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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쟈스민 Dec 13. 2022

남극이라도 좋으니 신혼여행 가고 싶어요.

일본 영화 '남극의 쉐프'

결혼하고 제일 많이 들은 질문이 있다.

"신혼여행은?"

"방학 때 가려고."

"왜?"


모두가 의아해했다. 결혼을 하고 바로 신혼여행을 가지 않는 것을. 별다른 이유가 있는 건 아니었다. 그냥 남편의 수업이 많은 시기인 것도 있지만 나의 일정에 변수가 많아서였다. 언제 어디에서 연락이 올지 모르는 상황에 쉽사리 해외로 떠날 수 없었다. 그렇게 3주가 지난 이 시점에 내 취업 관련 연락은 오지 않았고 남편의 일은 더 바빠졌다. 남편이 곧 있으면 방학하지만 난 그때도 연락을 기다리거나 일하고 있을지 모르니 방학을 하더라도 금토일 주말 동안만 시간이 될 것 같았다. 그마저도 확실하지 않아 신혼여행은 사실상 잠정 보류 상태였다. '그때 갔으면 괌은 다녀오지 않았을까.' 나도 나지만 남편에게 미안해졌다. 남편도 나도 해외 경험이 꽤 많았기에 해외여행에 그다지 미련이 없었지만 신혼여행은 느낌이 좀 달랐다. 신혼여행이라는 단어가 주는 느낌 때문이었던 것 같다. 신혼에만 갈 수 있는 일생의 단 한 번뿐인 여행!


일단 신혼여행을 무기한 미뤄둔 체로 집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누워만 있으니 우울해졌다.

'인생은 타이밍이다. 그때 갔어야 했어. 난 지금 뭐 하고 있는 걸까.'

이런 생각들을 하다 우울해지지 않는 노력이라도 해야겠다 싶어 티비를 틀었다. ebs 세계 테마 기행은 나의 최애 프로그램. 겨울이고 윗 지방은 눈도 왔다기에 설원을 보고 싶어 북유럽 편을 보다 갑자기 떠오른 영화가 있어 다시 보았다.


'남극의 쉐프'라는 영화였다. 이 영화는 서정적으로 웃긴 맛이 있는 아주 특이한 코미디 영화다. 이런 식으로 사람을 조용히 웃길 수도 있구나 싶은 영화. 이게 왜 웃기지 하면서 기분 좋게 영화 속 주인공들의 행동, 대사, 풍경들을 감상했다.



영화의 스토리는 별로 없다. 남극 돔 후지 기지에 8명의 남극관측 대원들이 1년 반 동안 함께 생활하는 이야기다. 이곳은 너무 춥기에 펭귄과 같은 생물도 살지 못하고 심지어 바이러스도 살아남지 못한다. 이런 곳에서 기상학자, 의사, 빙하학자 등 관련 인물들이 함께 살아가는데 쉐프인 주인공 니시무라의 시선으로 이야기는 진행된다.


니시무라는 쉐프답게 매일 맛있는 요리를 준비하는데 대원들도 매일 그가 만든 맛있는 음식을 기대하며 남극의 기지 생활을 버텨낸다. 하지만 더 재밌는 건 다양한 직업군의 사람들이 모여있는 만큼 캐릭터 하나하나가 다양한 성격을 가지고 다양한 말과 행동을 한다. 그런 독특한 캐릭터들이 제한된 공간에 모여있다 보니 다들 원초적인 모습을 공유할 수밖에 없어서 웃긴 장면들이 탄생한다. 또 일 년 반이나 가족과 떨어져 아무것도 살아있지 않은 기지에 박혀있다 보니 가족에 대한 그리움과 사랑도 그려지고 대원들끼리 서로 챙기며 그야말로 인간적인 모습을 많이 발견할 수 있다. 웃기고 감동적이고 예쁜 걸 혼자서 다하는 영화다.


영화가 이렇게 잘 만들어질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는 배우들의 수준 높은 연기였다. '한자와 나오키', '리갈 하이'와 같이 유명한 드라마의 주연을 맡았던 대표 연기파 배우 '사카이 마사토'가 쉐프로 등장해 완벽한 연기를 보였고 '노다메 칸타빌레'에서 무서운 피아노 선생 역을 맡았던 '토요하라 코스케'가 호탕한 의사로 등장한다. 또 '고쿠센'에서 세상 가벼운 교감선생님을 연기한 '나마세 카츠히사'가 진지한 학자로 나온다. 그 외에도 일본 드라마나 영화에서 한 번씩은 봤을 법한 얼굴들이 등장해 자연스럽고 흠잡을 데 없는 연기를 보여 보는 내내 편안했다.


점심먹으러 오라니까 저렇게 달려가다가 넘어지는 것도 웃음포인트였다.


대원이 점심을 먹으러 오지 않아 직접 가져온 오니기리는 영하 58도에 얼음덩어리가 되어버림.


닭새우라서 새우튀김으로는 너무 크다고 해도 대원들은 무조건 새우로 튀김을 해달라고 조른다. 막상 닭새우로 튀김을 해주자 너무 크다며 역시 회로 먹었어야 했다는 말에 니시무라의 표정
생일자를 챙기는 훈훈한 모습.

오랜만에 이 영화를 다시 보고 있으니 치유가 되는 기분이었다. 영상이 화려하고 스토리가 임팩트 있는, 소위 우리가 말하는 '재밌는 영화'들은 보고 나면 찝찝한 기분이 드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만큼 뇌리에 꽂혀 잊히지 않아야 재미있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요리로 비유하면 맵고 짜야 맛있는 음식이라고 생각되기에 맛집에 가서 밥을 먹고 나오면 목에서 짠맛이 올라오거나 속이 따가운 경우가 많은 것처럼 재밌다고 소문난 영화를 보고 나면 머리도 아프고 기분도 뭔가 이상하다. 하지만 '남극의 쉐프'는 영화 속 니시무라가 만든 요리처럼 내게 자극적이지 않은 즐거움을 주었다.


덕분에 남극이라도 좋으니 신혼여행을 당장 떠나고 싶다는 생각으로 가득 찼던 머리가 비워지며 우울감이 사라졌다. 영화 속 남극은 그다지 가고 싶지 않은 곳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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