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년 고찰 주지는 걱정이 많아졌다. 고라니는 그나마 괜찮은데 멧돼지라는 놈이 절에서 키우던 농작물을 말끔하게 접수하고 스님을 공격해 한동안 고생한 뒤, 포수를 불러야 하나 전기 담을 설치해야 하나 고민하던 중 보살 한분이 집에서 키우던 백구 수놈을 절에서 키우자고 제의를 하여 본당 후편의 삼신각 위쪽에서 키우기로 결정한다.
백구는 삽살개와 진돗개 잡종견으로 사납기가 하늘을 찌르고 온순하기가 이를 데 없는 지킬박사와 하이드 같은 견이다. 스님과 보살들이 주변에 오면 꼬리를 마구 흔들어 먼지가 날릴 정도지만 고양이나 다른 동물이 나타나면 호랑이 같이 으르렁 거리는 투견으로 변한다.
백구가 이사 온 뒤로 멧돼지도 영역을 옮겼는지 나타나지 않았고 고라니도 형님 따라 이주했는지 컥컥 거리는 소리가 들리지 않아 한동안 조용히 지내고 있던 찰나 아랫마을에 흑구 암놈이 이사 온 뒤 밤마다 백구가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짖어대는 바람에 주민들의 걱정이 하루 이틀 쌓여가고 있던 날이 계속된다.
주지는 보살을 불러다 놓고 더 이상 절에서 백구 동자와 함께 하는 것이 적절치 않으니 속세로 귀향하는 것이 어떤지 신도회장, 총무, 사무장, 보살들이 협의를 하는데 백구를 보낸 보살이 몸이 편치 않아 백구를 거둘 수 없는 상황이니 아랫마을 흑구와 짝을 이뤄주는 것이 어떨는지 일방적 혼담이 오간다.
흑구 주인은 가톡릭 신자로 파계한 백구를 맞을 수 없다며 다른 짝을 알아보라고 하여 흑구와 백구의 합방은 이뤄질 수 없는 로미오와 줄리엣으로 변한다. 어쩔 수 없이 백구의 세속 입문은 점점 멀어져 가고 있던 어느 날 어둠이 가득 찬 하늘에 마른벼락이 들이치자 검은 멧돼지 무리가 절에 내려와 절밭을 쑥대밭으로 만들어 놓았다.
화가 날 때로 난 스님은 목에 채워놓은 백구의 넥타이를 풀어주자 백구는 멧돼지가 올라간 산 위로 따라가 절에 나타나지 않았다. 스님은 걱정되어 절 일을 제처 놓고 백구를 찾기 위해 사방팔방을 헤매다 얼마 후 산에서 들짐승에게 뜯긴 흔적이 있는 죽은 멧돼지 새끼를 발견한다.
분명 백구가 일으킨 사건으로 어림짐작 했을 무렵 피투성이가 된 채 끙끙거리는 붉은 백구를 발견하고 절로 데리고 내려온다. 정성을 다해 치료해 주고 몸보신하라고 보살이 삶아온 닭을 백구에게 먹이자 백구는 금방 천하장사가 된 듯 강한 면모를 드러낸다.
삼일 동안의 사투로 백구는 지킬을 버리고 하이드로 변신한다. 멧돼지 무리는 멀리 떠난 듯 흔적이 사라지자 또다시 백구 처리 방안에 대해 회의가 개최된다. 어린 백구가 이젠 성체가 되어 함부로 대하기 어려운 사정으로 더 이상 절에서 거둬들이기는 어려운 현실이다.
수소문 끝에 뒷마을에 멧돼지가 나타나 밭을 다 헤쳐 놓아 걱정이 이만저만 아니라고 보살 중에 한 명이 사무장에게 말하자 스님도 뒷마을 이장을 만나 백구 처리 방안에 대해 이야기를 풀어보자며 백구를 트럭 뒤에 태워 뒷마을 이장댁으로 출발한다.
자신의 처지를 예감한 지킬은 허술하게 여며진 목줄을 풀어헤치고 트럭에서 뛰어내린다. 이를 알아차리지 못한 스님과 사무장은 뒷마을 이장댁에 도착하고 나서야 백구가 사라진 것을 알아차리고 급하게 트럭을 돌려 왔던 곳으로 주변을 살피며 백구를 찾는다.
"백구 이름이라도 지어 줬으면 좋았을 텐데"
이름을 지어주지 않아 사라진 백구를 찾는데 어려움이 있었을 때 백구는 이미 하이드가 되어 산으로 올라가 멧돼지 사냥에 나선 것으로 추측한다. 다시 3일이 지나고 10km 떨어진 마을에 붉은여우가 나타나 양계장 닭을 100여 마리 목을 물어 죽였다는 신고가 접수된다.
붉은여우가 암탉 두 마리를 뜯어먹고 우리에 있던 닭 90여 마리를 물어 죽였는데 목에는 줄이 달려 있다는 제보가 들어왔다. 분명 3일 전에 절나 간 이름 없는 백구가 틀림없어 보인다. 이 사실을 스님에게 알리자 스님은 우리 백구가 맞을 거라며 물려 죽은 닭 값은 절에서 부담하겠다고 하며 백구를 용서해 달라고 양계장 주인에게 읍소한다.
"다 내 불찰이요"
"부처님 뜻일 게요"
"스님이 제값을 물어준다니 이 일에 대해 더 이상 거론하지 않겠습니다."
양계장 일이 있고 얼마 후 마을 어귀에서 백구 한 마리가 로드킬 당했다는 신고를 접하고 다가서자 천년 고찰에 출가한 붉은 백구가 혀를 내민 채 길바닥에서 숨을 힘겹게 쉬고 있어 백구를 순찰차 뒷좌석 매트에 뉘어 절까지 바래다준다.