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쓰소미 Sep 13. 2022

제가 섬유근육통 이라고요?

섬유근육통을 진단받고 난 전과 후

웹 개발자였습니다만

제 직업은 웹 개발자였습니다. 코딩을 배우는 것이 쉽지 않은 일이었지만, 한편으로는 좋아하는 일이라 개발자로 살아남기 위해 많은 것을 포기하며 살았어요. 건강도 그중 하나였죠. 컴퓨터 앞에 오래 앉아 있을수록 더 좋은 결과물이 나오는 직업이라 직장생활을 하며 저는 거의 의자와 한 몸처럼 생활하곤 했어요.


어느 날 회의 중 찍힌 한 컷


그러다가 업무를 하는 데 있어 문득 한계를 느끼게 되었습니다. 개발언어가 모두 영어로 쓰여 있다 보니 개발 역량을 강화하는 데 있어 부족한 언어 실력이 제 발목을 붙잡았습니다. 그래서 어학연수를 가겠다고 외치며 잘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었습니다. 이때의 제 나이는 20대 후반이었죠.


다시 처음부터 시작

늦었다면 늦은 나이였던 20대 후반, 남들은 한창 자리를 잡고 경력을 쌓을 시기에 저는 그렇게 일상에서 탈출하게 되었습니다. 주변 지인들은 대단하다며 놀라워했고 걱정과 응원을 많이 해주었습니다.

많은 걱정 속에서도 저는 한국에 계속 있기엔 해결할 수 없는 갈증에 시달릴 거라 생각했습니다. 직장생활을 하며 해외에서 삶을 펼칠 수 있기를 늘 동경해왔고, 나이는 무언가를 시작하기에 아무런 장애물도 될 수 없다고 여겼기 때문이었죠.


사실 이 모든 것은 한번 마음먹으면 반드시 해내고자 하는 고집스러운 저의 성격 덕분에 가능할 수 있었다고 봅니다. 평소에는 다른 사람들의 말에 잘 휘둘리는 우유부단한 모습을 보이기도 했지만, 한번 마음속에서 강한 확신과 함께 결심을 하는 것이 있으면 우뚝 솟은 소나무처럼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아일랜드에서 새로운 꿈을 품다

정말 하고자 하는 것이 있다면 그 결심이 흔들리지 않도록 명확한 계획을 세워나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자취 한번 해보지 못한 저는 그럼에도 어학연수를 가겠다는 결정을 내렸죠. 그만큼 자금계획부터 어학원 선정 등 떠나기 전 준비해야 할 것들이 정말 많았습니다. 투병으로 인해 활동이 자유롭지 못한 지금 그 시절의 용기와 행동에 박수를 쳐주고 싶어요. 정말 장하다고 말이죠.


선물 받은 짐 싸던 중 한 컷


그렇게 2019년 1월 아일랜드의 수도인 더블린으로 떠났습니다. 어학원을 다니며 영어를 공부하고 다양한 나라에서 온 친구들과 어울리며 제 인생에서 꿈만 같던 시절을 보낼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큰 도전을 어느덧 마무리하고 4개월 만인 2019년 5월 한국으로 돌아왔습니다.


첫 브라질 친구들과 갔던 해리포터 도서관


4개월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 영어 실력이 크게 늘지 않았지만, 앞으로 인생을 살아갈 에너지를 얻을 수 있었던 확실한 터닝포인트와도 같은 시간이었죠. 이후 곧장 재취업을 준비했습니다.


새로운 시작에서 통증을 느끼다

그렇게 2019년 7월 서울에 있는 한 회사로 이직에 성공했습니다. 새로운 곳에서 일하게 되다니 설렜지만 한편으로는 이곳에서 적응해서 살아남아야 한다는 생각에 아찔하기도 했습니다. 걱정은 기우였을 정도로 다행히 시간이 지나면서 회사에 적응할 수 있었습니다.


회사에 적응하면 가지고 가는 내 전용 키보드


그러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오랜만에 다니는 회사라 긴장을 많이 한 탓인지 한 달이 지나자 점점 목이 뻐근하고 왼팔에 힘이 빠지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문득 디스크에 문제가 생긴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괜찮겠지 싶어 버티다가 이대로는 힘들 것 같아 회사 근처에 있는 마취통증의학과를 예약했습니다.


역시나 디스크가 문제였습니다. 긴장을 한 채로 모니터를 계속 쳐다보고 있자니 목과 어깨에 무리가 가서 몸에 통증을 느끼기 시작한 것이었죠. 처음으로 목에 신경 주사라는 것을 맞았습니다. 그때부터 퇴근 후 매주 1~2회씩 도수치료를 받으며 치료를 병행했습니다. 이때 아픈 것을 무조건 참는 것만이 정답이 아니며 조금이라도 불편하다면 더 심해지기 전에 병원에 가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인터넷 검색만 하지 말고, 이 정도도 안 아픈 사람이 어디 있겠냐는 안일한 마음 대신 몸을 잘 관리해야 했었죠. 당시에는 빨리 깨달았다고 생각했지만, 지금에서 생각해보면 이마저도 늦은 것이었습니다.

 

이런 통증은 처음이야

그렇게 치료를 받던 어느 날, 그러니깐 10월 10일의 일이네요. 그날따라 유난히 왼팔이 빠질 것 같고 목에서도 심한 통증이 느껴졌습니다. 퇴근하자마자 병원에 가서 두 번째 신경주사를 맞았습니다. 그런데 주사를 맞아도 첫 번째와는 달리 계속 몸에서 통증이 느껴졌습니다. 그래서 저도 모르게 ‘저 너무 이상해요! 너무 아프고 몸이 마비된 것 같이 느껴져요!’라고 의사 선생님과 간호사 선생님을 향해 소리를 질렀습니다.

그러자 선생님 한 분이 제게 오시더니, 어지럽지 않으면 잠시 쉬다가 도수 치료를 받고 귀가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순간 저는 어딘가 잘못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럼에도 도수 치료를 다 받고 집에 가기 위해 버스에 올라탔죠. 문제는 그때부터였습니다. 집까지 가는 1시간 30분 동안 무엇을 해도 계속해서 통증이 느껴지고 허리가 아파왔습니다. 심지어 다음 날이 되어서도 계속 통증이 느껴졌습니다.


지금 돌이켜보면 그때 병원에 다시 갔어야 했는데, 주변에서도 그럴 수 있다고 이야기하니 병원에 가지 않는 대신 친구 금요일을 신나게 보냈습니다.

그러나 다음날인 토요일 아침, 저는 침대에서 일어날 수 없었습니다.


그렇게 시작된 투병기

몸을 움직일 수 없는 상태에서 지난번 처방받았던 약을 먹었습니다. 몇 시간 뒤 겨우 허리를 반 접은 채로 화장실까지 걸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러다가 허리도 펴지 못하게 될까 싶어 어머니의 차를 타고 급히 근처 병원으로 향했습니다. 토요일이라 사람이 많아 1시간 넘게 기다리다가 겨우 진료를 받았습니다. 하지만 그마저도 예약이 밀려 월요일에 다시 와서 검사를 받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집으로 돌아가 침대에 누워 어디서부터 잘못되어 이렇게 극심한 통증에 시달려야만 하는지 곰곰이 생각해봤습니다. 통증을 느꼈을 때 바로 병원에 갔어야 했는데, 아무 일도 없다는 듯 일상을 보내 벌을 받았나 싶었습니다. 일요일이 되어도 통증은 여전했습니다. 그래서 인터넷에서 일요일에도 검사가 가능한 병원을 급히 찾아봤습니다. 마침 근처에 적당한 병원이 있어 그곳으로 향했고, 저는 생각지도 못하게 그때부터 입원 치료를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신경성형술에 대하여

신경외과에서 결국 목과 허리에 신경성형술이라는 것을 받게 되었습니다. 의사 선생님은 제게 아직 나이가 어려 시술을 최대한 하지 않고 싶었으나, 디스크 유착이 심해서 신경차단술을 해도 약이 들어가지 못하고 효과가 없는 지금 상태에서 필요한 시술이라 했습니다. 카테터라는 얇은 관을 넣어 직접 해당 부위를 치료하는 것이었습니다. 시술은 잘 끝났고 이제부터는 문제가 없을 거라 생각했습니다.


목, 허리 시술 후 보호대 착용 중


섬유근육통 진단을 받기까지의 시간

시술받은 후 계속해서 외래 진료를 다녔습니다. 하지만 그럴수록 몸이 점점 더 아파오는 것을 느껴야 했습니다. 통증은 낫지 않고 계속해서 심해졌습니다. 그렇게 몇 개월 지나고 나서 병원에서는 섬유근육통인 것 같다고 했습니다. 그렇게 류마티스 내과로 향했고 거기서 유전자 검사부터 엑스레이, 혈액검사를 받았습니다.


처음에는 유전자 검사를 통해 강직성 척추염 관련 유전자가 발견되어 이 병이 아닐까 싶었지만, 여러 대학병원을 다녀도 뾰족한 병명을 알 수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2020년 6월이 되어서야 서울에 있는 한 대학병원에서 섬유근육통을 진단받을 수 있었습니다.


정확한 원인을 찾지 못한 채 저는 그렇게 섬유근육통 환우가 되었습니다. 물론 통증이 있다고 해서 무조건 이 병의 환우가 되는 것은 아니었고 저처럼 여러 검사를 통해서도 병명을 알 수 없을지도 모릅니다. 저는 그나마 섬유근육통 진단을 받고 나서야 제대로 된 약물치료를 받을 수 있게 되었죠. 통증을 겪어보지 못한 사람들은 심한 병이 아니라 생각할 수 있지만, 저는 병이 발발하던 때부터 약 1년간 회사도 다니지 못한 채 병원만 전전하며 통원과 입원 치료에 시달리면서 정말 생활에 어려움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고압산소치료기
입원 기간 숙제였던 통증 일기


심지어 2019년 말부터는 통증이 심해져 우울증과 더불어 불면증까지 생기며 인생에서 가장 긴 터널에 갇힌 듯한 기분을 느껴야 했습니다. 물론 저뿐 아니라 가족들까지도 힘든 시간이었습니다. 통증 환자들은 겉으로는 멀쩡해 보여 종종 아픈 척한다는 오해를 받기 쉽습니다. 다행히도 제 주변 지인이나 가족들은 저를 잘 챙겨줬지만, 그럼에도 아픔을 이해하고 공감하기란 쉽지 않았죠.

                     

면회 온 친구들


섬유근육통 진단을 받고 난 후의 이야기

진단을 받고 나서 통증이 심할 때마다 강한 약을 쓰다 보니 부작용이 심하게 오거나 정신이 몽롱해질 때가 많습니다. 조금만 오래 앉아 있거나 외출하고 돌아오는 날이면 새벽에는 누가 주먹으로 때리는 것처럼 통증이 극심해졌습니다.


오랜 기간 통증에 시달리다 보니 예전처럼 회사를 다니며 정상적인 활동도 힘들어졌고 우울증이 더 심해졌습니다. 그래서 정신건강의학과의 도움을 받아 우울증 치료를 위해 약까지 먹고 있습니다. 약이 없으면 잠을 자기도 힘든 상태죠.


섬유근육통 증상은 사람마다 제각각이지만 공통적으로 통증과 싸우고 있죠. 통증 환자를 그나마 이해해줄 수 있는 사람은 같은 통증 환자뿐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이 글을 쓰게 되었습니다. 글을 통해 환우들끼리 서로 위로받고 공감하며 함께 이겨나갈 수 있는 힘을 키우고 싶습니다. 저도 정말 통증이 극심한 날에는 섬유근육통 환우들이 모여있는 인터넷 카페에서 다른 분들의 투병이야기들을 보며 위로받곤 하거든요.


제 앞으로의 글을 통해 저와 비슷한 환우들은 위로를 받기를, 그리고 일반 구독자 분들은 병을 예방할 수 있도록 섬유근육통에 대해 알아가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