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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채 Sep 04. 2022

서울에서 내려온 그녀

제주 올레길 2코스(광치기 해변~온평 포구)

제주에 온 지 4일 차이다. 며칠 전부터 그녀가 제주도로 내려온다는 것을 알았다. 새롭게 직장을 옮기고 잠깐 쉬는 며칠 동안 제주도에서 쉬었다가 갈 모양이다. 그녀의 숙소는 내가 묵고 있는 곳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으로 요즘 유행하는  메디테이션(Meditation, 명상) 콘셉트의 호텔이다. 호텔 프로그램에 명상과 요가, 그리고 힐링음식 등이 포함되어 있다고 한다. 제주 올레길을 위한 숙소 콘셉트와는 전혀 다른 콘셉트로 1박 요금이 내가 묵고 있는 숙소의 1주일치 요금과 비슷하다. 전날 하루 종일 비를 맞고 제3코스를 다녀 오다보니 오후에는 파김치가 되었지만 후딱 정리하고 숙소를 떠나 저녁식사를 함께 하기 위해 그녀가 묵고 있는 숙소로 이동을 했다. 마침 그녀의 숙소 앞에 분위기가 근사한 바닷가 식당에서 장어덮밥과 성게 미역국을 주문하고 한라산 소주도 한병  시켰다.


그녀가 가져온 수제 케이크에는 조그만 글씨들이 쓰여 있었다. "내 영원한 이상형, 아빠"라고 말이다. 딸내미가 휴가차 제주도 방문을 했고, 내 생일을 기억하고 이벤트를 만든 것이다. 이 맛에 딸을 키우나 보다. 첫날(어제)은 각자 일정을 소화하고 두 번째 날(오늘)에는 같이 올레길을 걸을 계획이었다. 코스도 딸에게 맞게 3코스보다는 쉬울 거 같은 2코스로 수정을 했었다. 아침 일찍 딸에게 문자 해서 만날 약속을 정하려고 했으나 비행기 결항이 걱정이 되었는지 그냥 하루 일찍 서울로 돌아간다고 했다. 새로운 직장에 출근하는데 첫날부터 결근이나 지각을 해서는 안되기 때문에 최상의 컨디션을 위해서 최선의 선택이었다. 숙소를 나서기 전까지 비가 내리지 않아서 어제보다는 가벼운  마음으로 버스를 타고 광치기 해변으로 이동을 했다.


2코스는 광치기 해변에서 중간 스탬프를 찍는 제주 동 마트까지 우회하는 방법이 눈에 들어왔다. 성산일출봉 앞의 '오조리 철새 도래지'와 식산봉을 둘러가지 않고 바로 우회하면 거리, 시간을 줄일 수 있었다. 순간, 나는 또 고민에 빠졌다. 살아가는 동안 항상 편한 길로만 가려고 하는 습성이 또 여기서 여실히 드러난 것이다. 마음을 고쳐 잡고 정상적인 길로 가기로 했다. 역시나 정상적인 올레길은 나에게 새로운 느낌을 준다. 특히 식산봉에서 바라본 성산 일출봉의 모습은 또 다른 매력에 빠지게 한다. 밤에 중간 늪지대에 비친 달의 모습을 보면 '쌍월'을 느끼게 해준다고 한다. 아쉽게도 밤까지 기다리기에는 갈 길이 멀다. 혹시나 다음번에 야간산행을 할 기회가 생기면 그때를 기약해 본다.


코스 중에는 오름으로 '대수산봉' 이 있다. 이곳에서는 성산일출봉뿐만 아니라 섭지코지의 풍광도 일품이다. 정상에 놓여있는 하얀 의자에 짐을 풀고 등산화를 벗고 양말도 통풍을 시켜주고 고생한 나의 두발도 마사지로 피로를 풀어 주고 행동식으로 요기를 했다. 전날 코스 말미에 사둔 오메기떡 2개와 약식을 챙겨 오길 잘했다. 점심 즈음 중간 스탬프를 찍은 '제주 동 마트'를 지난 이후에 식당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던 것이다. 코스의 말미에 도착한 곳은 은평리의 '혼인지'이다. 제주도는 '설문대할망'이 빚어 만들고 어느 순간 3명(고씨, 양 씨, 부 씨)의 남자가 나타나고 곧이어 벽랑국 여자들과 혼인을 맺고 가족을 이루기 시작했다는 전설이다.  3쌍의 부부는 한 동굴(신방 굴)에서 설레는 마음으로 신혼을 살았다는데 아마도 제주도 최초의 '다세대 동굴'이었듯 하다.


코스를 마치고 온평포구 베트남 쌀 국숫집에서 파도치는 해안가를 바라보며 제주도 돼지고기가 듬뿍 들어간 볶음국수(똣똣면)와 시원한 맥주 한잔으로 늦은 점심식사를 했다. 6시간가량 15km을 걸었지만 왠지 전날에 비해서는 훨씬 몸에 부담이 적었다. 숙소에 돌아와 간단히 샤워와 밀린 빨래를 하고 박 배낭을 챙겼다. 동네 오름인 '지미봉'을 오르기 위해서다. 원래 제주 한 달 일정을 짤 때 맨 마지막 21코스의 끝자락인 '지미봉'에서 텐트 1박을 할 예정이었기 때문에 사전답사 겸 야경을 보면서 라면이라도 끓여 먹을 요량이었다. 박 배낭을 메고 들머리를 종달리 동네에서 바로 치고 올라가는 코스로 잡았다. 높이는 160미터 정도로 너무 만만하게 생각했다. 급경사 등산로에는 사람이 다니지를 않아서 잡초들이 너무 많아 한발 한발 내 딫기가 어려웠다.


땀을 한 바가지 흘리고 겨우겨우 정상에 오르자 시원한 바닷바람과 바닷가 산에서만 느낄 수 있는 풍광을 선사해 주었다. 특히 왼쪽에는 우도가 오른쪽에는 성산일출봉이 바다 위에 우뚝 솓아 있는 모습은 내 머릿속에 오랫동안 남아있을 추억으로 각인되었다.  캠핑용 의자에 앉아 멋진 제주 바다 섬들을 바라보며 제주 특산물이라고 생각되는 음료를 꺼내 마셨다. 겉포장에는 '생유산균 제주 막걸리'라고 인쇄되어 있었다. '그래, 나는 막걸리를 마시는 게 아니라 유산균을 마시는 거야'라고 생각하면서 목을 축였다. 해가 떨어지면서 하나둘씩 켜지는  섬 주위의 가로등이 서울에서 바라보는 도시 네온등과는 전혀 다른 느낌이었다. 갑자기 한두 방울 떨어지던 빗줄기가 굵어지기 시작했다. 아마 태풍이 몰려오고 있는 듯해서 아쉽지만  빠르게 배낭을 정리하고 헤드랜턴에 의지해 조심스럽게 하산해서 동네 숙소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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