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익숙함을 버리고 불편함을 선택하면 (완)

by 리온

오랜만에 수강신청을 하자 현실로 돌아왔다는 게 실감이 났다. 학교에 가야했으니 알바도 주말 타임으로 바꿨다. 그러다 문득 ‘휴학을 하면 꼭 해야 하는 일‘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떠올랐지만 크게 아쉽지는 않았다. 여행이니 워홀이니 하는 건 목적이 있어야 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내 목적은 실습을 피하는 것 뿐이었으니, 어째 보면 (단기적으로는)성공한 셈이었다.


실습은 한 학번 후배들과 하게 됐다. 동기는 단 한 명도 없었다. 그 해에는 실습 일수가 변경 돼 나는 동기들보다 절반이나 적은 시간 동안만 하면 됐다. 실습은 생각한 것만큼 별로였고 생각한 것 이외로도 힘들었다. 사람을 대하는 일 뿐만이 아니라 전공과 관련된 일도 업으로 삼을 수 없겠다고 생각하던 차였다.


당장 내년에 졸업을 하고 뭘 해야 할지를 생각해 봤다. 책과 영화를 보는 게 즐거웠지만 '보는 것'은 직업이 될 수 없으니 고려대상이 될 수도 없었다. 그렇다고 내가 책을 쓰거나 영화를 만들 수도 없었다. 왜 안 되냐면, 그냥 말이 안 되니까. 빵을 좋아한다고 해서 자신이 직접 베이커리를 차리는 사람은 드물다. 누군가는 그러겠지만 적어도 나는 아니다. 간간히 재밌을 만한 아이디어들을 적어뒀지만 세상에 재밌는 이야기는 차고 넘치니 그저 자기만족용으로 그칠 터였다.


고민은 날이 갈수록 넓어지고 깊어졌지만 시간은 아무 상관 않는다는 듯 착실히 흘러갔다. 남은 게 없다는 생각에 노트를 꺼냈다. 어느 자기 계발서였는지 모르겠지만 대충 생각나는 내용들을 따라 해 봤다. '무언가가 모호할 때 해야할 일: 그 일을 노트에 적어보자. 정확하지 않아도 좋다. 머릿속에 떠다니는 모호한 개념들을 자세히 적자'.



빈 페이지를 펴서 하고 싶은 것과 그렇지 않은 것들의 목록을 쭉 적었다. 전자에는 '늦잠 자기, 풍부한 사운드로 음악 듣기, 그림 그리기, ...그냥 아름다운 것들을 보고 듣기.', 후자에는 '아침 일찍 알람 소리에 깨기, 매일 똑같은 풍경 보기, 변하지 않는 일 하기' 등이 적혔다.


어렴풋이 내가 뭘 하고 싶은지 깨달았지만 단정할 수는 없었다. 그저 이제는 고민하는 것도 뭔갈 피해 도망치는 것도 지겹다고 생각했다. 그러려면 지금처럼 마주해야 했다.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keyword
금요일 연재
이전 06화익숙함을 버리고 불편함을 선택하면(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