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딩동~ “ 추자도를 운항하는 선사로부터 문자가 왔다. ‘해상의 기상악화로 인하여 결항되었습니다.’ 그러고 나서 한 시간쯤 지나서 전화 통화로 예약을 하루 뒤로 미루었지만 선사 측에서는 바꾼 예약 날짜도 장담은 못한다고 한다. 허긴 수시로 변하는 해상의 날씨를 누가 장담할 수 있겠냐. 저녁이 돼서야 확정 문자가 날아왔다. 그렇게 우여곡절 끝에 드디어 1박 2일 일정으로 추자도를 갈 수 있게 되었다. 박 배낭 무게를 줄이려고 먹을 것도, 옷가지도 최소한으로 챙기고 나머지 짐들은 숙소에 그대로 두었다. 마치 소풍을 앞둔 초등학생의 심정으로 잠을 설쳤다. 지난번 '우도' 나 '가파도' 와는 또 다른 기분이다. 우도는 한나절 있었고 가파도는 캠핑을 했지만 다음날 일찍 섬에서 나왔다. 하지만 추자도는 넉넉하게 시간을 갖고 이틀을 머물기로 한 것이다.
소풍을 앞둔 초등학생의 심정으로 잠을 설쳤다.
제주연안 여객터미널에서 9:30에 출발해서 추자도 상추자항까지 약 한 시간 동안 배로 이동했다. 배의 규모가 크다 보니 좌석도 지정이 되어 있었다. 배가 출발하자 선장의 안내방송에 이어 부선장쯤 되어 보이는 선원이 이것저것 설명을 해준다. 배가 심하게 흘들릴수 있으니 안전벨트는 가능하면 매지 말라고 한다. 아니 이게 무슨 말인가. 내가 잘못 들었나 했지만 안전벨트를 매게 되면 하체는 고정되고 상체만 흔들려서 어지러움 증과 구토를 유발한다는 말이다. 그리고는 희망자에 한해서 명품백을 하나씩 공짜로 나눠 준다고 했다. 속이 울렁일 때 쓰는 위생봉투였다. 배가 출발하고 10분 즈음 지나자 배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마치 놀이동산의 놀이기구를 타는 느낌이었다. 놀이기구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 나는 거의 실신을 했다.
가까스로 추자도 땅을 밟으니 천국이 따로 없었다. 여행자 센터 앞에서 올레 시작점 스탬프를 찍고 밥집 추천을 받으려고 센터 안으로 들어가 추자도 안내지도의 올레코스를 보는 순간, 갑자기 머리가 아팠다. 내가 예상했던 코스가 아니었다. 내가 알고 있던 추자도 18-1 코스는 스탬프 찍는 곳이 2곳(상추자항, 목리 슈퍼)이었다. 하지만 안내지도에는 섬 내에 두 개 코스로 나뉘었고 스탬핑 하는 곳도 4곳 (상추자항, 돈대산, 신양향, 대왕산)으로 변경된 것이다. 어찌해야 할지 당황스럽긴 했지만 박 배낭을 메고 다닐 수가 없기 때문에 우선 사전에 찜해둔 상추자 나발론 하늘길의 끝 ‘용둠벙(용이 노는 웅덩이 같다는 말로 '둠벙'은 '물 웅덩이'의 방언) 전망대’로 이동해서 텐트 피칭(텐트를 세우는 것)을 마무리했다.
‘용둠벙 전망대’로 이동해서 정오쯤 텐트 피칭을 마무리했다.
텐트를 설치한 위치가 추자도의 명소인 '나발론 절벽(영화 '나발론 요새'처럼 생겼다고 낚시꾼들이 붙여준 이름)'의 끝자락에 있고 지도를 보니 자연스럽게 올레길과 합류가 되는 것을 확인하고 바로 나발론 절벽으로 기어 올라가기 시작했다. 출발할 때부터 배는 살짝 출출했지만 참고 상추자도에서 하추자도를 넘어가는 추자 대교 근처에 음식점이 있으면 들어가서 점심식사를 하려던 요량이었다. 하지만 예상과는 다르게 식당을 전혀 볼 수가 없었다. 대교를 건너자 왼쪽 길은 올레 길이었고 오른쪽 길은 ‘묵리’ 마을로 가는 길이었다. 마을 쪽으로 가면 식당이 있을 거라는 생존 본능으로 올레길을 포기하고 마을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오르락내리락하는 아스팔트 길을 힘들게 걸어서 마을에 도착해 버스 정류장에 앉아 있는 동네분에게 식당 위치를 물어보니 이 동네는 식당이 없단다. 아뿔싸!
나의 선입견이 불러온 참담한 결과였다. 몸은 지쳐서 다리에 힘도 없고, 허기진 상태에서 정신까지 멘붕 상태였다. 뒤쪽에서 버스 오는 소리가 들리면서 정류장 쪽으로 사람들이 몰리기 시작했다. 나도 덩 달아서 버스에 올라타고 식당이 있을 거 같은 곳을 재빨리 지도를 보고 추측을 했다. '신양항'을 지목하고 정류소에서 하차했다. 추자도에서 두 번째로 큰 항구이니 나름 식당 정도는 있는 거라는 생각이었다. 왠지 나는 올레꾼이 아니라 한 마리의 하이에나가 되어 먹이를 찾아 산기슭을 헤매는 거 같았다. 길거리는 생각보다 휑했다. 지나가는 동네분에게 물어보니 이 마을에는 식당이 딱 1군데에 있단다. 에구머니나! 물어 물어 찾아가니 ‘영업 중’이라는 글자가 문에 붙어 있어 들어가려고 했더니 문이 잠겨 있다. 문 아래쪽에 정기휴일이 첫째, 셋째 수요일이란다. 젠장! 오늘이 바로 셋째 수요일 아닌가.
배에서는 꼬륵꼬륵 소리가 나고, 다리는 아스팔트 길을 오래 걸어 장딴지에 경련이 일어나고, 날씨는 덥고 목은 말랐다. 이게 뭐 하는 건가 싶다. 정신을 가다듬고 작전을 바꿔서 식당 찾는 것을 포기하고 편의점이나 가게를 찾았다. 다행히 길 끝자락에 편의점이 보여서 굶주린 배를 채웠다. 역시 속이 채워지니 마음이 편안해지고 머리 회전도 빨라지는 듯하다. 머릿속에는 일정에 대한 시뮬레이션이 돌아가고 있었다. 남은 시간에 모든 스탬프를 찍기는 무리가 있어 제일 가보고 싶었던 ‘황경한의 묘’에 갔다가 시간이 되면 '돈대산'을 가는 걸로 했다. 하지만 결국 지름길이라 생각했던 '추석산 소월길' 끝자락에서 무심코 지나친 '일제 진지동굴'을 다시 올라 가느라고 시간이 지체되었다. 더 이상 행군은 중단하고 신양항에서 버스를 타고 다시 상추자항 쪽으로 이동했다. 벌써 오후 5시가 지났다.
저녁식사 하기는 좀 이르긴 했지만 추자도는 굴비가 유명한 곳이라서 맛집을 찾았지만 최소주문량이 2인분이란다. 늦은 오후에 편의점에서 먹은 누룽지탕이 아직 소화도 되지 않아서 2인분 먹기는 부담스러워 몇 군데 식당을 옮겨 겨우 1인분 생선구이 정식 판매하는 식당을 찾아냈다. 조기 2마리에 커다란 돌 돔 1마리가 먹음 직 스럽게 구워서 나왔다. '한라산' 한 병을 주문하고 글라스 잔에 얼음을 채워 마시면서 흘낏 옆 테이블을 보니 섬사람들은 '참이슬'을 마시고 있었다. 그리고 가게 영업용 오픈 냉장고안에도 한라산 소주병 보다 참이슬 소주병이 훨씬 많았다. 이건 뭐지! 서울에서 온 나만 제주도 '한라산' 소주를 마시고 있다니. 그러고 보니 추자도는 원래 호남이었다가 제주도로 바뀌었다는 기억이 떠올랐다. 그러고 보니 섬사람 사람들은 아직도 호남 말씨를 쓰고 있었다.
대서리 식당에서 텐트가 있는 용둠범 까지 소화도 시킬 겸 터벅터벅 걸어갈 때 즈음 저 멀리 수평선 너머로 서서히 해가 지기 시작했다. 마치 퇴근하고 집에 돌아가는 느낌이었다. 텐트로 돌아와 텐트 앞에 등산용 매트를 펴고 앉아서 노을 감상할 거라고 모기향을 피우고 스마트폰으로 노래를 찾았다. 역시 추자도에서는 이런 노래 정도는 들어줘야지 하는 생각으로 가수 김추자의 노래를 선곡 했다. "사랑한다고 말할걸 그랬지, 님이 아니면 못 산다 할 것을~♪" 해는 이미 떨어지고 노을이 파도 끝을 온통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어디선가 도깨비불이 날아와서 깜짝 놀랐다. 자세히 보니 반딧불이가 내게로 다가왔다가 멀어져 간다. 하늘에는 무수한 별들이 빛나기 시작했다. 추자도는 이미 내가 되었고, 파도도, 별도, 반딧불이도 이미 내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