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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채 Aug 31. 2022

이젠 천천히 삽시다

제주 올레길 1코스(시흥리 정류장~광치기 해변)

소풍 가기 전날 셀레는 아이들의 마음으로 잠자리에 들었다. 한 달 동안 제주도 올레길 완주를 위해 75리터짜리 백패킹 배낭에 짐을 꾸렸다. 아무래도 바퀴가 달린 여행용 가방이 아니다 보니 무게가 관건이었다. 가지고 가고 싶은 것들을 모두 챙겨 넣고 배낭을 메보니 어깨와 허리에서 느끼는 무게감이 장난이 아니었다. 몇 가지 눈에 걸리는 물품을 슬그머니 뺄 수밖에 없었다. 새로 산 스마트폰 보조 배터리는 아예 빼버리고 에어매트용 에어펌프는 가벼운 아날로그식 공기주입 주머니로 대체하고 전기면도기도 일회용 면도기로 바꾸었다. 아쉽지만 한 달 동안 읽을 책도 몇 권 가져가려다가  딱 2권만 챙겨 넣었다. '50부터는 인생은 뺄셈, 마음은 덧셈'이라 진리를 다시한번 느꼈다. 그래도 배낭 무게는 20kg에 육박했다.


'50부터는 인생은 뺄셈, 마음은 덧셈'


빡빡하게 26개 코스를 한 달간에 마치기 위한 나의 일정은 친구로부터 MBTI(성격유형검사) 성향상 J (Judgging , 판단형) 판정을 받았다. 오십 평생을 그렇게 살아왔고 이번 여행 계획도 그렇게 평소 하던 대로 꼼꼼하게 날자별 일정을 짜고 첫날 하루의 동선 및 시간계획을 머릿속으로 시뮬레이션 하면서 시간일정을 계산했다. 육중한 백패킹용 배낭을 메고 첫날 1코스(15km)를 걷고 싶지 않아서 숙소에 맡기기 위해 도착 예정시간을 예상했다. 8시 김포 출발 비행기는 9시에 제주공항에 도착해서 1시간 정도면 성산 일출봉 근처에 있는 숙소까지 갈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웬걸, 당초 계획인 10시에서 두시간이나 지난 12시가 넘어서야 도착했다. 버스는 해안선을 따라 천천히, 아주 천천히 이동을 했다.


제주공항이 있는 북쪽 끝에서 섬의 동쪽을 지나 남쪽 끝자락인 서귀포 버스터미널까지 순환하는 201번 간선버스는 해안선을 가깝게도 멀게도 하면서 해안도로를 여유있게 운행했다. 오늘따라 동네 할망(할머니)들을 유난히도 많이들 타고 내리셨다. 내가 보기에는 거의 90세에 가까운 할머니들이 지팡이를 사용하시기도 하고  보조 기구들도 밀면서 버스를 타고 내리셨다. 누구 한 명 짜증 내는 사람 없이 할망(할머니)들이 힘겹게 오르내리는 것을 서로 도와주면서 여유 있게 버스가 운행되고 있었다.  중간에 버스 대기시간 및 환승시간이 포함되기는 했지만 차가 막힌 것도 아닌데 45km의 거리를 거의 세 시간 만에 도착한 것이다. 예상보다 시간이 많이 지체되었지만 화가 나지 않았다. 오히려 내가 여태까지 너무 급하게, 빠르게만 그리고 앞만 보고 살아왔다는 자책감이 밀려들었다.


너무 급하게, 빠르게만 그리고 앞만 보고 살아왔다는 자책감이 밀려들었다.


하지만 성격이 어딜 갈까, 급해진 마음에 버스에서 내려 박 배낭을 메고 숙소를 찾느라고 한참을 헤맸다. 숙소의 이름이 어려워서 '뚜르 드, 뚜르 드'를 머릿속에 되새기며 팻말을 찾으면서 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아스팔트를 거의 30분 이상을 걸었다. 가도, 가도 팻말이나 간판이 나오지를 않았다.  박배낭이 너무 무거워 잠시 쉬어갈 겸 숙소에서 보내준 '숙소 찾는 법'을 다시 숙지했다. 아뿔싸! 아무래도 지난 친 것이 분명했다. 누군가 바쁠수록 돌아가라 했던가. 다시 '빽도'를 했다. 이번에는 눈에서 레이저를 쏘면서 팻말 읽기에 더욱 집중을 했다. 결국은 찾았다. 젠장, 팻말에는 'Tour de Jeju'라고 불어로 쓰여 있었다.   우리나라 말로 '제주여행'을 불어로 '뚜르 드 제주'라고 하나보다. 갑자기 주인이 원망스러웠다.


박베낭을 맡기고 가벼운 차림으로 숙소근처 '종달리'에서  버스를 타고 제1코스 시작점인 '시흥리'에서 내렸다. 제주시에 속하는 '종달리'는 21코스의 마지막 코스이고 1코스 시작점인 '시흥리'는 서귀포시에 속한다. 우연인지 아님은 일부러 그랬는지 올레코스는 섬의 동쪽 끝자락 서귀포시의 '시흥리'의 '시'로 시작해서 시계방향으로 한 바퀴를 돌고 제주시의 '종달리'의 '종'으로 끝난다. 올레 제1코스 내에서도 시흥리, 종달리, 시흥리로 다시 이어진다. 초입의 올레 안내소에서 '올레 패스포트'를 구입하고 제주도 368 개의 오름 중에 하나인 '말미오름'을 올랐다. 숨이 차오르고 땀이 흥건해지기 시작했다. 정상에 오르자 바닷바람이 온몸의 열기를 식히고 눈앞에는 성산 일출봉과 우도가 푸른 바다 위에 우뚝 솓아 올라 장관을 이루었다.


올레길은 나에게  '천천히 살라'고 이야기해주고 과거의 역사도 말해주고 있다.


성산일출봉은 제주도에서도 가장 인기 있는 곳이다. 제주도 신혼여행에서 많은 이들이 행복한 감정을 갖고 성산일출동을 찾는다. 하지만 외지인들이 잘 모르는 슬픈 역사가 있는 곳이 바로 성산일출봉이다. 하나는 태평양 전쟁 말기(1945년경)에 일본군에 의해 만들어진 18개의 '동굴진지(제주 전체 104개)'이고 또 하나는 '4.3 성신터진목 유적지(1948년)' 가  그것이다.  여행을 시작하기 전에 4.3 사건을 배경으로 하는 <지슬, 끝나지 않는 세월2 (오멸 감독, 2013년작)>이라는 영화를 유튜브를 통해서 찾아봤다. 제주도를 수십 번을 다녀갔지만 나는 제주의 슬픈 역사에 대해 관심이 없었다. 아마도 제주도을 찾는 대부분의 관광객이 같은 생각일 것이다. 하지만 오늘의 올레길은 나에게  '천천히 살라'고 이야기해주고 슬픈 과거의 역사도 말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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