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날, 30년 지기 친구의 제주도 올레길 동행으로 19km 올레길을 마치고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보니 평소보다 훨씬 늦게 잠자리에 들었다. 원래 늦게 자면 늦게 일어나야 하는 것이 정석인데 다음날 새벽녁에 같은 시간에 눈이 떠졌다. 오늘 코스에 대한 내용과 교통편을 확인하고 친구는 공항으로 나는 시작점인 한림항을 향해서 각자 버스를 타고 이동을 했다. 그런데 친구가 가버리고 나니 '뭔가 허전한 이 느낌은 도대체 뭐지' 라는 생각이 들면서 한림항 근처 정류장에 도착했다. 갑자기 정류장 근처에서 한림성당의 십자가가 눈에 들어왔다. '맞다, 오늘이 일요일이지.' 하는 생각이 들면서 하나님도 천지를 창조하고 하루는 쉬었다고 하는데, 나도 일요일에 올레길을 걸어야 하나, 아님 그냥 쉬어야 하나. 잠깐 동안 마음이 흔들렸다. 하지만 딱히 쉰다고 할 일도 없어서 그럼 오늘은 코스도 짧으니 미사도 참가하고 쉬엄쉬엄 걸어볼까 하고 성당쪽으로 걸어갔다.
일요일에 올레길을 걸어야 하나, 아님 그냥 쉬어야 하나.
성당이 달라서 분위기는 좀 낯설었지만 절차나 과정들은 비슷하기 때문에 대충 따라 하면서 성찬식에도 참여하고 나니 미사를 참여하고 있는 내가 대견하기도 하고 마음도 편안해 졌다. 성당은 매주 축일을 정해서 기념하는데 마침 오늘은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동료 순교자 대축일' 이었다. 초창기 국내에 천주교가 전파되던 시기에 순교하신 많은 분들을 기억하고 기념하는 날이다. 며칠 전에 다녀온 올레 12코스 중에 용수리에 위치한 김대건 신부 표착 기념관을 방문한 이후라서 그런지 나에게는 느낌이 더 새롭게 다가왔다. 한 사람의 희생으로 인해서 국내에 천주교가 뿌리를 내릴 수 있었다는 생각을 하니 역시 대단하고 숭고한 일이라고 생각이 들었다. 성당 마당에는 김대건 신부의 동상과 명판이 눈에 띈다. "천주를 위하여 나는 죽어간다. 바야흐로 나를 통하여 영원한 삶이 시작된다."
오늘 걸어야 할 올레 15코스는 두 가지 중에 선택할 수가 있다. A코스는 내륙 코스(16.5km)이고, B코스(13km)는 해안 코스이다. 나는 해안 코스로 가기로 마음을 먹었다. 코스의 시작은 한림항에서 같이 시작하지만 일정 부분 가다가 두 개의 코스가 갈라진다. 아쉽게도 갈라지는 부분을 미리 확인하지 않은 게 화근이 되었다. 나는 '수원리'를 지나면서 지명에 흔들려서 '수원시'에 살고 있는 친구에게 카톡 보낼 문구를 생각하면서 속으로 키득키득 웃으면서 무심코 지나가 버린 것이다. '해안코스'로 가면 분명히 해안으로 가야 하는데, 자꾸 산으로 가는 길이 수상해서 지도를 보니 벌써 갈림길인 '수원리 사무소'를 지나쳐서 '내륙 코스'로 가고 있는 것이었다. 얼른 방향을 틀어 '해안코스' 로 합류했지만 이미 2km 정도를 허비했다. 본의 아니게 13km 코스가 갑자기 15km 코스가 돼버렸다.
해안코스로 합류를 한 후에 제대로 된 점심식사를 하기 위해 음식점을 찾았으나 어찌 된 일인지 해안가에 식당을 운영하는 곳을 찾지를 못했다. 그래도 카페 중에 쌀케이크를 파는 아담한 '쌀 디저트 카페'를 발견해서 '백설기'와 '오미자 한라봉차'를 주문해서 먹는데 카페 주인아저씨가 말을 붙여왔다. "올레꾼들은 꽃피는 봄에 가장 많고 9월에는 태풍과 추석 때문에 거의 없어요.", "제주도 사람들은 올레길을 걷는 사람들은 거의 없고 차를 타고 올레길을 다녀요", "제주도 토박이 할아버지 중에는 평생 한라산을 한 번도 안 올라가 본 분들도 있어요." 라고 하신다. 얼마 전에 tvN에서 방영된 '우리들의 블루스'에서 이병헌(이동석 역)이 평생 제주도에서 살아온 모친 김혜자(강옥동 역)을 모시고 한라산 구경을 시켜주려 했던 게 이제서야 이해가 됐다.
평생 한라산을 한 번도 안 올라가 본 분들도 있다.
우스개 소리로 남자는 세명의 여자 말을 잘 들어야 인생이 편하다고 한다. 아내의 말, 골프 캐디의 말 그리고 내비게이션의 말이다. 하지만 제주도에는 이보다 더 영향력이 센 여성들이 있다. 바로 '설문대 할망'과 '영등할망' 이다. 1-1코스 우도 등대에서 본 '설문대할망' 석상은 제주도를 빚어낸 주인이자 창조주였고 15-B 코스 귀덕 1 포구에서 만나는 '영등할망' 석상은 섬사람들에게 안전과 풍요을 안겨주는 존재인 것이다. 영등할망 석상이 있는 복덕 개포구의 신화공원을 지나 곽지해수욕장과 해안도로를 지나면 최근 핫 플레이스로 떠오르고 있는 애월 카페거리가 있다. 제주도에 방문 온 20대 초반의 젊은 남녀들이 모두 이곳에 모여 있는 듯 복잡하다. 늦은 점심 겸 저녁식사로 이곳에서 '전복 돌솥밥'으로 제대로 된 식사를 한 끼 하고 다시 종점인 고래포구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