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한 달 살기의 두 번째 날 아침을 맞았는데 오른쪽 가운데 발가락에 물집이 잡혔다. 아니, 하루 트레킹하고 벌써 발에 물집이라니 앞으로 한 달을 어찌할지 걱정이 앞섰다. 첫날 박 배낭 챙겨서 서울에서 제주까지 내려오자마자 힘들게 15km짜리 1코스를 완주를 하다 보니 몸에 무리가 되었다. 그래도 하루 종일 제주의 바닷바람을 맞고 시원한 파도소리를 들어서 인지 아침에 일어나 보니 기분은 상쾌했다. 다행히 챙겨 온 짐 중에 옷핀이 있어서 응급조치를 하고 오늘 코스에 대한 가이드북 <제주올레 인문여행, 이영철 지음, 2021년>을 다시 읽었다. 몸 컨디션도 그렇고 해서 혹시나 하는 마음에 '우도 자전거'를 인터넷으로 검색했다. 예상보다 더 많은 자전거, 소형형 전기차 렌트 샵들이 섬 내에 운영되고 있었다.
올레길 400km를 도보로만 생각하고 있었는데, 2일 차 코스에서 갈등이 생겼다. 오른쪽 발바닥은 아침부터 찌릿찌릿한데, 과연 도보로 강행군을 할 것인가. 아니면 자전거의 도움을 받을 것인가. 나 자신 안에서 두 가지 마음이 결론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첫날 식당에서 주인 할망(할머니)께서 내게 던진 말이 있었다. 들어오는 포스가 산 좀 탔을 거 갔더라는 말을 하셨다. 왠지는 모르겠지만 사람을 오랫동안 대하는 장사를 하셔서 그런지 느낌이 오신다고 했을 때 왠지 나도 그 소리가 싫지를 않았다. 근데 이제 와서 트레킹을 포기하고 물질문명의 이기인 자전거에게 도움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니 약간 자존심이 구겨지기도 했다. 배가 성산포항을 떠나 우도 천진항에 도착할 때 까지도 도보로 이동할지, 자전거를 사용할지, 결론을 못 내리고 있었다.
도보로 이동할지, 자전거를 사용할지, 결론을 못 내리고 있었다.
배가 도착하고 백여 명의 여행객들이 내릴 때 나는 느꼈다. 등산복을 입고 있는 사람들은 몇 명 보이지 않고 대부분이 바람 쐬러 온 연인들이나 가족들이었다. 그들은 대부분 자전거나 소형 전기차 샵으로 달려갔다. 나의 발길은 당연히 올레길 표식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스스로에게 자존심은 올라갔지만 그래도 발바닥은 약간 져렸다. 천진항에서 코스 시작 스탬프를 찍고 천연기념물 제438호인 서빈백사에서 잠시 쉬면서 '우도 땅콩 아이스크림'으로 원기를 회복시켰다. 이곳은 석회조류 식물인 홍조단괴(김,우뭇가사리 같은 홍조류가 해안 퇴적과정중 백사장을 만드는 것)로 형성된 해변으로 세계 3대 홍조단괴 해변이다. 햇빛이 비추면 눈이 부실 정도로 하얗고 에메랄드 빛의 바다와 어우러지면 더욱 환상적이다. 특히 같은 섬의 검멀레(검은모레) 해변의 모래가 검은색인 것과 대조적인 것도 눈여겨볼 여행의 관심 포인트이다.
호기롭게 트래킹을 시작한 지 두어 시간이 지나고 올레 코스 중간지점인 하고수동 해수욕장에서 중간 스탬프를 찍고 얼마 가지 않아 갑자기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원래는 오후 4시경부터 비예보가 있기는 했다. 아직 시간은 안 됐지만 갑자기 내리는 소나기로 인해 혹시나 섬에 갇히지는 않을까 하는 걱정으로 급하게 순환버스를 타고 천진항으로 이동을 했다. 어이없게도 천진항에 도착하자 비가 그쳤다. 오늘 코스의 올래 후반부 하이라이트인 우도봉, 검멀레 해변을 못 본 게 아쉬웠던 차에 마음을 바꿔먹었다. 천진항 입구에 즐비해 있는 렌탄샵에서 15,000원을 지불하고 하루종일권 전기자전거를 렌탈 했다. 경사를 오를때는 힘이 좀 들기는 했지만 역시 배터리의 힘으로 기존의 자전거보다는 힘차게 바람을 가르며 섬을 누볐다. 아니 왜, 진작부터 전기자전거를 빌리지 않았나 약간 후회가 됐다.
하고 싶은 것이 있다면 하면서 살고 싶다.
갑자기 나는 아직도 남의눈을 신경 쓰면서 살고 있지는 않은지 걱정이 됐다. 다른 사람들은 나에게 대해서 신경도 안 쓰고 관심도 없다. 하지만 나는 늘 다른 이들의 눈치를 보면서, 때로는 저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 것인가를 고민하면서 살아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걸어가든, 자전거를 타든 아무도 신경을 안 쓴다. 내가 걷고 싶으면 걷는 것이고, 내가 자전거를 타고 싶으면 타는 것이다. 얼마 전에 방문한 귀촌 선배의 말마따나 '앞으로는 하고 싶지 않은 일'은 하지 않고, 하고 싶은 것이 있다면 하면서 살고 싶다. 그것이 도덕적으로나 다른 이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범위에서 말이다. 나의 SNS 프로필 사진의 모토처럼 ' Enjoy my Life' 하면서 남은 생을 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