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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심재훈 Aug 24. 2021

경이로운 리(Lee)의 얼굴

카투사 이야기 - 9

우리 군종병은 자주 바뀌었다. 거기엔 헨리(Henry), 버드(Bird), 메시(Massey)가 있었다. 한 공간에 다 함께 있었던 건 아니지만 각각 서로 다른 매력이 있었다. 고릴라처럼 우람하면서도 위트가 있는 헨리는 사무실 안에서 유일한 서전트(병장)였다. 물론 이 곳에 처음 온 후로 쭉 있었던 마텔스키도 서전트였지만 어떠한 이유에서 징계로 코퍼럴(상병)으로 떨어졌다. 인간으로써 갖춰야할 온전한 정신으로만 따지자면 헨리 쪽이 훨씬 나았다. 마텔스키는 스스로 감정조절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조울증처럼 신나게 낄낄대다가 갑자기 화를 내곤 했다. 때로는 난폭한 장난을 일삼아서 주변 사람을 화나게 했다. 나는 그와 오랜 시간 함께 지내면서 우정 비슷한 걸 느꼈던 건지 그럴 때마다 그를 한층 미숙한 사람이라 단정 짓고 애써 인자한 미소를 내비쳤다.


 내가 들어온 이후로 사무실에 첫 번째로 온 군목은 므뇨즈 신부였다. 그 큰 동두천 기지에서 가톨릭 신부는 단 한 명이라는데 아주 운 없게 우리 대대에 배치되었던 거다. 나머지 대대는 모두 장로교나 감리교 쪽 목사들이었다. 촛농이 녹아 퍼져버린 것처럼 므뇨즈는 양 옆으로 한 사람씩을 더 데리고 온 것 같았다. 그의 튀어 나온 뱃살은 아주 이상하게 느껴졌는데 정신적으로 어느 한 쪽이 심각하게 함몰된 이미지였다. 므뇨즈 신부는 마텔스키보다 더 감정기복이 심했다. 신부로써는 도저히 내뱉을 수 없는 쌍스러운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 군목이라는 직업특성 상, 사회에 나가 있는 일반적인 목사의 모습과는 다를 수밖에 없다고 해도 자기가 오랫동안 전장을 누벼온 전사라도 된다는 듯이 거친 말을 씨부렸다. “히 이스 라이클리 …” “라이클리 … ”, 므뇨즈 신부는 남미계 출신이었고 요상한 영어를 썼다. 그가 자주 애용했던 표현은 ‘라이클리(likely)’였다. 이럴 가능성이 있어. 저럴 가능성이 있어. 그는 항상 확정된 표현보다 어떤 가능성 있는 표현을 선호했다. 마텔스키는 므뇨즈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모르겠다고 불평했다. 덕분에 므뇨즈는 대대에서 아주 성질이 난폭한 군목이라는 오명을 얻었다. 나중에 듣기로는 예전에 아프가니스탄에 있을 때 폭탄 공습을 받았는데 그 여파로 정서적인 장애를 입었다고 했다. 나는 동시에 동정이 들었지만 지금 그에게 필요한 건 업무가 아니라 적극적인 치료가 아닐까 싶었다.


 물론 므뇨즈 신부는 나와도 여러 가지 마찰을 빚었다. 므뇨즈는 내게 가톨릭 미사를 드리는 데에 방송실 업무 이외에 다른 일을 시키기도 했다. 예배당 입구에 비어 있는 성수를 채우는 일, 미사 제단과 기구를 옮기는 일을 시켰는데 이게 가끔씩 개인의 종교적 신념을 시험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나는 되도록 미사 일에는 손을 대고 싶지 않았다.(그때는 아주 뜨거웠으므로) 뭐, 솔직히 융통성만 조금 발휘하면 눈 한 번 딱 감으면 될 일이었다. - 내 모자란 유연함을 탓하시오 - 므뇨즈는 미지근한 내 모습에 노발대발하면서 연대 군목에게 이르겠다고 협박했다. 그러면 한국군으로 복직될 거라고 말했다. 순간 하늘이 노래지는 기분이었다. 지금 생각해도 내 모습이 미숙했지만 한 때 내 안의 이 펀터멘탈리스트는 금욕에 가까웠고 구약시대 제사장이라도 된 것 마냥 부정한 존재를 구별하고 멀리하는 정도였다. 그리고 한국계 군목 연대장 리(Lee)가 호통칠 때 나는 쥐 죽은 듯이 가만히 앉아 있었다.


 때로는 그랬다. 세상의 온갖 좋은 일이 나를 향해 다가와도 내 마음이 그걸 받아들이길 원치 않을 때 말이다. 카투사로 지낼 수 있다는 건 내게 하나의 축복이었다. 하루하루가 아무나 경험할 수 없는 희귀하고 생소한 경험아닌가. 마음은 되도록 넓게 가지는 게 맞다. 그래야만 운이 따라 온다. 어느 쪽으로든 급진주의자가 되면 그 세계 바깥에 있는 것들을 담아낼 수 없게 된다. 내가 가진 신념에 얽매여 때로는 그것에 수반되는 형식과 의례들이 대가없이 찾아온 행운과 축복을 걷어차기도 한다. 생각만 해도 아까운 일이다. 그 행운은 내 수고와는 상관없는 선물과도 같은 것이다. 지하드(Jihad)가 되는 건 어렵지 않다. 자신이 믿는 바를 더 믿으면 되는 일이다. 만약 거기에 차가운 지성이 따르지 않으면 어떤 사랑도 감정도 없는 참혹한 테러리스트가 되는 거다.








 메이저 리(리 중령)은 카투사로 있는 동안 가장 기억에 남는 사람이었다. 나는 그에게서 약간의 경이로움까지 느꼈는데 그건 다름 아닌 그의 수려한 외모 덕분이었다. 짧고 단정한 백발에 중년의 매력을 한껏 발산하는 사람이었다. 그동안 살면서 꿈꿔왔던 아버지 상이 있다면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리 같은 사람이었다. 아주 잘 생겼다고는 할 수 없지만 강단 있는 이목구비는 오히려 냉철한 정치가의 모습에 가까웠다. 거기에 원어민에 꿀리지 않는 ‘정통’ 영어를 구사할 때면 남자가 봐도 정말 멋졌다. 품위가 넘쳤으며 태백산맥 같은 기개가 있다. 내 눈엔 그의 주위에 어떤 아우라마저 느껴졌다. 어떤 절대성을 품고 있어서 친근하면서도 그 안에 잘 다듬어진 원석 같은 게 보여서 나는 흠칫흠칫 놀라곤 했다. 그 상징적인 원석은 하나의 추상 그림과도 같았는데 질서위계 같은 개념을 말하는 것 같았다. 날개만 달리지 않았지 지상에 강림한 한 마리의 세라핌을 보는 기분이었다.


 내 인생에서 이런 위엄 있는 존재는 딱 두 명 밖에 없었다. 그 두 명 모두 다 목사라는 게 내 스스로는 조금 못마땅한 구석이 있긴 하지만 말이다. 이런 위엄을 뽐내기 위해선 얼굴과 말투, 지성과 균형 잡힌 피지컬 같은 다양한 요소들이 두루 있어야 한다. 아무리 존경하는 멘토가 따로 있다고 하더라도 이런 위엄 있는 포스는 아예 다른 종류의 속성이다. 모르는 누구나 호감을 가질 만한 인물이다. 이건 잘생기지 않고는 불가능한 일이다. 잘 생겼다는 게 꼭 얼굴이 ‘잘 생겼다는’ 말은 아니다. 분명 잘생긴 얼굴이지만 잘 생기기만 해서도 안 되는 일이다. 거기엔 리더십, 강단 같은 부차적인 요소들이 따라 붙는다. 그래서 왠지 리를 만날 때면 나는 양아들이 된 것 마냥 그의 옆에 붙어 있기를 좋아했다.   


 마음에 신념 같은 게 나이가 들고 영글기 시작하면 사람마저 바꾸는 걸까. 만약 리에게서 그 군목이라는 이름을 벗긴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자리가 사람을 만드는 걸까. 그것도 아니라면 어떤 보이지 않는 마(魔)가 그를 덮고 있는 건 아닐까.








 버드는 헨리 다음으로 들어 온 아이였다. 생각한 이름 그대로 ‘B I R D’였다. 새? 히치콕 영화가 떠오르기도 하고, 인상 깊게 봤던 『버드맨』의 남주, 마이클 키튼의 벗겨진 머리가 생각났다. 한편으론 또 다른 흑인이 들어왔다는 사실에 실망하기도 했다. 그나마 위안이 되었다는 건 버드가 꽤 귀여운 여군이었다는 점과 그녀만의 통통 튀는 매력이 집 안 분위기를 조금은 상쾌하게 만들어준 거였다. 작은 키에 스포츠를 좋아할 것 같은 장난꾸러기 얼굴이 마음에 들었다. 바짝 묶은 포니테일이 그런 유아성을 극복하고 가끔씩 낯선 여자처럼 보이게끔 했다. 버드와 나는 유머코드가 잘 맞았다.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면서 우리는 서로 낄낄댔다. 여기 미군들에게는 잘 보이지 않는 관대함과 부드러움이 버드에겐 있었다. 상관인 내가 과제를 주면 카투사라고 무시하지 않고 곧 잘 따라주었다. 버드에겐 여동생 같은 느낌이 있었다. 옆에 인사과 낸시는 광란의 소녀처럼 앞 뒤 재지 않는 꽃뱀이었다면 버드는 꽤 성숙하고 교양 있는 여자였다. 가끔씩 버드가 여자로 보일 때도 있었다.(흑인임에도 불구하고) 업무 내내 졸졸 나를 따라다니는 모습이 그런 연애 감정을 부추겼다.


 외국에서 먹히는 얼굴이 있는지 몰라도 난 그렇게 피부색이 다른 사람과 설명할 수 없는 내적 교류를 즐기곤 했다. 단순히 완전치 않은 영어를 한다고 해서 그들과 특별한 감정을 나누는 건 아니었다. 색깔이 달라도 그들도 똑같은 사람이었다. 그런 면에서 버드는 내 안에 잠재해있는 수동성에 매력을 느꼈던 것 같다. 아시아적인 면모, 동양의 미. 직접 움직이기보다는 가만히 앉아서 누군가 먼저 다가와 주기를 바라는 동양인. 나는 그런 사람이었다. 이런 나의 수동적인 것과 버드의 공격성이 오묘한 조합을 이루면서 우리 안에 이상한 결속을 이끌어 냈다. 연인 감정과 비슷하지만 연인이라는 것도 결국 우정, 신뢰 같은 감정을 내포하고 있지 않은가. “쉼, 왓 아 유 루킹 포?”(What are you looking for?) 우리는 동성애자가 되기도 하고 양성애자가 되기도 했다. 여튼 그건 사랑의 또 다른 이름이었다. 어느 날 버드는 다른 곳으로 발령받았다는 소식만 전하고 나에게 뜨거운 포옹도 없이 그렇게 떠나버렸다. 버드는 예전보다 좀 더 가벼워져 있을까? 새처럼. 지금은 어디에 똬리를 틀고 살아가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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