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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채 Sep 10. 2022

나는 왜 길을 걷고 있는가(9코스)

제주 올레길 9코스(대평 포구~화순 금모래 해수욕장)

제주 올레길 중에 대학 후배로부터 카톡 문자가 날아왔다. "선배님, 제주도 주소 보내주세요. 제가 그림책 한 권 선물 해 드릴께요." 내가 제주도 올레길 한 달 걷기를 하고 있는 것을 알고 <걸어요. 문도연 작가, 2022.3, 이야기꽃>라는 그림책을 택배로 보내주겠다는 것이다. 고마울 따름이다. 책의 저자가 던지는 화두는 삶이 여행이라면, 우리는 어떤 길을 걷고 있는지에 대해, 우리가 여행자라면, 우리는 어떤 모습으로 그 길을 걸어가고 있는지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후배의 문자 한 통은 나를 성찰하게 만들었다. 나는 왜 이곳 제주도에 와서 한 달 동안 걷기를 하려고 한 것일까. 과연 나는 무엇을 느끼고 얻어 갈 것인가. 30년간의 직장생활 끝에 찾아온 쉼의 시간을 통해 앞으로 남은 인생을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선배님, 제주도 주소 보내주세요.


오늘 걷는 9코스에서도 많은 길을 만났다. 숨이 턱턱 막히는 오르막 길도 있고, 가볍게 부담 없이 가는 내리막 길도 있다. 푹신푹신한 흙길도 있고, 걷기도 힘든 자갈밭 길도 있다. 때로는 며칠 전과 같이 태풍 후에는 진흙탕 길을 걸을 때도 있었고 아지랑이 피어오르는 뜨거운 아스팔트 길을 걸을 때도 있었다. 제주도에 내려와 걸어본 올레길을 통해 여러 종류의 길을 걸어왔고 남은 기간에도 수많은 종류와 다른 환경의 길을 걸을 것이다. 내가 살아온 인생도 그 길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때로는 평온한 적도 있었지만 어떤 때는 너무 괴로워 밤잠을 설칠 때도 있었던 것이다. 또 어떤 날은 기뻐서 날 뛰기도 했었고, 어떤 날은 슬픔에 괴로워하기도 했다. 나는 길을 걸으면서 인생을 돌아보고 있다. 그리고 앞으로의 인생에 대해서도 다시 한번 생각해 보게 된다.


어제까지 마친 총 10개의 코스(1~8코스, 1-1,7-1)를 합치면 100km가 넘었다. 숙소(제주올레센터)에서 출발 전에 '제주올레 100km 완주증서' 수여식이 거행됐다. "당신은 제주의 아름다운 자연과 정겨운 마을을 지나 (중간 생략) 아름답고 자랑스러운 제주올레 도보여행자입니다. 앞으로 더 나아갈 발걸음과 용기를 응원합니다." 조촐한 수여식에 기분이 좋아졌다. 물론 400km 완주 때는 더 기분이 뿌듯해질 것이다. 아침에 행사를 마치고 9코스 시작점인 대평포구를 가기 위해 버스 정류장에 갔는데 허걱, 1시간 30분 후에 버스가 도착 예정이란다. 추석 휴일이라서 그런 건지, 아니면 원래 그러는 건지 잘은 모르지만 재빨리 교통수단을 버스에서 택시로 바꿨다. 예전에는 돈을 벌기 위해 시간을 썼는데, 이제는 시간을 벌기 위해 돈을 쓸 나이가 된 것이다.

시간을 벌기 위해 돈을 쓸 나이가 된 것이다.


시작점인 대평포구를 지나 '몰질(고려 때 원나라에 바칠 말들을 배에 실기 위해 끌고 지나간길을 뜻하는 제주어)'을 따라 숲을 오르면 기암절벽인 '박수기정'('박수'는 바가지로 퍼 마시는 샘물, '기정'은 수직 절벽이나 벼랑을 뜻하는 제주어)의 정상에 이른다. 박수기정 정상을 지나 조금 걸어가면 건너 편에 군산오름(334.5m)이 보인다. 오름의 생김새가 군대 막사와 비슷하다고 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정상 부근에는 태평양 전쟁 막바지에 일본군들이 제주 민간인을 강제 동원해서 파놓은 진지동굴도 볼 수 있다. 특이하게 생긴 파란색 간세의자가 9코스 중간 스탬프 찍는 곳이다. 군산오름에서 하산해서 한참만에 마주치는 안덕계곡은 골이 깊고 물이 검은색에 가까울 정도로 깊어 보였다.


화순 금모래 해변에 도착해서 종점 스탬프 찍고 9코스를 마무리했다. 다행히 숙소 돌아가는 버스는 오래 기다리지 않고 도착했다. 숙소에 도착하여 짬을 내서 서귀포 성당에 들렀다. 우리 가족은 추석에 차례상을 준비하지도 않고 추석 음식도 만들지 않는다. 성당에서 마련한 차례상으로 대신하고 돌아가신 분들을 위해 위령미사를 드린다. 오늘은 추석을 맞아 서울에서는 모친이 방배동으로 오셔서 방배성당에서 가족들과 위령미사를 드렸다고 한다. 나도 원거리에 있기는 하지만 그래도 뭔가 미사에 참여하고 싶어 코스를 걷는 중에  잠시 걸음을 멈추고 유튜브로 '명동성당 실시간 미사'에 참여하려 했으나 인터넷 상태가 좋지 않았다. 할 수 없이 코스를 마치고서야 숙소 근처 성당을 잠시 들러 기도를 했다.

"이미 돌아가신 분들과 살아있는 모든 이에게 평화를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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