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흐, 수확하는농부. 우리 아이가 키운 상추에 쌈 싸 먹으니 꿀맛이군요.
반 고흐의 'The Harvester', '수확하는 농부'라는 그림을 본 적이 있다. 고등학생 시절 유일하게 예체능을 제대로 배운 시간은 1학년뿐이었다. 나는 예술이 너무 좋은데 인문계 고등학교는 좋은 대학에, 취업 잘되는 학과에 가야 하니 1학년까지만 미술, 음악, 체육 등을 배우고 2, 3학년은 수능에 올인하는 추세였다. 그래서 1학년 때 미술시간은 정말 작고 소중한 존재였으므로 진심으로 즐기며 수업을 들었던 기억이 난다. 미술책에서 보았던 후기 인상주의의 대가 반 고흐의 작품은 그의 힘들고 치열했던 삶과는 달리 너무나 화려하고 영적으로 보였다. 그러다 그의 작품들을 조사하는 숙제를 하며 그 작품들 중 비교적 수수하고 친근한 그림을 본 적이 있었다. 그건 '수확하는 농부'였다. 난 이 그림이 고흐의 그림 중에서 제일 좋았다. 이 그림은 아무리 보아도 질리지 않고 시간이 지난다 하여도 촌스러워지지 않았다. 그건 가장 정직하고 인간적인 소재인 농부와 농작물을 담백하게 그려냈기 때문일 것이다.
어쨌든 고등학생 때 그 그림을 본 후로 난 촌에서 드라이브를 하거나 외가댁에서 농사일을 도우며 할아버지, 할머니를 보면 반 고흐의 수확하는 농부가 떠오른다.
십여 년이 지난 지금 한참 동안 잊고 있던 수확하는 농부 그림이 떠오른 일이 최근에 있었다. 학교에 출근하는 길, 어느 날 아침이었다. 학교 옆 화단에 작은 텃밭이 생겼다. 장난스레 무슨 교감, 교장선생님의 주말 농장이라도 되나 하고 상상하던 중 쏟아지는 메신저에서 그 텃밭에 대한 내용을 보았다. 저탄소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우리 학교 아이들이 그 텃밭에 농작물을 재배하기로 한 것이다. 고등학생 아이들이 무슨 농사에 그리 관심이 있을까 싶어 무시하고 지나쳤다.
그런데 내 예상과 달리 아이들은 진심이었다. 매일 아침 나보다도 일찍 등교하여 출근할 때 보면 이미 농작물에 물을 다 주고 상추, 치커리 등에 거름을 주며 채소들이 무럭무럭 자라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아닌가. 내심 속으로 놀랐다. 정말 채소가 그렇게 잘 자랄 줄은 몰랐으니까.
내가 이 프로젝트에 더 관심이 갈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우리 반 아이 하나가 이 프로젝트에 거의 중심이었기 때문이다. 난 이 친구가 이렇게 농사에 진심인 게 의아했다. 우리 학교는 공업고등학교여서 밀링, 용접, 선반 같은 것에 관심이 많았다면 그러려니 했을 텐데 맨날 아침, 점심, 저녁으로 풀만보고 있으니 그 속이 궁금했다.
그러다 면담시간에 아이와 상담을 하며 그 친구의 꿈이 농부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는 적잖이 당황했다.
"아니, 농부가 될 건데 굳이 공고엔 왜 왔어?"
"공업도 좋고 농업도 다 좋아요. 공고에 다니면 농사 좋아하면 안 돼요?"
맞는 말이었다.
난 편협한 시각으로 아이들과 세상을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 아이들은 어디에서 무엇을 배우고 어떻게 살아가던 그들이 좋아하는 것이 있고 꿈이 있다. 그것이 남들 눈에는 어떻게 보일지라도 어른은 응원해줄 수 있고 편견 없이 이를 받아들여줄 수 있어야 한다.
아침에 출근길에 상추가 꽤 잘 자랐길래 우리 아이에게 장난스레 말했다.
"야. 많이 컸네. 조만간 샘이 상추 캐다가 된장에 쌈 싸 먹어야겠다."
그 말에 아이는 당황한 건지 우스운 건지 땀을 삐질거리며 웃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자신이 수확한 첫 농작물을 봉투에 담아왔다. 상추며, 치커리며 종류도 다양했다.
세상에 채소가 그렇게 예쁠 수 있을까. 제자에게 받은 채소는 꽃보다 아름다웠고 아이의 모습에서 고흐의 수확하는 농부를 보았다. 예술이었다. 고흐의 작품만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