다행히 선배님께서도 웃으며 넘어가주어서 상황은 일단락되었습니다.


이렇게 보통 안면인식장애는 사람의 얼굴만 잘 못 알아보는 반면에, 저 같은 경우엔 길도 이 길이 저길 같고, 건물 같은 것도 비슷하게 생긴 건물을 잘 구분 못하다 보니 길치, 방향치까지 생겼습니다.


이걸로 인해 가끔 회사생활에서도 문제가 생기곤 했습니다.


하루는 어르신의 병원진료를 위해 회사차로 모시고 갔다가 진료를 다 끝내고 센터로 돌아가는 길이었습니다.


주차장을 빠져나와 도로를 달리는데 문득 백미러에 생전 처음 보는 반짝이 액세서리가 걸려 있는 것이었습니다.


"회사차에 누가 이런 걸 달았.."


순간 등골이 오싹해졌습니다.

떨리는 눈을 돌려 대시보드를 보니 귀여운 피규어가 생긋 웃으며 저를 쳐다보고 있었습니다.

황급히 차를 세우고 차넘버를 봤는데.. 맙소사, 회사차가 아니었습니다.


똑같은 모닝에 색깔도 같아서 착각을 하고 탄 건데, 차 내부의 풍경이 회사차와는 달랐음에도 눈치를 채지 못했고 마침 그 병원은 차키를 차에 두고 내려야 하다 보니 별문제 없이 그대로 운전을 해버린 것이었습니다.


졸지에 차도둑이 되어버린 저는 황급히 차를 돌려 병원으로 돌아갔습니다.

병원과는 5분 거리도 채 안되었지만, 저에게는 그 돌아가는 길이 몇 시간처럼 길게 느껴졌습니다.


'차주인이 벌써 경찰에 신고했으면 어떡하지..?'

'병원 주차장에서 차를 가지고 달아난 사회복지사라는 이름으로 뉴스에 나오는 거 아냐?'

'주차장에 경찰들이 벌써 와있는 건 아닐까?


온갖 생각을 하는 사이, 병원에 도착했습니다.

떨리는 마음으로 조심스럽게 주차장을 들어갔지만 제 예상과는 달리 경찰차는 없었고 수갑을 차는 일도 없었습니다.

다행히 차주인은 아직 병원에서 나오지 않아 상황을 모르고 있었고, 주차관리인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한 후에 혹시 문제가 생기면 연락을 달라고 하고는 회사차를 찾아 겨우 다시 돌아왔습니다.


이렇게 안면인식장애가 해프닝으로 끝나는 경우도 있었지만, 실제 사고로 이어지는 상황도 있었습니다.

저녁 운전을 하던 선생님 한분이 연차를 쓰셔서 제가 대신 운전해야 했는데, 운전하던 직원들이 연차를 쓸 때면 종종 제가 운전을 했기 때문에 길을 잘 알고 있어서 자신만만했습니다.

어르신들의 저녁식사가 끝나고 스타렉스로 차례차례 댁에다 모셔다 드리고 퇴근을 하는데 한 보호자분께 전화가 왔습니다.


"엄마가 아직 집에 안 왔는데, 혹시 내려다 주셨어요?"


이 어르신은 경도 치매가 있으셨는데 본인의 아파트 동에 내려다 드리면 집까지 혼자 잘 올라가셔서 보호자분이 따로 내려오시지 않는 분이었습니다.

그날도 어르신의 아파트 동 앞에 내려다 드렸고, 분명히 어르신이 들어가는 것까지 확인을 했는데 1시간이 지나고도 아직 집에 들어오지 않으셨다는 겁니다.


혹시나 싶어 블랙박스를 돌려봤는데, 제가 다른 동에 잘못 내려드리는 것이 보였습니다.

어르신의 아파트는 1자로 되어있고, 앞에서부터 101동 102동 이런 식으로 되어있는 구조였는데, 밤이라 어두워서 동이 제대로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건물이 비슷하다 보니 다른 동에 내려드린 것입니다.


다른 동인지도 모르고 본인의 층에 올라가서 벨을 눌렀을 때, 낯선 사람이 나와 당황하셨을 어르신의 모습이 눈에 그려졌습니다.

그렇게 다시 내려와 본인 집을 찾기 위해 헤매셨을 겁니다.


저는 그 길로 차를 돌려 어르신을 찾기 위해 황급히 어르신의 아파트로 향했습니다.

정말 다행히도 어르신댁에 거의 도착했을 때쯤, 어르신을 찾았다는 보호자의 연락을 받았습니다.


그대로 돌아갈 수는 없어서 사죄도 드릴 겸, 어르신댁을 방문했습니다.

어르신의 표정은 다소 당황한 표정이었지만, 다행히도 다치시거나 한 모습은 아니었습니다.


"어르신, 정말 죄송합니다.. 제가 건물을 착각해서 잘못 내려드리는 바람에 어르신이 고생하셨네요."


어르신과 보호자께 진심으로 사과를 드렸고, 보호자의 책망 섞인 대답을 살짝 듣기는 했지만 다행히도 너그러이 용서를 해주셨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만의 결점을 안고 살아가지만, 그 결점이 반드시 약점일 필요는 없습니다.
저의 '헷갈림'은 결국 저를 더 섬세한 사람으로 만들었고, 더 조심스럽게 다른 사람의 하루를 책임지는 사람이 되게 해 주었습니다.


어쩌면 저는 오늘도 길을 잃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예전처럼 우왕좌왕하지는 않을 겁니다.

그동안 생겨난 수많은 해프닝 덕분에 이제는 길을 잃어도 돌아오는 법을 꽤 능숙하게 알게 되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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