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피 버스 데이 투미(Happy birthday to me)', 오늘은 내 생일날이다. 누구에게나 생일은 뜻깊다. 하지만 매년 돌아오는 날이다 보니 그 가치는 갈수록 희석이 된다. 아침에 모친께서 새벽부터 카톡을 날리셨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섬에서 맞는 특별한 생일이니 잘 보내라'는 메시지와 함께 모친의 아침밥상 사진을 보내셨다. 작년에 요맘때쯤 다음 내 생일을 맞이하면 모친께 요리학원에서 배운 레시피로 '미역국'을 끓여드릴 작정이었다. 왜냐하면 내 생일에 난 한 것이 없기 때문이다. 모친 덕분에 내가 세상에 나왔고, 그날 제일 힘들었던 사람은 바로 어머니 이기 때문이다. 아쉽게도 올해는 나의 갑작스러운 '제주 한 달 살면서 올레길 완주하기' 프로젝트로 인해서 다시 내년으로 미뤄야 했다. " 죄송합니다. 내년에는 맛난 쇠고기 미역국 끓여 드릴게요."
" 죄송합니다. 내년에는 맛난 쇠고기 미역국 끓여 드릴게요."
태풍이 온다는 소리에 며칠 전부터 긴장을 하고 있던 터라 새벽부터 날씨를 확인 했다. 예상과는 달리 비가 내리지를 않았다. 숙소에서 조식으로 준비해준 오므라이스와 함께 전날 편의점에서 구입한 '미역 쌀국수'를 먹었다. 모친께 미역국은 끓여들이지 못했지만 나를 위한 조그마한 이벤트로 준비한 것이다. 전날 저녁에 인터넷으로 4코스의 종점 지도를 확인하던 중에 '사우나'라는 글자가 눈에 들어왔다. 제주도에 내려오고 나서 요 며칠 잠을 자기 전에 온 몸이 가려운 현상이 일어나 여기저기 긁다가 잠이 들곤 했다. 환경이 바뀌어서 그런 건지, 건조해서 그런 건지 정확하게는 모르겠지만 뜨거운 탕 속에 몸을 담그고 싶었다. 피곤하면 반신욕을 하던 습관이 있어서 인지 요며칠 과도하게 지친 육체 피로를 잠시나마 풀고 싶었다.
표선해수욕장의 스탬프 찍는 곳(3코스 종점이자 4코스 시작점)은 며칠 전 내가 엄청 헤매었던 곳이다. 해수욕장 내를 몇 바퀴를 돌면서, 사람들에게 물어물어 올레 안내소 앞의 스탬프 찍는 파란색 간세(조랑말) 모형을 어렵게 찾았었다. 오늘은 그 경험을 되살려 버스 정거장에서부터 시작점까지 가깝지 않은 거리지만 쉽게 찾아서 4코스를 시작했다. 올레코스의 평균 거리는 15km 정도인데 오늘의 4코스는 19km로 출발할 때부터 마음을 단단히 먹었다. 하지만 꼭 100프로 걸어서 완주를 해야 하겠다는 생각은 없다. 걸을 때는 열심히 행군하듯이 걷다가도 설명 표지판들이 나오면 꼼꼼히 읽어보고 사진도 찍고, 힘들면 쉬기도 하고 간식도 먹으면서 여유 있게 걷고 싶었다. 제주도 말로 '놀멍, 쉬멍, 걸으멍'을 나도 따라 하고 싶다.
'놀멍, 쉬멍, 걸으멍'을 나도 따라 하고 싶다.
두시간쯤 걷는 중에 정오쯤이 되었지만 총거리의 반도 걷지를 못했다. 그래도 최소한 점심식사는 중간지점에서 하고 싶었다. 중간지점이 위치한 식당의 이름은 '알토산 고팡'('알토산'은 '동네 이름'이고 '고팡'은 제주도 말로 '창고'를 뜻한다)이다. 식당 이름이 쉽게 머리속에 안 들어온다. 이 식당의 시그니처 음식이 '문어 라면'이라는 것을 올레길에 붙어있는 간판을 보고 알았다. 허기를 가까스로 참으며 마을 해변에 거의 다 왔을 때였다. 수평선 끝에 검은 먹구름이 보였다. 영화에서 보면 거대한 괴물이 나타나기 전에 하늘이 검은색으로 변하고 괴물이 나타난다. 검은 먹구름이 보이자마자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하더니 갑자기 물 폭탄처럼 빗줄기가 굵어졌다. 나는 재빨리 허리 배낭 지퍼를 열고 파란색 '우의' 를 꺼내려했다. 아뿔싸! 없었다. 숙소에 두고 온 것이다.
식당을 400미터 남겨두고 물폭탄을 맞았다. 마치 물속에 풍덩 빠져 있는 느낌으로 머릿속이 갑자기 복잡해졌다. 4코스를 여기서 포기하고 택시를 불러서 숙소까지 돌아가야 할지, 아니면 비가 그칠 때까지 기다려야 할지, 아니면 남은 거리를 빗속을 뚫고 걸어가야 할지를 결정해야 한다. 우선은 비를 피해 식당에 들어가서 방법을 찾아야 하겠다는 생각에 몸에서 물이 뚝뚝 떨어지는 상태로 식당 안으로 들어갔다. 주인이 챙겨준 수건으로 대충 닦고 저걱거리는 등산화로 물 도장을 찍으면서 테이블로 갔다. 식당 주인은 흠뻑 젖은 나의 바지를 보더니 가죽의자 대신 플라스틱 의자로 대체해 주었다. 양말은 화장실에서 벗어서 꼭 짜고, 등산화를 벗고 맨발 상태로 음식을 주문했다. 그 와중에 '문어 라면'에 공깃밥까지 말아먹고 후식으로 따뜻한 아메리카노까지 마시면서 작전을 구상했다.
식당 주인에게 우의를 빌리고 버스를 타고 4코스 종점인 '남원포구'까지 가기로 했다. 그런데 목적지 정류소에 내려서 종점 스탬프 찍는 곳까지 가는 동안 왠지 손이 허전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젠장, 스틱을 어디에 두고 온 것이다. 버스에 두고 내렸나, 아님 화장실에 두었나. 기억력을 쥐어짜 보니 아까 물폭탄을 맞고 정신이 없던 차에 식당 입구에 두고 온 것이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그 식당 근처의 정류소 이름이 생각이 나질 않았다. 우선 식당에 전화를 걸어 스틱을 잘 보관해 달라고 사정했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식당 주인에게서 공짜로 받은 우의를 기념하기 위해 정류소 앞에서 셀카 찍은 것이 생각났다. 정류소 이름은 ' 산열이통 입구'였다. 이 정류소 이름도 식당 이름만큼 어렵다. 도저히 한번 들어서는 외우기 힘든 정류소 이름이다.
어찌 되었던 남원포구에서의 종점 스탬프를 찍고, 인근 사우나에서 뜨거운 탕에서 휴식도 취하고, 미리 챙겨한 뽀송뽀송한 속옷도 갈아입었다. 사우나를 마치고 버스를 타고 우선 '산열이통 입구'로 이동해서 스틱을 찾고, 공짜로 받은 우의를 대신해서 편의점에서 새 일회용 우의를 구입해서 고맙다는 말과 함께 전달했다. 다시 버스를 타고 종달리까지 이동했다. 왠지 오늘 일정이 뒤죽박죽 되고 일정이 오락가락 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할 건 다 했다. 숙소 근처 버스 정류장에서 내리자마자 다시 물폭탄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아마 내일은 하루 종일 태풍 때문에 숙소에서 머물러야 한다. 그놈의 태풍, 나의 프로젝트를 더 어렵게 만들고 있다. 내일 아침에 비가 그렇게 많이 내리지 않으면 난 또 미친 듯이 올레길을 걷고 있을 거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