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투사 이야기 - 6
몸과 영혼은 분리됐다. 프놈펜에 도착했다. 비행하는 동안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2번을 들었다. 악마의 연주곡. 그만큼 어렵다는 얘기겠지. 투올슬랭 대학살 박물관에서 나는 섬짓한 기운을 느꼈다. 독재자 폴 포트는 여기서 수백 만 명을 학살했다. 그는 펜을 들 수 있는 지식인이라면 누구든지 잡아가 고문했다. 이곳은 특유의 분위기를 연출했다. 아마도 그건 동남아시아만의 고유한 기운 같은 것인데 나는 이걸 잡신이 섞인, 그래서 인간의 마음을 무언가로 포화상태로 만드는, 이곳저곳에서 복수(複數)의 인격이 날뛰고 있는, 아주 어지러운 상태, 태생적으로 아주 순진무구하고 연약한 족속의 이노센트(innocent), 또는 통제 불가능한 인간 내면을 상징한다고 믿었다. 옆으로는 라오스, 베트남이 있으며 이곳은 사실상 불교의 종주국과 같았다. 아직 세상의 때깔이 묻어나지 않은 건장한 청춘의 동공에 이 다신교의 세계가 오묘하고 신비롭기보다는 병약한 이미지가 더 강하게 다가오는 건 선과 악의 구분이 아직 명확하지 않을 정도로 순수해서였을 것이다. 음식에서 비춰지는 강한 향신료와 특유의 비린내. 같이 온 교회 누나들은 평소 같으면 자지러졌을 텐데 한국에서 온 의인이란 명목을 무너뜨리지 않기 위해 사력을 다해 웃음 지었다.
스콜이 오고 마르지 않은 땅바닥에서 올라오는 끈적한 기운과 비린내. 완벽한 위생에서 살아갈 수 없는 이들. 언젠가 세계 행복지수조사에서 방글라데시인가 티벳 사람들이 일등을 먹었다고 했는데 … 내가 보기엔 그 모든 게 새빨간 거짓말처럼 보였다. 후진국과 선진국을 나누는 차이 … 그 모든 기준은 바로 이 아래에서 올라오는 냄새였다. 적절한 양의 세균들과 공기들이 이곳 사람들과 공생하며 악령처럼 자기 맘대로 그들 몸으로 들어가는 거였다.
솔직히 나는 그런 후짐을 묵과할 수 없었다. 잘 사는 나라는 나름대로 다 잘 사는 이유가 따로 있었다. 못 사는 나라와 잘 사는 나라 사이엔 엄연한 격차가 있다. - 나는 그렇게 생각하는 편이다 – 누구는 못 살아도 인간 내면의 풍족함만으로도 인생이 충분하다고 말하지만 나는 지금 그런 걸 얘기하는 게 아니라 질서, 위계, 정의, 법 같은 걸 말하고 있는 거다. 못 사는 나라일수록 정부의 부정부패가 더 심하다. 일당체제를 내세워 자신이 그 위에 독재자로 군림하고 성깔대로 사람들을 마구 죽인다. 힘과 권력은 항상 균형이 핵심이다. 어느 한 쪽이 과도하게 비대해지면 곧 균형을 잃고 무너진다. 인간은 전능한 힘을 가질 수도 없고, 주어져서도 안 된다. 나에겐 그 바닥에서 올라온 씁쓸한 내가 곧 무질서와 부조리의 향연처럼 느껴졌다. 우리가 매일 나라 정치인을 욕하지만 밖에 내놓으면 그래도 꽤 쓸 만한 취급을 받을 테다.
우린 까만 아이들과 함께 매일 예배를 드렸고 즐거워했다. 딱 일 년만 이곳을 섬기고 떠나겠다던 아리따운 선교사는 이 아이들의 매력에 빠져 그렇게 십년을 지새우게 되었다고 우리 앞에서 간증했다. 이곳 주변에서 교회는 교육의 현장이 되었고 선교사는 아이들을 가르치고 섬겼다. 선교사는 어느 날 실명의 위기에 처했을 때에 아이들을 붙잡고 눈물을 터뜨렸다고 했다고 담담이 고백했다.
저녁 집회는 뜨거워졌고 눈물바다가 되었다. 찬양과 곡소리가 밖으로 새어 공안이 들이닥칠까 현지 아이들은 예배당 창문을 빠짐없이 닫았다. 계속되는 신 내림과 은혜의 하강. 사람들은 그 압력에 눌려 방언을 터뜨렸다. 그 기운은 계속 우리의 정수리를 눌렀고 눈물샘을 터뜨렸다. 그게 단순히 감정의 고양 덕분인지 일종의 신비한 체험이었는지 알 수 없지만 내가 하나 확신할 수 있었던 건 또 다른 세계의 실체에 관해서였다. 거기선 감미로운 음악이 계속 흐르고 있었다. 굳이 비유를 하자면 류이치 사카모토나 이루마의 뉴에이지 같은 거였다.(불경스럽다고 여기는 분이 있을 줄 안다. 하지만 나는 음악엔 경계가 없다고 믿는다. 곡이 쓰인 동기나 곡이 담고 있는 정신이 무엇이든 간에 받아들이는 쪽이 제대로 소화해낼 수 있다면 상관없다고 본다. 만약 그것도 안 된다고 하면 우리가 어떻게 찰리 파커나 쳇 베이커의 연주를 들을 수 있겠는가. 그들은 모두 천사의 노래를 한 악마에 가까웠다)
그 끝없는 평화로움은 나를 안식하게 했다. 증표와 인식. 그런 떠도는 마크들이 내가 살고 있는 이 현실과 이전부터 꿈꿨던 음악세계의 실재를 증명해주고 있었다. 아이들은 무릎을 꿇었고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내 옆에 꼭 붙어서 손을 모으고 기도했다. 나는 계속 신 내림을 받았다. 나는 곁에 있는 이 작은 존재들을 대표하는 큰 폭포가 되었고 물은 계속 떨어졌다. 하나의 의식과 같았던 이 물세례는 종교의 본질과 근원이 어떤 것인지 알려줬다. 본디 종교란 위에서 아래로 떨어지는 것(a thing)이었다. 그 어떤 것이 인간의 혜량으론 도무지 알 수 없는 종류일 테지만 그냥 중력과도 같은 그런 물리법칙을 적당히 의미 있게 받아들이는 거다.
프놈펜에 있는 지역교회들을 순회하면서 버스 바깥으로 보였던 사원들. 금색 지붕에 갈고리처럼 위로 상승하는 처마 끝자락. 나도 그렇게 올라가고 싶었다. 소의 머리를 뜬 조각상과 기괴한 형태들. 나는 종교가 그렇게 조금 뒤틀려 있기를 바랐다. 왠지 모르게 일본 오사카 성이 떠오르는 이유는 뭘까. 아이돌의 개미허리처럼 아슬아슬하게 뻗어있는 복층구조. 피라미드처럼 점점 좁아지더니 마침내 하늘을 향해 남아있는 유일한 점. 이런 사원들이 아주 변태적이라고 느껴지는 건 뭘까. 뭐, 귀신의 그림자, 내음새 같은 걸까. 저기에 금빛으로 도금된 커다란 보살이 앉아있다. 그로스테크한 양각 나팔들이 모서리 곳곳에 자리해 있다. 그것들은 마치 인간이 함부로 가질 수 없는 신적 세계의 전유물을 억지로 끌고 온 느낌이다. 동시에 인간에 대해서는 그 비틀린 내면을 은유적으로 표현한다. 양쪽으로 서 있는 뿔들이 디아블로나 미노타우루스 같다. 인간은 자신에게 없는 것을 가지고 싶은 욕망에 저런 요상한 것들을 만든다. 마음으로만 볼 수 있는 것들을 실제로 형체화하고 싶은 욕구. 어쩌면 인간에게 종교심이 있는 건 지극히 당연한 일처럼 보인다. 황혼이 질 무렵 사원 바깥으론 커다란 하늘 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그 넓은 세상과 인공물이 기이한 조화를 일으켜 안에 있는 신들의 존재를 더 귀하게 만든다. 오히려 하늘이 더 크게 보이는 건 우리가 믿는 종교의 모순 때문이지 않을까.
나는 그 무렵에도 군인이었고 카투사였다. 가족들을 만난다는 명목으로 해외휴가를 썼다. 이것 또한 카투사의 특권이다. 군인이 어떻게 해외로 나갈 수 있단 말인가. 그런데 카투사는 가능했다. 황금 같은 휴가를 교회 봉사에 쓴다는 게 그때는 아깝거나 이상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나는 목사님의 부탁을 받아 아직 농익은 영어로 짧은 스피치를 했다. 일주일 동안 빡빡하게 돌아가는 스케줄을 고려해보면 이건 상당히 이례적인 일이었다. 그때만 해도 나는 스물 두 살이었고 어떤 철학적인 메시지를 전달하기엔 조숙해 보이는 나이였다. 그런데도 목사는 어떤 직감이 있었나보다. 나는 ‘꿈’에 관한 메시지를 준비했고 그렇게 찬란한 청춘을 그려갔다. 친한 형이 그때 뿅 갔던 자매들이 꽤 있었을 거라고 귀띔했다. 실제로 그 이후에 한 살 어린 동생과 진한 썸을 탔다. 귀여운 자태와 이면에 감춰져 있는 시크함이 한데 섞이면서 고혹한 매력을 나타내는 애였다. 곁에 있는 열등감이 불쑥불쑥 튀어나와 뭣하러 위 아래로 흘기냐고 면박을 주었던 아이. 그건 내 엘리트처럼 보이는 우월감과 상당히 잘 어울리는 조합이었다. 한 주먹에 쥐면 다 다 들어갈 것만 같은 아담함이 나를 사로잡았지만 우린 어떤 이유에선가 관계를 이어나가지 못했다. 돌아보면 내 어리석음이었는지 앞을 내다봤던 명석한 혜안 탓이었는지 아직까지 제대로 정의내릴 수 없다. 어쨌든 그녀를 더 못 만나본 게 조금 후회되는 건 사실이다.
나는 지금 원주 창작실에서 글을 쓴다. 매지리의 산자락은 수려하고 신기(神氣)에 빙의된 것만 같다. 비가 오면 산신령의 수염이 너풀너풀 구름과 함께 오른쪽으로 흘러간다. 층층이 난 그라데이션. 명도가 뚜렷하게 구분된다. 점점 흐려져 가는 복수의 산맥들은 상승하는 연기를 만나 더 오싹한 귀신이 된다. 「곡성」이나 「알포인트」 같은 영화를 보면 제격일 것 같다. 여기서 자연은 신으로 군림한다. 정기들이 내 마음을 푹 찌른다. 고작 다니는 곳이라면 짧은 반경의 산보뿐이지만 지루함이나 권태 같은 건 느낄 수 없다. 정기들이 나를 숨 쉬게 만들기 때문이다. 캄보디아에서 만났던 날 것들. 그리고 그 모든 것에 귀신이 있다고 믿는 그들의 믿음이 이곳에서 열렬히 증명되고 있는 것 같다. 그들이 옳았다. 종교는 이곳에도 있다. 그 뒤틀림. 변태적인 것. 무질서한 공간. 개념 없는 인간들 … 서울에선 볼 수 없는 것들이다. 나는 지금도 이곳 정령들과 대화한다. 잘 지내고 있냐고, 네가 내 육신과 영혼을 지켜줄 수 있겠냐고 …
* 이 작품은 2021 박경리 토지문화재단 문인 창작실 입주작가로 선정되어 활동하는동안 집필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