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소채 Sep 03. 2022

태풍 비에 올레길은 미친 짓

제주 올레길 3코스(온평 포구~표선 해수욕장)

제주도에 내려오자마자 지인들로부터 여러 통의 문자와 전화를 받았다. 11호 태풍 '힌남노' 때문이다. 제주도에서는 내일모레가 최대 고비라고 한다. 하지만 오늘 새벽부터 비가 내리기 시작해서 하루 종일 세찬 비바람이 몰아쳤다. 보통은 비가 내리거나 눈이 내리면 등산을 포기하는 경우가 있다. 하지만 나는 비가 내린다고 계획했던 산행을 취소하는 경우가 없었다. '우중산행'이라는 미명 아래 자연 속에 나 자신을 온전히 내놓을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하고 빗속에 나 자신을 맡겨 버린다. 몸이 비에 젖고 등산화가 물에 잠기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물론 도시생활에서야 조금이라도 물에 젖는 것을 싫어한다. 그러한 것들이 도시인들에게는 또 다른 스트레스로 다가 오지만 여기는 자연의 도시 제주도다.


숙소에서 아침 일찍 준비해준 조식을 먹고 허리띠 배낭에 꼼꼼히 짐을 챙겨본다. 우산, 우의 그리고 코스 종착지점에서 사우나에 갈 요량으로 갈아입을 옷들과 올레 쿠폰북을 락앤락 비닐봉지에 넣었다. 숙소를 나서기 전에 혹시 몰라서 뜨뜻한 녹차도 끓여 물통에 담았다. 등산복은 첫날 입고 빨래 안 하고 살짝 말린 윗도리를  빗속에 자연 빨래한다는 생각으로 꺼내 입고 바지는 추울지 몰라 가을용 등산바지를 입었다. 마치 전쟁터를 나가는 신병처럼 설레는 마음으로 이것저것 챙겨서 숙소를 나섰다. 약 200미터 도로가에 있는 버스정류장까지 가는 동안 뽀송뽀송하던 양말과 캠프라인 등산화는 서서히 젖어들기 시작했다. 살짝 불편한 마음이 들기는 했지만 신발이 젖고 양말이 축축해질수록 마음은 편해지기 시작했다.   


중달 리에서 탄 201번 버스는 해안을 40여분 달려 온평초등학교에 도착했다.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본격적으로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정류장에서  올레 제3코스 스탬프 찍는 곳까지 거리가 꽤 되었다.  코스를 시작하자 처음 맞는 것은 '온평 환해장성'이다. '환해장성'은 오래전부터 외부의 침입을 막기 위해 쌓은 돌 성벽이다. 제주지역에 총 28개가 남아있지만 10개 정도가 상태가 온전하게 보존되고 있다. 이곳은 총길이가 2km 정도로 가장 길다. 관광객의 눈으로는 단순히 돌로 쌓은 벽이겠지만 역사의 현장에서는 때로는 삼별초를 막기 위해 고려군이 쌓고, 고려군을 막기 위해 또 삼별초가 다시 쌓고, 세월이 흘러 일본 왜구들을 막은 역사의 증거물이자 제주도민들의 땀과 눈물의 결과물이다.


제3코스는 내륙 코스와 해안코스가 있는데, 나는 비가 온다는 핑계로 짧은 해안코스를 택했다. 왼쪽 편에 바다를 두고 해안선을 따라 5시간 정도를 걷는다. 비가 내리지 않았다면 나름 룰룰랄라 하면서 걸었을 코스이지만 오늘은 상황이 전혀 다르다.  다행히 바람이 등 뒤에서 불어서 맞바람은 피할 수 있었지만 가끔 바닷가 쪽에서 불어오는 세찬 바닷바람은 빗줄기가 송곳처럼 우의를 내리치게 했다. 특히 우의 모자 왼쪽 귓가 근처를 내리치는 빗방울은  연발 따발총 소리처럼 고막을 때렸다. 등산화는 찌꺽찌꺽 물소리를 내고 발은 불기 시작했고 온 몸은 땀반, 물 반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태풍 비를 뚫고 미친 듯이 해안선을 걷고 있는 나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 건가. 상황은 좋지 않았지만 왠지 기분은 나쁘지 않았다. 삶의 긴장감이 조금씩 풀리고 있는 느낌이다.


목표지점인 표선해수욕장에 도착하니 비에 흠뻑 젖어 6시간을 홀로 걸어 도착한 나보다 더 상태가 안 좋은 사람들이 보였다. 비바람과 강풍에 윈드서핑과 카이트 서핑을 타고 있다. 세상에는 정상적인 사람들만 있는 것이 아니다. 약간은 정상에서 어긋난 사람들도 있는 게 사실이다.  그것이 잘못된 것(Wrong)은 아니다. 단지 다를(Differnce) 뿐이다. 지친 몸을 쉬기 위해 해수욕장 의자에 기대어 잠시 쉬는 동안, 갑자기 몇일전 성산일출봉 터진목에서 본 4.3 유적지 생각이 났다. 지금 저 제주도 해안에서 해양 스포츠를 즐기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일까.  과거 제주 역사의 아픔이었던 4.3 사건의 피해자인 제주도민의 후손인지, 아니면 가해자인 '서북청년단'의 후손인지가 궁금해졌다. 제발, 제주도민의 후손이었으면 좋겠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